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다비아에서 활동하다가 한동안 푹 쉬고 왔습니다.
정목사님께서 공부가 더 필요한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틈틈히 책도 보고 생각도 많이 해보고 있습니다.
컴백 인사를 질문으로 하게 되었네요.
저는 다비아에서 '신화적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걷는것,물로 포도주 만드는 사건,동정녀 사건 등)
물론 정목사님께서는 그런 사건들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계시더군요.
(사실 그래서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역사적 사건인가요 아니면 신화적 사건인가요?
아마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시는데 이견이 없을 것 같은데...
(혹시 이견이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한다면,
성경의 다른 이적들은 신화적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물 위를 걷는게 왜 불가능한 사건이어야 하는지?
만약 제가 불신자라면 성경의 다른 기적은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도
예수의 부활은 절대 믿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다른 이적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제 생각엔 예수의 부활로써 복음서의 이적들이 역사적 사건임이 확증되는것 같은데...
부족한 저의 의견을 자꾸 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물어보신 것에 대한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조금 귀찮더라도 신화적 세계관에 대해서 다시 설명을 드리면 그것은 당시에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마치 현대인들이 합리성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만 신화적 세계관 위에 쓰여졌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일부는 당시 사람이 썼고 일부는 현대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썼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화성이 비역사성을 의미하지 않듯이 현대의 합리성 역시 역사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개념이 아인슈타인에 상대적 시공간으로 대치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계속 논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것 역시 하나의 관념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관만 달라져도 역사적 사실 여부도 달라지는 요새 뉴라이트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자주 드네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인지에 대해선 일단 긍정적입니다.
문헌학적으로 예수님께까지 소급할 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큰 본문이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형태 그대로는 아닐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마태와 누가의 기록이 다르고 마태보다는 누가의 기록이 원문에 가까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00% 온전한 형태의 주기도는 아닐찌라도 주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것과 그 기록이 제자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성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역사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본문이 신화적 세계관 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역사적 서술에서 실제와 같으냐?의 문제와 종교적 서술에서 그것이 진리냐?의 문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경의 원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문이라고 이야기하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본문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사라진 원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을 재구성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 본문이 가짜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으며 그 이해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과정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반석은 성경의 문자적 내용이나 역사성이 아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며 오늘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이 아닐찌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그를 믿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료로써 성경의 역사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 증인들의 고백이며 그들이 만난 예수에 대한 기억과 경험의 가치들을 신뢰하는 것이겠지요.
(그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믿음'이라는 말보다는 '신뢰'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산상수훈과 관련된 것은 단적으로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산상수훈에는 인용된 것, 창작된 것, 전해진 것등 많은 층위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까지 예수님에게 소급시킬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yes or no로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본 것을 기록한 것이나 기적을 본것을 들은 기록이, 예수님 말씀을 들은 기록보다 일반적으로 더 사실성이 높다고 생각되는데"라는 말은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뭐가 더 사실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기적을 본 것을 들은 기록'과 '말씀을 들은 기록'이 서로 다른 말인지요?
다시한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제가 이해한 한에서 말씀드리면 기적에 관한 기사들과 어록에 관한 기록에서 기적에 대한 기사가 더 사실성이 높다는 말로 이해를 했습니다. 만약 질문하신 것이 기적 자료와 어록 자료의 역사성이라면 무엇이 더 낫다고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거기서 거기라서..^^;;
일부가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기술되었다고 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와 같이 현대인 누가보아도
사실적인 표현이 아닌부분을 말하려는 것이었는데 오해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사실 이문제에 대하여 제가 의문을 갖는 것은
성경의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다는 견해때문입니다.
신학의 차원에서는 당연한 태도이겠지만
신앙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 부활사건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다른 기적은 사실인지 아닌지 알수없다면서
예수님 부활사건만은 역사적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그것또한 납득하기 어려운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적뿐만아니라 예수님 가르치심에 대한 기록도
사실여부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반석은 성경의 문자적 내용이나 역사성이 아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며 오늘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이 아닐찌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하나님 경험은 성경을 통해서가 아닌
사도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와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한다는 것인지요?
