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삶이든 교육이든 사업이든 국가든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반드시 묻고 확인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묻고 아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왜 존재하는지, 교육이란 무엇이며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지, 국가는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 장사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장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고, 교육을 할 수 있고, 장사를 할 수 있고,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은 무엇인가?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이 매우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질문이 없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어렵고, 교육이나 사업이 정상 궤도를 달리기 어렵고, 백성을 잘 섬기기 어렵기 때문에 결코 비현실적인 질문이라 할 수 없다. 우리가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의 영혼을 지식의 잡동사니로 채우고, 국가의 이름으로 백성들의 자유를 짓밟고, 사업의 이름으로 국민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다 무엇 때문인가? 그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아픔들 아닌가? 근본을 묻지 않고 행동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벌어지는 참상들 아닌가?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오늘의 질문이요 오늘의 문제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시간이 가면 본래의 취지가 흔들리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가면 먼지가 쌓이듯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의 영혼을 잃어버린 채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존재의 이유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이요 한계이다. 때문에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끊임없이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묻고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모든 전통, 통념, 선이해를 내려놓고 영점(零點 -zero point)에 서서 새롭게 보아야 한다. 그럴 때 고유의 정체성과 본래의 취지를 잃지 않을 수 있고 또 회복할 수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본래 인간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체제이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야만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획된 것이고,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어떠함을 엿보게 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심히 거슬리는 구조와 생활양식,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평화의 질서, 사랑의 질서, 섬김의 질서가 교회의 모든 구조와 생활양식 속에 깃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교회 본래의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이탈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사실이 그렇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단체나 조직보다 정체성을 잃을 가능성이 많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가장 쉽게 부패할 가능성이 많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교회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고,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보아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도 빨리 그리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교회의 교회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의 영혼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늘 깨어서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목사건 신학자건 성도건 예외 없이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교회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묻고 배워서 교회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교회성 이탈이 심각함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했던 아름다운 전통 위에 서있다. 그렇다면 ‘개혁교회’란 무엇이며, 종교개혁의 정신은 무엇인가? ‘개혁교회’란 것이 따로 존재하는가? 아니다.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가 바로 개혁교회의 정체성이요 개혁교회의 정신이다. 이것은 비단 개혁교회만 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 땅에서는 완성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는 그 날까지 그 나라를 대망하고 가리키며 증언할 뿐이지 그 나라가 될 수는 없다. 또 되어서도 안 된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담보하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가리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나라의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담보해야 하지만 담보할 수는 없는 도상적(道上的) 존재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되며 교회가 어떤 곳인지, 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 안에 먼지처럼 쌓인 전통과 통념과 선이해를 걷어내고 제로 포인트에 서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진짜 정신이요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개혁하는 교회, 하나님이 디자인한 교회, 존재 이유에 걸맞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묻고 배워서 눈을 떠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교회를 알고 있는가? 교회를 보는 눈이 있는가?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알고 있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가 얼마나 교회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를 매우 역설적으로 말했다. “교회는 교회이기를 중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교회는 생명을 이어갈 수 있고, 힘과 광채와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교회처럼 보이는 것도, 혹은 엉터리 교회도, 혹은 졸고 있고 곁눈질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교회도,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일어나지 않는 제도, 교리, 프로그램, 문제만이 난무하는 교회도 이 시대에는 특별한 인기를 얻을 수 있고, 사회와 국가로부터 매우 특별한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은가? 바르트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교회이기를 중지한 교회가 얼마나 많고, 또 교회이기를 중지한 교회라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평가와 존경을 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엉터리 교회, 교회됨과는 거리가 먼 교회가 훌륭한 교회라는 평판과 인기를 얻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를 보는 눈이 반쯤 감겨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교회를 보는 눈이 반쯤 감겨있기 때문에 교회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엉뚱한 교회를 훌륭한 교회로 착각하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수많은 백성들이 왜곡된 가톨릭교회의 종노릇을 한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지 못했기에 분별하지 못하고, 교회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던 것이다. 알지 못했기에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의 무오함을 신봉하고, 면죄부를 샀던 것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부패한 교회의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교회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교회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교회의 교회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는 교회를 보는 눈을 가로막는 걸림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이나 위치, 사회적인 평판으로 교회의 교회됨을 판단하는 것이다. 