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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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돌때 당한 창피
남들은 돌이 되기 전에 서고 조금 빠른 아이는 걸음마도 한다는데
약, 담배,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세균들 때문이었는지
난 돌에 설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토실토실하게 장군감으로 생긴 놈이 지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니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세워 놓으면 넘어지고 세워 놓으면 넘어지고 ..
의자 손잡이라도 잡고서야 돌 사진을 찍을텐데 그마저도 못하니. 오호 애재라!
그래서 나의 돌 사진에는 아버지의 손이 함께 찍혀있다.
뒤에서 최대한 숨어서 잡고 있었지만 그 당시엔 뽀샵도 없던 때라 여지없이 내 얼굴보다
훨씬 더 큰 손을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사진사는 물론이고 나의 편이라 생각했던 엄마 아버지까지 박장대소를 하셨으니..
울고 싶어도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눈이 퉁퉁 불을까봐 울 수도 없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진사가 나를 웃게 하려고 갖은 재롱(?)을 다 피웠지만 그리 쉽게 웃음을 지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사진 한 장 찍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잘 서지도 못하지 웃지도 않지..)
서서히 다리에 힘은 풀려가고 이러다가는 잡아줘도 설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억지웃음이라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썩소의 원조는 나다.
돌 사진의 썩소는 정말 대박이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으니 배우지도 않은 썩소가 자연스레 나올 수 밖에...
어릴 때 사진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이 아버지께서 잡고 찍은 썩소 돌 사진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생겼다.
돌에 서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께서는 충격을 받으셨는지
그 날 이후로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서지도 못하는 내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걸으라는 것이었다.
막 잡아끄는데 힘없는 나는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계속 끌려 다니다보니 발가락이 너무 아팠다.
아무리 아프다고 엉엉 울어도 아버지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잠든 틈을 타서 가출을 하고 싶어도 걸을 수가 없었으니
삼청교육대가 이보다 더 심하진 않았으리라.
시간 날 때마다 나를 끌고 다니셨으니
“아버진 할 일이 없으신 걸까. 다른 아버지들은 다 바쁜데 왜 내 아버지만 한가하신지..”
아버지께서 집에 안 계시는 날은 나에겐 천국이었다.
하지만, 천국은 너무도 짧고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
난 살기 위해서 발을 내디뎌야했다.
끌려가지 않으려면 발을 땅에서 떼어 옮겨놓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서는 과정을 생략하고 걸어버린 세계 최초(?)의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단거리 달리기를 못한다.
항상 꼴등이었다.
처음으로 2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땐 두 명이 달렸었다.
대학 때 데모할 때도 빨리 도망가지 못해 대 운동장 한가운데서 지랄탄에 둘러싸여
죽을뻔한 적도 있었으니
임산부들이여! 아이를 위해 술 담배 하지 말고 아프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