우리 신앙의 근본이 되는 성경 모든 구석구석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면 성경 전체 흐르는 큰 줄기를 신뢰할수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을 신뢰라고 표현하셨는데 뜻자체는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신, 믿음, 은사, 신유 이런 단어들 자체가 나쁜것이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교회들의 위 단어들의 남용, 오용에 의하여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것이 아닌가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글을 포함해서 많은 글들을 읽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는데 베땅이 님이 댓글을 주셨기에
식견이 깊으신것 같아 견해를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베땅이님의 상세한 설명이 제 이해에 대한 간극을 조금은 좁혀주었으나
여전히 성서의 기록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남아있습니다.
제 기존 신앙경험이 아닌 백지상태에서 이해해보고 싶군요.^^
아니면 영원히 이해 못할수도......
제가 몇가지만 여쭤봐도 될런지요?
첫째,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다면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왜 그것은 누가봐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
지우파님이 보시는 부활과 승천의 역사성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보기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서로 비슷해보입니다만...
부활도 하시는 분이 하늘로 승천하시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요.
이것은 부활이 승천만큼 허황된 이야기라는 것이 아니라 두가지 이야기는 역사성 여부를 차치하고 동일한 신화적 세계관 위에서 기록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허구일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 볼 때 신화적이라고 말할 때의 허구성이 역사적이라고 말할 때의 허구성보다 더하진 않습니다.
신화적이라고 말할 때의 허구 가능성은 역사적이라고 말할 때 그 기술이 허구일 가능성 혹은 몇천년 후라도 허구라고 밝혀질 가능성과 거의 동일합니다.
역사적이고 합리적이면 다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의 신앙(?)이듯이 과거에는 신화적 기술이 사실이라고 믿었지요.
미래에 누군가가 지금 우리의 사고를 본다면 지금 우리가 신화적 사고를 바라보듯 하나의 오류처럼 볼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신화와 역사성은 크게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자꾸 두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약간 무례하게 여쭈었습니다.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
둘째, 지우파님의 신앙은 역사적 사실이 틀리면 무너지는 것인지요?
오히려 신학의 차원에서는 역사성의 여부가 굉장히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신앙하는데 있어서 역사성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옆에 달려 죽은 강도의 신앙과 구원이 역사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신앙은 실존적 만남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믿고 있구요.
보통 하나님을 처음 만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신앙의 기초를 역사적 사실 위에 두지 않습니다.
신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성이나 이런 것들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믿기 위함이 아닌 변증하고 설명하기 위함이겠지요.(다분히 교리적이 아닐까요?)
제가 이야기하는 경험은 초월적 경험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일한 하나님 앞에 하나의 부족한 피조물로 서게 되는 경험과 더불어 십자가를 통해 선포된 은혜가 아닐찌요.
바울이 이야기하는 케르그마라는 것은 결국 이 '십자가의 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언급이나 증명이 극히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증언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겠지요.
여기어 어떤 역사적 사실 여부가 관여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의 역사성이라면 신구약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록의 오류라던가 역사적 사건과의 일치하지 않음 그리고 과학적 기술에서의 부족함 등으로 인해 이미 흔들리는 터전이 아닌지요.
우리의 신앙의 토대가 되는 진정한 반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십자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지우파님은 누군가와 대화하실 때 그 사람의 말을 믿기 위해 세밀한 부분들을 모두 따져물으시는지요?
성경의 구석구석의 역사성을 따지지 않아도 큰 줄기를 파악하고 신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제 친구가 저에게 어제 길 가다가 100만원을 주웠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은 공짜로 100만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기 위해 그 사람이 길을 걸어갔던 시간이 정확히 몇시 몇분인지, 몇명의 목격자가 있었는지 지폐의 일련번호가 몇번인지 혹은 그가 흥분하여 말하는 약간의 귀여운 허풍 등의 사실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밥한끼 쏴라!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 증언을 믿게 하는 것은 사실여부이기 보다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신뢰와 믿음은 같은 말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 사용되고 있는 믿음은 이데올로기적 개념이 다분히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에 너도 동의해" 뭐 이런 것이지요.
