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교회 홈페이지에서 예전해설에 관한 동영상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 것은,
설교/성찬/봉헌 등과 같은 초대교회 예배요소로서 '예언과 방언'을 명시하고 있었는데요.
잘 알려져 있듯이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고린도전서의 언급으로 말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26-40)
위 대목을 놓고 볼 때,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설교 행위 외에,
예배에 참석한 평신도 회중이 신비로운 계시를 선언하는 예언 행위가 초대교회에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 은사주의권(특히 '신사도운동'으로 불리는 극단적 카리스마 운동권)에서는
이 점을 토대로 해서 굉장히 열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배(?)를 지향하고 있는데요,
이미 열린예배의 폐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바, 그 천박한 주술적 예언 행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전론의 영역에서 예언과 방언의 도입에 관해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아퀴나스나 마더 테레사가 예배 중에 황홀경에 빠져 들어갔다는 전승이나
가톨릭 신비신학에서 '사적 계시'의 존재와 사용이 공적인 논의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
개신교는 무조건적인 계시무용론으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영감에 대한 관심을 너무 축소시키는 듯 합니다.
성서 자체가 계시가 아니라, 계시를 지시하는 악보와 같다면,
음악의 대가들이 악보에 묶이지 않고 소리의 존재론적 세계를 일상적으로 체험해나가는 것처럼,
영성에 있어서도 성서 텍스트와 상관 없는 계시 경험이 수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프로이트가 꿈과 환상 등의 현상을 무의식에서 비롯된 심리적 작용이라고 규정했다면
기독교는 단순히 그 현상을 합리주의적으로 처리하기보단, 무의식과 성령의 관계를 밝히고,
심리학과 신학의 관계를 설정하고, 우리 마음에 성령께서 거하신다는 진술과,
성서 기자(특히 선지자들)들의 하나님과의 심리적 교제의 기록은 어떤 심리학적 의미를 가지는지와 함께,
일상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현상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 점에서 신학은 철학/인문학과의 합리론적 진리논쟁과 더불어,
영지주의/심령과학/무속종교와의 주술론적 진리논쟁으로도 구원론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지 않을까요.
쓰다보니 질문이 좀 방대해졌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예전으로서의 '예언과 방언'이 고린도전서의 진술 그대로 현대교회 예배에 도입될 수 있을지,
아니라면 어떻게 저 대목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을지,
그리고 '고린도전서가 쓰일 당시에는 성서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교회에서의 예언은 곧 성서 해석'이라면,
성서 봉독 및 설교(가톨릭의 용어로는 '공적 계시')로만 교회는 종말론적인 계시 경험을 만족해야 할지,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나갈 예언자적 영성이란 심리적인 신비현상을 온전히 배제한
감성적인 열정과 이성적인 사유의 결합체를 가리킬 뿐인지,
이러한 전반에 대해서 모든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우선, 이러한 논제가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시간에야 알게 됐습니다.
이 방은 나와는 무관한 방이라고 생각해 왔었으니까요. 이전에 한번 제시글의
제목은 본 기억이 있지만 열어서 읽어보지는 않았어요.
'모든 분들께 질문한다' 라고 하셨기에, 뒤늦게나마 간단히 몇자 적어봅니다.
생각되기에, 지금의 교회 - 이미 보편화된 교회 - 는 이미 종교적 신비성이 사라져버렸어요.
그게 좋은 점도 있겠지만, 한편 생각하면 속어적으로 마치 '앙꼬없는 찐빵' 처럼 돼버렸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미 모든 교회(예배)들에서 신비감은 사라져버렸어요. 설교 내용이나
즐겨 부르는 찬송만 좀 다를뿐, 교파불구 모두 쌍둥이 형제 같은 모습이지요.
나는 음악 쪽에 관심이 많기에 항상 (교회)음악을 염두에 두는데요, 지금 교회 성가대(찬
양대)들 보세요. 그게 어디 주님께 찬양드리는 일입니까? 그게 아니고 담임 목사 설교하
는데 흥 돋아주는 것, 즉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 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북한 통치자가 운영하는 '기쁨조' 나 같은 것이지요. 소위 '유빌라테' 라는 게 전혀 없어요.
그게 무슨 "찬양"인가요?
또한, 간증이 아주 중요한 예배 요소인데 지금 예배에서 간증이 없어요. 하기야 어쩌다
돈이나 몽땅 번 사람, 혹은 어떤 교회에 전도를 많이 해서 새신자 등록 많이 시킨 사람
말고는 무슨 간증할 일이 이 시대 있겠습니까? 절박한 신앙, 깊고 조용한 신앙, 감격적인
신앙, 그런 다양한 모습들이 다 어디로 가버리고 그게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요.
이런 면으로 생각하면 이 시대는 마치 싸구려 상품이 범람하듯, 교회는 많지만 종교가
이미 퇴화된 그런 시대인 것만 같아요.
정말로, 이제는 신앙의 다양성 확보 차원에서 모라비안 교도 혹은 퀘어커교도들의 신앙
행태라도 재조명하고 연구해야 할 것 같아요.(개인적으로 적은 무리 가운데 진실이 있다
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게 바로 신학으로 치면 "현실신학"이 아닐런지요.
퀘이커들의 예전(예전이라고 하는게 바람직할지는 모르겠지만)을 참고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