교회의 교회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평가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사회적인 역할과 위치가 어떠하냐, 사회적인 영향력을 얼마나 행사하느냐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물론 교회도 사회적 존재요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사회의 평가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다. 사회적인 잣대와 평판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교회의 본질을 얼마나 담아내느냐 하는 교회됨의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평가해야 할 문제요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 역사 앞에서 사람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인 평가는 교회를 평가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 중요한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의 눈-그것이 사회적이든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실체와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회적인 차원에서 육의 눈으로 영적 세계의 일을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장님에게 가을날의 단풍을 보고 감상을 말하라고 하는 것과 같고, 시험 성적으로 학생의 인간됨을 평가하는 것과 같다. 물론 전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눈으로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교회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몇 가지 현상이나 결과들을 통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것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소위 영적인 눈을 가졌다고 하는 목사나 그리스도인들조차 교회의 교회됨이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피상적이긴 해도 교회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한다. 비록 깊이와 본질을 꿰뚫어보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합리적인 안목과 사회 종교적 차원에서 교회의 현실적 실체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한다. 그런데 대다수 목사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파악하고 있는 정도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교회에 속한 자로서 차마 교회의 치부를 드러낼 수 없어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그저 꾹 참고 기도하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란 본래 그런 것인가 보다’ 하고 지나쳐버리는 자들,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교회답지 못한 관행들에 너무 오래 길들여져 버린 탓에 교회답지 못한 것을 분별하거나 체감하지 못하는 자들도 많다. 또 ‘교회면 교회인 것이지 교회가 되기 위해 뭐가 또 필요하냐? 전도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순진한 생각이 의외로 널리 퍼져있고, 또 성공한 교회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들어 사용하셨기 때문에 큰 교회가 됐다는 강한 확신이 있어서 큰 교회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교회라는 등식이 상식처럼 퍼져있다. 그래서 교회의 교회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렵고 힘든 게 사실이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인가? 성도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기 때문이고, 말씀을 통해 제대로 교육받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의 종교성이나 종교적인 활동으로 교회의 교회됨을 판단하는 것이다. 교회는 종교 기관이기도 하지만 종교를 너머서는 곳에 존재의 뿌리를 박고 있다. 즉, 종교적 차원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때문에 교회의 교회됨은 종교적 속성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세상과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뿐 아니라 종교와 종교성으로부터의 구원도 포함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는 언제나 종교성에 매이지 않는다. 종교성에 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종교성을 타파하고 종교적인 활동을 교정하며 멈추게 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종교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 종교적인 활동이 필요치 않은 세계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중세 가톨릭교회를 보자. 중세가톨릭교회는 종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영광과 권위를 다 갖췄던 교회다. 중세 가톨릭교회야말로 종교성의 천재였고, 종교의 왕좌를 차지했던 교회다. 종교성으로 말하면 세계 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가장 우수한 교회였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가장 교회답지 못한 교회였고,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물론 교회가 종교의 옷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다. 종교적인 활동을 완전히 멈출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교회됨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교회가 종교의 옷을 입으면 입을수록 교회됨으로부터 멀어질 뿐이지 교회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외에도 여러 걸림돌이 있을 수 있다. 오랜 역사, 예배당과 예배의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 신앙의 열정과 기도의 뜨거움, 선교적 헌신 등을 통해 교회의 교회됨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걸림돌이 교회를 보는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된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들조차 위에서 말한 잣대 아닌 잣대를 통해서 교회를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교회를 보는 눈이 반쯤 감겨 있다고 생각된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채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처럼 교회 안에 있는 자들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 교회 노릇하겠다고 설레발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오늘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 교회를 보는 눈을 가진 자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교회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길,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길,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가도록 부름받았다. 때문에 교회는 다 같이 눈을 뜨고 가도 엉뚱한 길로 빠지기 쉽다. 그런데 눈을 반쯤 감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교회가 어디로 가겠는가? 이제 한국교회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교회가 무엇인지부터 새롭게 묻고 배워야 한다. 조급하게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조용히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묻고 따져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 자신의 지난 걸음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달려야 할 때가 아니다. 골방에 들어가 깊이 성찰할 때다. 교회를 보는 눈을 뜨기까지 기다려야 할 때다.
참으로 간명하고도 명석한 지적의 말씀이십니다.
이미 요한 사도를 통해서 계시된 종국의 모습 - "새 예루셀렘"에는 교회堂(즉 물질적 성전)이 없다는 것,
참으로 탁! 하고 나무망치로 머리를 치게 만드는, 그리고 신앙 사고의 진전에 도전을 줄 그러한 적시이십니다.
제가 "교회"의 궁극에 관해서 그간 혼자서 고민하고 고민하던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그 말씀
이었구만요. 저는 그러한 상태를 이 땅에 영적 수준이 정상치(주님께서 인류를 향해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된,
그래서 구속사역이 이미 완성된 바로 그러한 상태의 모습일 것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얼마전 네덜란드의 교계 인사가 한국에 들어와서 교회들의 실상을 리서치하고 나서 말했던 얘기는, 전에 유럽지역이
기독교인 비율이 무려 90퍼센트에 육박했었으나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지금 유럽의 교회들이 모두 텅텅비게 되고만
것처럼, 한국의 교회들도 앞으로 얼마 가지 못해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답니다.