하지만 본래 믿음이란 관계안에서의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질된 믿음의 의미보다는 신뢰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것이구요.^^
대동소이 했으나 소동대이해진 케이스입니다.
쓰고 나니 글이 기네요...-_-
저도 아직 공부하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또한 크리스챤은 모두가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배워나갈 수 있음이 복된 것 같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 있다면 더 큰도움이 되길 바라며 여기서 글을 줄여봅니다.
답글을 바로 또 주셨군요.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사이트에 못왔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문제로 저보다 더 잘아실것으로 생각되는데.....
다른 문제는 포괄적으로, 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짧게 쓰겠습니다.
성경이 역사적인 사실인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신앙차원에서는
말씀하신바처럼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유는 조금 다른것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의 증명여부를 떠나 믿는다는 차원입니다.
여기저기서 역사적 사실이다 아니다를 증명하려는 것에 휘둘린다면 벌써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지않고 믿는자가 복있다고 하셨지요(깊은 뜻이 있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성경이 허구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을 경우 극단적으로 하나님도 전지전능한 분이 아닐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해서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을수도 있다고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우리 기독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닐런지요.
역사적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베땅이 님의 기본적인 말씀의 틀은 이해가 되면서도 구체적으로 믿을만한 내용이 없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가 제 의문이었습니다.
베땅이님의 사역의 길에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함께하시길....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부활과 승천 중에 어떤 것이 더 믿을만 하다 싶은 것은 없어 보입니디만...
그 두가지를 구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설명해주시면 감솨...
두번째로 역사적 사실을 떠나 믿는 것과 역사다 아니다가 관계 없는 것과 다른 말인가요?
저는 기독교인의 신앙이 역사적인 것 위에 놓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역사다 아니다를 증명하려 하는 것에 휘둘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허구일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고 역사적 사실 증명여부를 떠나 믿는다는 것이 무슨뜻인지요?
증명되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사실이라 믿어라! 라는 말인지요?
저는 전능한 하나님, 대속 등의 개념은 이스라엘과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 경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믿을만한 내용이 없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요?
저는 믿음의 대상을 사건 외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의 역사성 여부와 관계없는 것이지요.
즉, 그런 사건들의 역사적 허구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제 믿음과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예수의 부활사건의 진위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예수의 부활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부활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밑에 그림은 르네마그리트라는 화가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라는 그림입니다.
저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지요.
저는 성경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왠지 처음 질문하신 분과 상관없는 사람들끼리 글을 오래 쓰고 있는 것 같네요.^^
제 댓글이 또 늦었습니다.
베땅이님과 제 글이 온통 이 칸을 도배하는 것같군요.^^
오른쪽으로 자꾸 밀려나서 땅도 좁아지고... ㅎㅎ
지난 베땅이님 댓글에서 베땅이님과 제 견해가
평행선을 달리는 실마리를 찾은것 같습니다.
하나님, 대속에 대한 개념을 저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베땅이 님은 상대적으로 생각하시는데서 기인한다고 생각되는군요.
출발점이 달라 더이상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만 쓰려다
한참 토론하다가 갑자기 댓글 안다는 것도
예의가 아닌것 같아 질문하신 것에 대하여 씁니다.
제가 이번 댓글을 마지막으로 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는 부분적인 모든 것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면 상세히 알게 되겠지요.
지난 댓글 첫번째 질문에 답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느냐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활과 승천의 역사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부활은 복음서 여러부분에 기록되어있고 여러사람의 증인이
있으며 비유적이 아닌 사실전달에 주력하는 내용으로 보아
저는 사실로 믿습니다.
