많은 분들의 글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열심과 노력을
그리고 다비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냥 막연히 '그렇겠거니..'하는 것들의 다름 면목들을 보게 되어
믿음의 걸음마를 걷는 저에게는 또 다른 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여쭙고자 하는 것은..
1. 일반적으로 성경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언어적 배경(헬라어/히브리어의 어원)을 알아야
성경해석이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모두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을 통해서
신학공부를 해야 하는가?
2. '인문학적 성경보기'라는 심오한 학문적 접근 방식과 내용들이
어느 정도의 학식과 인문학적 지식을 가지지 못한 계층,
예를 들어 시골 할머니, 저학력자, 어린이 등에게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3. 인문학적 성경해석을 통한다면 해석자 및 설교자의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질텐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초신자나 학문적 열등자들은 어떤 말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내 믿음대로 가야하는가?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샬롬.
***** 정용섭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1-22 12:30)
***** 정용섭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2-01 20:27)
다른 다비안들에게도 해당될 것 같아서
일단 사랑채 메뉴로 옮겼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감사.
다비아 곳곳에 널려 있으니까
관심 있는 분들은 그것을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그런 인식과 관점들이
한국교회의 오래된 관행, 선입관 등으로 인해서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한 거지요.
이게 우리의 영성을 어떻게 훼손하는지 역사적인 예를 하나 들을께요.
종교개혁 시절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았다는 건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게 지금 우리의 눈에 이상하게 비치지만
그 당시에는 그걸 구입해야 믿음이 좋은, 아주 당연한 종교행위였답니다.
면죄부의 잘못에 대해 심증이 가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물증이 없으니 군소리 못하는 거였지요.
루터는 그걸 신학적으로 따지고 들었거든요.
루터는 믿음이 부족한 인물이라는 욕을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면죄부 현상은 많답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신학적인 논의가 필수적이겠지요.
다비아가 진리의 기준이라는 주장은 아니랍니다.
다만 진리 논쟁의 중심에서 도망가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영적 결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개신교도들은
당시 변방에 불과한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외롭고 무모하게 교황청과 신학적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마틴 루터의 후예들이랍니다.
여기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습니다.
아자.
목사님의 친절하신 답글에 감사 드립니다
요즘와서 더더욱 느끼는 건데요,
깊은 것이 용해되어 있는 목사님의 '편한' 글쓰기가 참 좋습니다!^^*
(사전 허락을 받지 않고 올려나도 되는지 모르지만...)
저희 교회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있는데
정목사님의 답변의 글이 좋은 지침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의 글은 겨울 들판에서 부르짓는 세례요한을 연상케 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아닌 모든 생명을 부둥켜 안고 살리는 바람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요 글을 먼저 읽었어야 하는 거군요.
정 목사님의 답변들을 읽다 보니 혹 제가 실수한 거 없나 싶어
지우고 싶지만 그냥 두렵니다.
새벽기도 님은 ice-breaker?
주신 질문들과 또 그에 대한 답변들이 어쩜 머리를 요렇게 쨍하게 울리는지요.
감사합니다.
의문사항 들 ( 믿음이 없는 것 같아 열지 못했던 의문)에 대한
답(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을 주고 있어서 좋습니다.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질문과 답변에 그리고 댓글에도 감사드립니다.
다비아로 향한 저의 조그만 질문에
정목사님의 하나님으로 향한 믿음의 답변과
여려분들의 환대를 접하면서 감동 그 이상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은 경험을 하셨겠지만
대부분 교회나 목사님들의 신앙상담에서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간증'으로 답변하시지요.
그런데 이 "다비아"란 곳이
인식이라는 소중한 은사를 주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적 행하심을 신뢰하게 만드는
소중한 자리인것 같습니다.
앞으로 자주 뵈게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샬롬.
반갑습니다.
새벽기도 님께서 올려주신 질문과 목사님의 답변을 몇번이고 읽어 보면서,
저도 제 자신을 다시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자신과,공동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목사님의
솔직한 답변은
항상
머리를
맑게 하거든요 ~^*^
모든 목사님들이 다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휴...
저에게는 <새벽기도>님의 질문이 ‘진리는 어떻게 추구하나?’ 와 같은 방법론 적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에 대한 정 목사님의 답변을 통하여 많은 배움을 얻었기에 두 분께 감사 드립니다. 굳이 부연하면, 성경의 진리추구와 진리수호의 관점에서 신학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므로, 지금도 신학 함에 최선을 다해야 함에는 조금도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연히 인문학 (소위 말하는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학문적 성과와 그 최신 기법을 익히고, 그 경계가 어디인지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과학, 자연과학, 의학, 공학과 그 성과인 최 첨단의 과학기술 문명까지도 최대한 활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저의 소견을 밝힙니다. <새벽기도>님은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지만, 저의 관심은 진리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참 ‘진리’란 시대상황에 변하지 않으며, 또한 어렵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주 전공이 공학이다 보니 복잡한 것을 무식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자주 범합니다. ^_^) 그리고 과거 긴 역사를 통하여 진리성을 확보한 대표적인 종교에는 바로 무신론인 불교와 유일신의 기독교가 있겠지요. 이 두 종교에서 제시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불교에서는 ‘자비’,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고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지요. 두 단어의 뜻은 비슷하지만 대체로 ‘자비’하면 해탈한 부처님이 중생을 향하여 베푸는 일방적인 시혜로 이해됩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가치인 ‘사랑’에 대하여 모르는 분이 아무도 없지요. 특히 불교의 ‘자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은, ‘사랑’이란 그 대상이 있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교류의 성격을 갖지요. 이때 대상이 자기 자신인 사랑이 바로 ‘죄’의 핵심 이고요.