만약 그렇게 되는 날을 우리 생전에 보게 된다면, 그때 가서는 우리 모두 "아! 그 때 우리가 홀려서 속은 것인가?
아니면 꿈 속에서 있었던 것인가?"라면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건 남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지금 신앙을 갖고 있는 바로 내 자신 각자의 당면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렇듯 꿈에서 곧 깨게 될 줄을 알면서도 아직은 이불 속에서 그냥 그대로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이것일 겁니다. 비록 그러한 참담한 날이 우리 시대 온다 하더라도 나(우리)라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똑바로, 진정 그 분을 앞 모습으로 보고, 만나고, 또한 그 분과 직접 접촉하는 그러한 능력을 가져
야만 될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게 바로 진정 이 시대 교회들의(아니 차라리 목사들의) 소명일 것입니다.
추가해서 사유한다면, 요한 계시록 기록에 말세지말에 결국 모든 인간들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게 되고 만다는
(영적인 패망을 의미하는 듯), 즉 모든 인간들이 그 앞에 굴복하고 말게 될 "육백 육십 육"이, 만약에 지금 이 시대의
인류의 보편적이고도 또한 일반적인 모습의 삶 - 즉 창조주의 높으신 뜻에 반하여 육적이고(즉 물질 추구형), 영적으로
무분별하고, 불신앙적이며 욕망 추구적인 삶-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뜻의 말씀이라면, 마치 연말 도회지의 크리스마스
캐럴만큼이나 무의미하고도 화려하게 만연하고 있는 지금의 기독교문화(종교생활의 일부도 포함)도 만에 하나 그 한
분야에 해당될 수 있지 않을런지요.
또한,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네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의인 몇사람이 없어서 소돔.고모라성을 유황불로 심판했다는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닌 미래에 대한 계시의
말씀으로 봐야 맞는게 아닐런지요.(왓치만 니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성경 말씀은 - 과거 얘기가 아니라 - '하나의
계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 근대의 기독교인들이 "믿기만 하면 산다"라는 말씀에 관해서 너무 일방적이고도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말입니다. 저는 그 말 속의 "믿는다"라는 뜻은 진정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에까지 신앙의 질을 갖추게 되는 것(즉, 예수를 위해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기도 합니다.
다만, 그러한 생각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놓고 논쟁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묻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오늘의 현실에 대하여
깊이 있게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교회가 인간이 만든 전통과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여전히 구원의 빛을 열어주시고 볼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열어 두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이해하고 복음을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는것 같습니다.
이것또한 늘 개혁하는 교회의 종교개혁의 전통위에 서서 내 자신을 성찰하고
늘 기본으로 돌아가는 모든 전통과 선이해를 넘어
말씀의 바른 이해를 위해 늘 공부하고 성찰하는 삶의 자세를 되새겨 봅니다.
맹인이 어찌 다른 사람의 길을 인도하지 못하듯이...
반쯤 눈이 감긴 상태가 아닌
진리의 영안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 자신이 복음의 삶과 빛이 되도록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매일의 삶이 되었으며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어두운 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요즘에는 현실 교회는 참 기독교가 아닌 '대중 기독교'라는 다른 종교를 섬기는게 아닌가 하는 쪽으로 자꾸 생각이
흘러 갑니다. 대중 기독교의 위로가 필요한 교인들에게, 그 필요를 채워주는 대중 기독교의 목사가 함께하는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 저의 분별력이 거기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진상광입니다만,
이상하게 오늘부터 갑자기 닉네임(낭산사람)으로 필명이 나타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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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기독교"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게 사실은 "기독교 문화"의 한 모습인 것이지요.
정말로 기독교가 이 시대 정착된 어떤 문화로 마감하고 만다면 그 때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건 기독교의 생명력이 완전히 마감했다는 어떤 방증이니까요.
소위 기독교문화의 예를 들어서, CCM이라는 것은 미국의 상업적인 기독교음악이지요.
실은 기건 기독교적인 냄새를 살짝 가미 위장해서 완전히 장사해먹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교회에서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혹시 노래방 분위기 좋아하시는 분들 노래방에서나 할 수 있는 그런 겁니다.
(실은 노래방이라는 곳은 영적으로 매우 침울하고 음산한 곳이지요)
또한, 골목골목 교회들의 이름을 보세요. 행복한 교회, 가정같은 교회, 무슨 교회 무슨 교회,
다니다보면 참 희한한 교회 이름들이 많던데 기억을 못하겠네요.
오죽하면 낫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교회 교회마다 "누구 누구 장로 초청 간증집회" 무슨 "가수 누구 누구 집사 초청 간증집회"
이런 교회 앞 프랑카드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으니, 시쳇말로 도대체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모든 것들이 장사하는 곳 뺨치는 풍조이지요.
