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에 양면이 있듯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회에도 두 얼굴이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진취적입니다. 예술적 감성과 인간적인 정이 넘칩니다. 의지와 도전정신이 뛰어납니다. 위기와 영경을 돌파하는 능력이 강합니다. 하여,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선진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지난 40년간 눈부신 경제발전을 거듭한 결과 국가경제규모(GDP-Gross Domestic Product) 세계 12위 국가가 되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세계 TV 시장의 20%를 점유했고, LG도 3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조선업체들은 세계 선박 수주량의 1~5위를 싹쓸이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휴대전화, 자동차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한류 열풍이 아시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150년에 걸쳐 성장한 것보다 더 많은 발전을 한 것입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는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슬픔과 안타까움
나는 이처럼 놀랍게 변화한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낍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일구어낸 그동안의 성취에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슬픔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압축 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빨리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라고 생각됩니다만, 우리 사회가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며, 눈에 보이는 성과중심의 사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에 영혼이 깃들 여지가 없고, 삶의 여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GDP는 세계 12위이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102위로 바닥권이라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듯, 비록 많은 것을 성취하기는 했지만 그리 행복한 사회,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이루는 데는 적잖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성취는 화려한데 삶의 내실은 심히 빈곤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처럼 상반된 우리사회의 두 얼굴을 보면서 백범 김구 선생님 말씀을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렇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갈망처럼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보다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문화의 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자유와 평화가 가득한 나라가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의 사랑이고 미래인 자녀들이 부족할 것 없이 부유한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는 자유와 평화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나라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식 경쟁에 휘둘리기보다는 다양한 꿈을 꾸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하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 젊은이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하게 승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온 인격으로 행복을 느끼며 자유와 평화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난 반세기동안 세계 여느 국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일했지 않습니까. ‘빨리 성공하자’, ‘남보다 더 크게 성공하자’, ‘나도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숨 가쁘게 달려왔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행복을 가꾸고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행복’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경제 사정이 기적처럼 좋아진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삶을 탕진하고 있고,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삶을 저당잡고 있습니다. 파이는 커졌지만 커진 파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사회가 된 까닭
나는 우리의 이런 현실 - 국가경제규모로는 세계 12위이면서도 국민행복지수로는 세계 102위인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이렇게 계속 살아도 좋은 것인지, 지난날 압축 성장을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것처럼 계속 살아도 좋은 것인지, 이제는 삶의 모드를 전환해야 할 때가 아닌지, 이제는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네 삶의 정황을 직시하고 성찰해야 하는 게 아닌지, 인간이 수고하는 모든 이유가 단지 경제규모를 크게 하는 것이거나 기술의 발달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쯤에 와서는 성장 지상주의를 검토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살림은 비록 가난했지만 빈곤함 속에서도 나눔과 웃음을 잃지 않았었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궁핍을 해학으로 승화하고 정(情)으로 이겨냈었습니다. 한(恨)을 흥(興)으로 풀어냈었습니다. 그런데 반만년의 오랜 가난을 극복하고 민주화를 실현한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과 정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경제 부흥을 이루었는데도 사는 것은 더 팍팍하고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툭하면 욕이고 큰소리입니다. 거칠고 공격적입니다. 왜 일까요? 왜 최빈국에서 세계 12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부자 나라가 되었는데도 행복지수는 바닥을 맴돌고 있을까요? 왜 과거보다 더 거칠고 공격적인 사회가 된 것일까요?
가장 핵심적인 원인 하나를 꼽는다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성찰해야 할 때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검토해야 할 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1960년대와 70년의 경제개발시대를 호령했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1980년대 초반이나 후반에는 막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가치가 1970년대까지는 한국사회에 유익한 처방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새로운 처방전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하나의 처방이 언제까지나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1980년데 중반부터는 국가의 미래를 향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발독재와 군부독재에는 항거하여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루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개발독재와 군부독재시대의 구호였던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가치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없었습니다.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개발독재시대의 가치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발독재시대의 구호와 가치관을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새해가 되면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아도, ‘잘 살아보자’는 개발독재시대의 가치관은 여전히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관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사회가 위대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국민행복지수가 바닥을 맴돌고 있는 것은 마땅히 성찰하고 검토해야 할 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가 편리해지고 윤택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피폐하고 빈곤한 것은 앞을 향해 달리던 속도를 조절하고 숨고르기를 해야 할 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젊고 탄력이 있으면서도 내부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처방전을 내놓아야 할 때 내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해야 합니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라도 개발독재시대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재검토하고, 오늘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에 걸맞은 생활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국사회가 위험한 사회에서 안정된 사회로,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생활문화가 조화로운 생활문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국민의 행복지수가 향상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전환을 위해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피폐한 삶, 경제규모 12위이면서도 국민행복지수는 바닥을 맴도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처방이 필요한 걸까요? 어떤 가치관으로 무장을 해야 하는 걸까요? 21세기 한국사회를 주도할 새로운 처방전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요?