그리고 승천의 경우는 복음서에 기록된 곳이
마가복음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와
누가복음 24: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이렇게 두곳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누가복음은 승천부분에 대한 언급이 가로안에 있어
원문에 없는 것이 번역시 들어간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도 승천에대한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만
성경 전반적으로 부활보다는 그 기록의 구체성 및 사실성 기록에 있어
부활보다는 부족하다는게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에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예수님 부활시
육체는 지금 우리의 육체와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것인지 아니면 저멀리
멀어져가신 것인지 진정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신것인지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수는 있을겁니다.
인간의 생각에 예수님의 승천이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이야기이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비현실적이냐 아니냐라는 것은
의미없는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저는 신학이나 철학에 문외한인 이공계 출신이라
제 주장이 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을수도있겠습니다.
우리가 고대인의 시각이 신화적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 후손들도 우리를 신화적인 시대에 살았다고 할것입니다.
그 후손도 또한 자신들의 후손에 의해서 또 그렇게 평가되겠지요.
오늘날의 과학의 기술이 분명 예수님계실때보다 진일보한 것이지만
총체적인 우주삼라만상의 신비에 비해볼때
우리가 안다고 자랑하는 지극히 제한적인 과학적 지식은
옛날 사람들과 별 다를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신비를 모릅니다.
예를들어 생명의 근원에는 전혀 접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최소단위가 원자이고 양자와 전자는 쪼개질수 없는
것을 진리라고 알려주던 과학이 최근에는 양자는 무언가로 또 쪼개질수
있다고 발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증명해낸 과학적 진리라고 믿는 것은
허물어질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이 안다고 착각하고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성경을 과학의 눈으로 재단하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두번째 는
역사적 사실을 떠나 믿는다는 것은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고
역사가 사실이나 다니다의 증명은 객관적 혹은 학문적 차원이겠지요.
성경에 대한 어떤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다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해도 분명 그 한계는 있습니다.
저같으면 어떤 학자의 증명보다
성경이 사실이고 진리라는 것을 믿을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때 모든것이 드러나겠지요.
<증명되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사실이라 믿어라! 라는 말인지요?>
이렇게 남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있으면 안되겠지요.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성경을 믿게 된 것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인생을 드릴만한 대상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항상 해만 쨍쨍한 것은 아닙니다.
의심의 그늘도 자주 드리웁니니다.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두려운 상황을 전혀 경험하지 못해본 사람이거나 바보겠지요.
마찬가지로 자기신앙에 대한 의심의 경험이 없거나 의심이 아예없는 사람은
철이 덜 들었거나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선천적으로 의심이 많습니다.
특히 요 몇년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끊임없이 의심해볼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의심하면서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해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저는 기독교를 믿지 않을것 같습니다.
그럴듯한 교리를 가진 종교는 다른데도 많이 있거든요.
하나님의 평화가 베땅이 님과 제게 그리고 이글을 읽는
다른 분들에게도 넘치시기를.....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는다면 저도 이 글이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니 만큼 간단히 적겠습니다.
1. 부활이 승천보다 더 많은 곳에 나오는 것이 사실이나 실제 마가복음 후반부를 원문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성경 본문의 [ ]마크를 참조하시길...) 마가를 참고하여 쓴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그 층위상 후대의 것으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마가의 기록이 부활의 기록인지는 그 문학적 성격에 대해 논의가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뿐만 아니라 승천도 비유적 언급이 아닌 '너희가 본 모습 그대로 다시 오리라'라는 사실적 증언을 중요시 하는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적 가능성보다 못하다 할 수 없습니다.어느 하나가 더 신화적이다 혹은 역사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거나 불확실한 사실에 대한 근거없는 판단이며 아직도 신화=거짓말의 이해를 가지고 계신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거짓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과 거짓이라 판단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2. 그 당시의 세계관을 신화라고 말하는 것은 현대의 과학지식을 맹신하여 과거의 세계관을 거짓된 것, 무지로 인한 것, 오류로 가득한 것이라 취급했던 주장에 대한 반론입니다. 당시 세계관안에서 쓰이진 본문의 진정한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과학적 기준대로라면 성경은 말이 안되는 것으로 가득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애초에 과학적 진위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쓰여진 것이라면 그 과학적 진위여부가 그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전기문'장르가 아닌 '복음서'라는 별개의 장르로 분류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가 천지창조의 한순간 한순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쓰여진 서적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역사적 사실을 떠나 믿는 것과 역사가 사실이다 아니다를 떠나 믿는 것의 구분은 아직까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냥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고 혼자만 믿는 맹목적 신앙정도로 이해가 되는 것이 저의 오해이길 바랍니다.