갈수록, 큰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대중성이라는 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대중성을 가져야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을 품으시는데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백성을 품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대중성이 꼭 수준이 낮은 걸 의미하거나 천박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어야겠지요.
천박함이나 미숙함이 아닌 대중성은 교회에 반드시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대중성을 확보한답시고
다들 미숙함과 천박함, 대충복음으로 나가니까 문제입니다.
물론 계시의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숙제입니다.
감사 ^-^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소위 '대중 기독교'라는 라벨이 붙어진 '그 기독교'의 문제는 분명히 적나라한 것이지만, 사실 기독교라는 종교 전통이 '대중적'이지 않다면, 과연 생명력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인 예라면, 교회사 가운데 점멸해갔던 여러 소종파들이겠지요. 저에게는 참 딜레맙니다. 하우어워스의 표현처럼 "세상에 속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기독교"가 과연....
맞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공감하는 바입니다만, 걸리는 부분이라면 대중 기독교(사실 이 용어도 좀 나이브하긴 합니다. 전 차라리 번영신학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용어이 오히려 더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의 우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 급부에 위치한 분파주의나 소종파 지향성 역시 '오늘날'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 속하지 않음에만 천착하다 보면 영지주의 기독교가 범했던 위험성을 고스란히 떠 앉게 된다는 점이지요.(아나뱁티스트를 비롯한 분리주의적 전통에게 가해지는 문제 제기이기도 하겠지요.) 동굴로 들어간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물론 양자 사이의 긴장 구도에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모범 답안이 있지만, 그건 좀 무책임한게 아닌가 싶구요. 그래서 딜레마라는 표현을 쓴 것이겠죠. 개인적으로는 소위 '공공신학'(Public theology) 전통에서 강조하는 공공성 담론이 기독교가 대중성을 포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다음 글 '완전(!)' 기대하겠습니다ㅎㅎ
실은 "교회"라고 하는 게, (물론 학술적인 정의야 있겠지만) 그냥 생각해보면 상당히 머릿속으로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같아 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시 동행한 모습도 일종의 "교회"가 맞지 않을런지요. 또한 오순절 이후 베드로와 사도들이
공식적으로 모였던 이런 저런 모임도 교회이고, 그 후로 중동지역이나 소아시아지역의 크고 작은 초대교회들
그리고 카타콤 내의 종교활동까지 수 많은 다양한 교회들이 발흥과 소멸을 거듭했을 것이고, 그후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 등등.
어차피 기독교의 자생력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뿌리박고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시상바닥이건 어디건 막강한 대중성(이 때의 대중성이라는 의미는 특수성에 반대되는 개념인 것이지요)을
나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일이겠지요.
아마도 어거스틴인가가 이런 소회를 밝힌적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조로아스터교가 훨씬 더 지적으로 멋있다"라고 말입니다.
근데 기독교가 그런 특수한 종교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기독교의 "특수성"이야말로, 오히려 "(누구라도) 십자가의 그 피로 내 죄 씻김 받고 살았네"라는 참으로 생소하고도 이상하여(아니 차라리 생뚱맞고 괴상하여)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바로 그것이 될 것입니다.
정말 저 어린 시절엔 그게 생소하고 이상하게만 들렸었던 그런 기억이 지금도 기억속에 생생합니다.
어떻든 그 이상의 어떤 특수성이 기독교(교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직관이 생기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처럼 "아무나 오게!" 하는 그러한 개념의 "대중성"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세상과 벗하고 적당히 세상 풍조를 교회에 적용하고(쉽게 얘기하면 장사수완 발휘)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가 교회같지 않게
생각되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이 시대 가장 큰 문제일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교회는 교회다운 게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교회를 출석하겠습니까? 차라리 골프장에 나가던지, 등산 낙시를 가던지, 아니면 그저 혼자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묵상을 하던지 그럴 것입니다. 혼자서 예배드린다고 구원이 없다는 지적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니까요.
(저는 앞의 이러한 분위기들이 실은 이미 시작됐다고 보고 싶습니다.)
물론 제 지론은 그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가 애매한 그런 어중간한 표현을 피하고, 좀더 명확하고도 분명한
표현을 위해서 좀 극단성을 써서 직설적인 어법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그 점은 적의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정병선 목사님,
교회가 너무 당연시 되는 이 무감각과 세속화의 시대에
교회됨의 근본에 대해서 정확하게 짚으셨군요.
최소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만이라도
또렷이 드러나는 교회어야 할 텐데,
오늘의 교회는 '우리들의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절망의 시절에 그래도 희망의 노래를 그치지는 말아야겠지요.
대림절이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