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올려서 조금 그러하긴 한데, 요즘들어 간혹 떠오르는 생각이라 한번 오픈해봅니다.
보수적인 기독교 (복음주의든 근본주의든)에서 구원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원죄와 자범죄로부터의 구원"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것 같은데, 실제 역사적 예수가 행한 사역들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런 구도에 대한 의문이 자꾸 듭니다.
물론 바울이 서신서에서 그토록 죄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역설한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언급이 거의 없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인가요??). 이것은 마커스 보그가 예수의 의미라는 책에서 "예수께서 과연 자신의 죽음을 대속적 사역으로 확신하였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것과도 일부 비슷한 맥락이기도 합니다. 비록 초대교회의 고백은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사역으로 이해하였지만, 과연 그것이 액면 그대로 구원론의 본질이냐는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원죄" 라는 것도, 단순히 아담의 자손이므로 아담의 죄를 전가받았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가 썩어 없어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 대한 고대인들의 사변적 설명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죄가 있어서 하나님과 친해지지 못하는게 아니라 본질적 한계로 인해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만날 수 없는 본질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과 직선이 만나는 접점"과 같은 역할)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면 지나친 자유주의적 해석일까요? 좀 더 직설적으로 질문한다면 구원론의 개념을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의 초대"로 해석하면 너무 나이브한 것인가요?
계란을 비유로 제 생각을 설명해본다면, 닭이 방금 낳은 따끈한 계란은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고는 있지만 그냥 놔두면 결국은 썩어버리고 말 존재입니다. 이러한 썩어 없어지는 본질을 고대인들은 "원죄"라고 표현한 것이고, 썩을 운명의 계란에 따뜻한 열을 가해주어 병아리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과정을 "구원"이라고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사실 대속 구원론이 제일 유명해서 그렇지, 기독교 전통에서는 여러 구원론들이 많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해도 예수의 사역 가운데 인간과의 연대에 초점을 맞추는 연대 구원론도 있구요... 그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대속 구원론의 낡은 레토릭을 오늘날의 용어로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구원이란 것이 예수와 같은 인간이 되는 거라면...
인간 하나 하나에 대해, 그 사람의 지위 고하에 관계 없이 존경심으로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되는 것
또한 더불어 작은 미물이라도 소중하게 느낄 수 있는 것,
너와 나의 장벽이 허물어져서 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인위의 가치 보다는 자연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느끼게 되는 것,
소유 보다는 존재의 패턴으로 삶이 이동하는 것,
나이가 들어가면서 등걸이 되거나 굳어져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살아 있는 더욱 싱싱한 인간이 되는 것,
등등등...
이런 패턴으로 가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을까 해서 한 번 적어봤습니다...
'대속의 보혈'로 단순히 압축되는 가벼운 구원론의 문제점은 과도한 인간 중심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사역이 인간을 위한 중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중보라고 하면 너무 역설적일까요?
예수께서 하나님을 역사상 최초로 '아빠'로 부르시며 자녀됨(sonship)을 가르치신 분임을 생각할 때,
그리고 병자들이 몰려왔을 때에 도리어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신 행적을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의 소외성'과 그에 얽힌 그 분의 마음을 알리려는 분이 아니셨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예수의 삶을 읽으며 개인적인 영혼의 구원 사실에 감격하든, 사회변혁적 메시지를 도출해내든
결국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중심주제로 놓고 해석한다면, 빠져나올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 목사님께서 성서텍스트가 '손가락'이고 계시 사건이 '달'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 또한 '절대적인 중보자'라기보단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손가락'이신 것 같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라는 사실도 이에 관한 근거가 될 것 같고요.
주제 넘지만... 부족한 의견 조심스럽게 올립니다.
제가 너무 무지한 사람이라 고수님들 사이에 댓글 쓸 용기가 나지 않지만 궁금해서 올려봅니다.
다비아에서 오랫동안 품고 있던 많은 의문들을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가고 있는데요
초보자로써 사실 예수님의 대속사역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생각했었습니다. 아직 다비아의 글을
다보진 못했지만 정 목사님의 글중에도 그부분을 의심할만한 글들은 보질 못했구요
근데 사실 저도 인간의 죄의 속성에 대해 회의적일때가 간혹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예컨대
특히나 남성의 경우 여성보단 성적 자제력이 훨씬 요구되는것 같은데(요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있다보니 이런 생각이 더나네요 저도 그랬지만.. ㅜ.ㅜ) 이런 인간이 극복하기 힘든 태생적 한계를 보면
어떤 창조적 결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물론 아주 단적인 예지만 그렇게 보면 인간의 죄
라는 것이 완전히 인간의 책임이라고만은 보기 힘들것 같은데 그런 결함으로 인해 생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아무생각 안하면 괜찮다가 막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 잘 가슴에 와 닿질 않거든요
근데 또 생각하면 만약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한 역할이 아니라면 굳이 예수님께서 그런 고난의 운명을
지고 가실 필요가 있었나(그냥 오래 사시면서? 더 많은 전파사역을 감당하셨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스스로 이런 생각 자체가 너무나 불경스러운거 아닌가 싶어 혼자 생각하고 말았는데 고수님
들을 보니 용기가 생겼습니다. 혹시나 제가 관련없는 얘기로 맥을 잘못 짚은 건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런
생각과 관련해서 참고할 만한 다비아 내에 어떤 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님 고수님들의 견해라도.....
(쫌 덜 어려운 말씀으로....^^)
캬!!! 닥터케이 님 글을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정말 공감 만땅입니다... 그리고 끝에 계란과 병아리 비유는 압권입니다!!!
저도 전문가는 아니라서 어떻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히브리적인 것이 헬라적으로 해석이 되면서 "어떠한 상태" 라는 동적인 개념이 "어떠한 구조" 라는 정태적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이게 꼭 날아다니는 새를 손에 잡히게 하려고 박제를 만들어버린 격인데...
구체적으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다스림" 이라는 것이 "천국" 으로 해석된 것도 그런 맥락이구요... "죄" 라는 것도, 헬라어로는 "하마르띠아" 라고 하는데, 이게 "과녁에서 빗나감" 이라는 아주 공간적, 구조적인 뜻이랍니다...
그리고 이 죄라는 것이 또한 법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팔딱 팔딱 뛰는 복음의 생명력이 칼로 회쳐져 죽은 상태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원죄와 자범죄, 그리고 대속 및 형벌대체, 속죄와 석방... 이런 것들이 얼마나 정나미 떨어지고 생명없는 느낌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