저의 본론입니다. 신약에 기록된 진리로서의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교회를 통하여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실체이지요. 이때 문제는 이러한 사랑이 결코 교리나 공론은 아니면서도 다음과 같은 추상성을 갖기에 어렵지요. 즉, 교회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며, 성전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이지요. 생명이 있는 교회란,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활동하셔서 ‘사랑’을 실현하는 교회이며, 크리스천들은 거기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분적으로나마 실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신학의 너머에 존재하고 지적 수준과도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세 가지 질문을 주셨군요.
1. 역사비평을 통해서만 성서가 해석되는가?
<답> 예, 그렇답니다.
문화유산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그 당시의 배경을 알아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또는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저술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신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건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지요.
평신도 지도자들을 포함해서요.
성서를 통한 영적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성서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게 전제된답니다.
2. 지적 능력이 없는 신자들의 신앙경험과 인문학적 성경읽기
<답>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사실 다른 게 아니라 신학적 성서읽기에요.
그걸 전제하고 답을 드릴께요.
신학은 지성을 토대에 두지만 그것에 매몰되지는 않습니다.
지성보다는 영성이 더 중요하지요.
이 영성은 통전적인 진리 인식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과의 공명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신앙적 깨달음이기 때문이랍니다.
지성이 좀 부족하다 하더라도 영성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게 단지 묻혀 있을 뿐이지요.
평생 농사만 지은 촌부라 하더라도
평생 대학교에서 가르친 교수들보다 영적으로 한 수 위인 분들도 많지요.
신학은 바로 그 영성과 연관된답니다.
지성이 없는 사람들이 신학적 가르침을 이해하기는
물론 쉽지 않긴 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건 결코 아닙니다.
노숙자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단지 한끼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이 밥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왜 인간의 밥을 놓고 투쟁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지요.
인문학적 성서읽기, 신학적 성서읽기는 바로 그런 작업이에요.
인간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지요.
3. 해석의 다양성과 믿음
<답> 인학학적, 신학적 성서해석은 다양하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분간하기 어렵다고 하셨지요?
그건 진리 투쟁의 문제라서
어쩔 수 없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닌, 무조건 믿는다는 방식에도
차이는 아주 많습니다.
새벽기도 님의 세 가지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고도의 신학적 훈련이 필요한 다비아 운동이
실제로 그런 능력이 없는 평신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 하는 거지요.
신앙은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인데,
다비아 운동의 방향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런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
신앙은 신학이 아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은
여기 다비아에도 많고,
저도 근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여기 동요를 잘 부르는 학생이 있답니다.
청년이 되었는데도 그냥 동요만 부르고 있어요.
그는 음악적으로 더 큰 수고가 필요한 아리아, 리드, 또는 창을
부를 생각도 안하고 그게 있는지도 모른답니다.
이건 결코 정상적인 게 아니겠지요?
신학이 없는 신앙은 동요 부르기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해도 음악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 전문적인 음악행위와는 구분되지요.
지금 제가 신앙 엘리트주의를 부르짖는 게 아니랍니다.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말씀드릴 뿐이에요.
그게 없으면 종교는 인간 구원을 방해합니다.
민중의 아편이나 집단적 노이로제로 빠질 가능성도 높지요.
우리가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발견하는 그런 종교현상들말입니다.
만약 신학이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면
사이비 이단의 발호도 그냥 내버려두는 게 마땅하겠지요.
조금 더 직선적으로 이런 질문이 나올 겁니다.
시골 할머니들의 신앙은 신학적 바탕이 없으니 잘못되었다는 거냐.
이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답니다.
그들이 무당을 찾듯이 예수를 찾은 들
그걸 누가 판단하겠어요.
그들에게 어떤 영적 경험이 있는지를 누가 단정하겠어요.
관광뻐스에서 뽕짝에 몸을 흔들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분들에게
원초적 음악경험이 없다고 누가 재단하겠어요.
또는 민간요법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사이비 치료사들을
치유행위와 완전히 배치된다고 누가 확언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의과대학에서의 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한답니다.
그 길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최선이기 때문이지요.
신학도 그와 같습니다.
지난 역사의 의료 행위를 공부하고 합리적인 인체 공부를 하면서
병과 투쟁하는 거지요.
간혹 신학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게 바로 위의 말에 해당됩니다.
왜 7,8년 의학공부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의학공부를 마쳐도
임상에서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하듯이
신학도 목사들에게는 필수적이랍니다.
평신도들은 전문가들에게서 배우는 좋겠지요.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의학공부를 쉬지 않는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맡기듯이
그런 신학적 영성이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에 참여해야겠지요.
위 대글은 새벽기도 님만을 대상으로 한 건 아니랍니다.
그러니 혹시 과격한 표현이 있어도 마음 쓰지 마세요.
신학이 구원은 아니지만
구원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한답니다.
좋은 주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