옳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많은 것이 밝히 드러나겠지요.^^
하지만 그 때까지 제 인생이 천국 아닌 곳을 헤메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역사적 사실들의 진위여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했던 말씀의 의도가 아니라고 확신하기에 그 진위여부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저는 부활과 승천까지도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실 여부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저의 위치를 결정한 적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선 제 신앙은 혹시라도 그것이 다 거짓이라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학자들이 밝혀내는 역사적 사실이 한계가 있는 잘못된 연구이길 바라는 것보다는 나은 삶이지 않을지요.
4. 의심의 경험은 복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같을 수는 없겠으나 저도 그런 의심의 과정들을 거쳐왔고 지금은 어느정도 그 단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의심하되 끝까지 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포기하면 아니한만 못한 것 같습니다. 찾으면 답은 있습니다. 다만 찾는 것을 중간에 포기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안주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지우파님께서 의심의 끝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시길 소망해봅니다.
어려운 학문적 말이 아니라
"신화적" 이란 말을 19세기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부정적" (특히 기독교애서) 으로 보는 면이 많은데
"신화"란 지금의 시대에서 보면 신화 이겟지만
그 신화가 말해지고 기록될 당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세계나 사건에 대한 최선의 기술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박한 예를 든다면 제가 아마도 초등학교 때 까지는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달(月)속의 "토끼와 계수나무" 이야기가
생생한 현실이고 사실로 알았고 그것에 의해 생활을 했으니요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요 비록 과학적(?) 사실은
아니더라도 내 생활을 지배하는 의미는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구가 하고 있는 "초 현대적" 문명도
먼 훗날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바라 본다면 그 때의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가르켜 "신화적 시대 ' 였다고 생각 할 것입니다.
"본것에 대한 신화적 진술" 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과학적(?) 진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진술 방법 보다는 진술의 "의미" 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 할 때 "신화적 표현을 안 쓸 수 없는것과 마찬 가지겟지요
특히 크리스 마스 같은 절기에 말 입니다
설은 잘 보내셨는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제 질문은 신화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미 충분한 이해가 있다는 바탕에서 한 것입니다.
앞의 여러 글들에서 논점이 되어온 것도 반드시 허구는 아닐지라도
허구일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것이겠지요.
질문에 답해주신것에 대해서
베땅이 님의 의견을 듣고싶은것이 또하나 생기는군요.
마태복음 6장9절 이하 우리의 신앙고백인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 믿으시는지 (기타 산상수훈 등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예수님의 말씀들도 포함해서)궁금합니다.(시간적배열, 편집의 차이는 무시하고)
직접하신 말씀이라 믿으신다면 사실적 근거가 확실치 않은 세계관에서
쓴 글을 믿을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본것을 기록한 것이나
기적을 본것을 들은 기록이, 예수님 말씀을 들은 기록보다
일반적으로 더 사실성이 높다고 생각되는데
님의 대답대로라면 더더욱 예수님 말씀의 근거는 미약한것이 아닌가 의문이 있어서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신화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정도 이해할수는 있으나
일부가 아닌 성경전체가 그 토대위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대상의 기초가 모래위에 쌓은 집같이 될수 있지않나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