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논의와 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복잡한 일일수록 본질을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삶이냐 하는 삶의 본질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하십니까? 애쓰고 수고하는 근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유를 눈덩이처럼 키우기 위해서입니까?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호령하고 부리기 위해서입니까?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입니까? 큰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입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이런 것들이 이차적인 이유는 될지 몰라도 근본 이유는 아닐 겁니다. 근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압니다. 마음은 진실을 압니다.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는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삶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애쓰고 수고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평범한 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일에서 삶을 풍성하게 일로 전환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을 가리켜 ‘삶’이라고 특별하게 일컫는 것은, 사는 것이 생활 이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기억하고 생활에서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성공모드’(Success Mode)에 맞춰졌던 삶의 모드를 ‘행복모드’(Happy Mode)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동안 애써서 쌓아올린 압축성장의 열매들이 헛되지 않을 수 있고, 그동안 성취한 눈부신 발전의 열매들이 생활만이 아니라 삶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갈 수 있으며, 그동안 인고하며 달려온 진정한 이유인 행복한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배워야 할 행복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람들이 다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사랑에 대해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문제,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가정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인데, 단지 사랑할 사람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요.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강렬하고 짜릿하고 열정적이었던 최초의 경험을 사랑의 전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매우 정확하고 깊이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들 행복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행복의 길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생 최고의 법인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행복에 대해서도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인생의 현실을 보세요. 다들 행복을 원하면서도 정작 사는 걸 보면 원하는바 행복은 추구하지 않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만 좇고 있지 않습니까. 무조건적인 승리, 좀 더 높은 명예, 좀 더 많은 돈, 좀 더 많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모든 정력을 쏟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집중해야 할 삶에는 집중하지 않고 생활에만 넋이 빠져 있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대부분 행복의 길을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배운다고 해도 그저 단방 약을 처방받는 것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쉽고 간단한 비방(祕方)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삶이란 비방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비방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비책(祕策)을 찾습니다. 그러나 비책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대부분 거짓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배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법’과 ‘행복하게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인생에서 이 두 가지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과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세계의 중심이시고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품에서 나온 생명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나라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펼치신 생명과 하나님나라의 약속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배움은 들음이니까요. 생활은 가르침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지만, 삶은 오직 들음으로만 배울 수 있으니까요.
정목사님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그런면서도
목사님에게 몇가지 저의 의견을 덧붙입니다.
우리 사회가 행복지수가 바닥을 헤메고 있는 구조적인 배경을 찾는데 좀더 지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왜 지금 우리 사회가 양극화로 칫단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외환이후에 우리가 경제가
신자유주의에 지향 경제 체제 즉 세계화에 편입 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이 필요 합니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IMF 이후 국가 어떤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는 지를 분서기 필요 합니다.
정규 비정규직은 노동 유연성을 강조 하지요 이것은 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강화 한다는 면분에서 시행되고 있지요.
이 명박 정부가 기업을 위한 감세 정책은 목사님이 말하는 성장 중심의 정책입니다. 오직 국제 시장에서
가격 경쟁에 이기 위한 정책이지요. 창조된 부를 분배 보다는 항상 성장 중심이었지요.
행복이 개인의 가치관으로 주장하기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가치관 함께 우리 국민을 가난하게 하는 구조적인 메카니즘에 대한 지식이 겸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 그 구조에 변한에 대한 행동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지식의 힘과 함께 우리는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 보다 평등한 사회가 갈것인지에 대한 가치관이 필요 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부가 평등한 분배 된 사회일수록 더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통계로 검정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관이 나옵니다. 사회정의, 평등, 다름을 인정 하는 가치관, 이 정의를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나 행복지수에 증대에 관심이 있는 집단과 조직이 연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회가 함께 할 수있겠지요.
기존의 불평등을 재상한 하는 기득권 세력, 정치, 성장주의 가치관을 선호 하는 관료들, 기업인들과 가치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이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집단들은 기득권을 지닌 사람과 갈등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요 정목사님 주장 처럼 개인이 행복지향하는 가치관 만으로 그들의 구조를 대항 할 수있을 까요.. 그런 구조적인 변화 없이 가치관 만으로는 현상체제에 순응하는 복음 주의 아니면 치유주의적인 복음주의 범주에서 행복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구조적인 변화를 축구하는 해방적인 역사적 복음 주의가 유일한 해결 책은 아니지만 무시할 수없습니다. 이를 넘어 서는 종말 론적 신학적 가치가 필요합니다(?). 제가 신학을 논할 지식 기반이 없습니다 다만에 다비아 들락거리 면서 감으로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정목사님이 주장하는 행복 사랑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긔 기술은 사랑하고 행복할 수있는 기술은 기술은 구조적인 변혁에 대한 기술 그리고 더불어 연대 할 수있는 기술도 함께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 까요.
정목사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지식, 그리고 행복하고 사랑을 나눌 수있는 신학적 가치관, 그리고 기술이함께 겸비 되어야 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혼자의 힘으로 하디 보다는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조직이 만들어져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 하지 않을까요.
목사님
행복하세요
늘 체험에서 우러나는 생명의 글들은 제에게 항상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생존과 물질적 부를 위해 모든 삶을 소진하는 현대인을 수인이나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는 어떤 비평가의 표현이 끔찍합니다.
왜, 나도 한무리를 이루고있는 듯 하여서요.
그러는 가운데,
‘사랑하는 법’과 ‘행복하게 사는 법’ 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기이한 현상...
더럼님의 글을 읽으니 참 반갑습니다.어떤 연배인지는 알 수없지만,
혹시 구조의 변화에 대한관심때문에 나의 행복을 유보하거나 변화의 느림때문에 화내고 분노하시지는 않으셨는지...
저는 그런 경험이 있어서 정병선 목사님의 글이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개인의 행복추구가 구조적인 변화와 동반될 때, 역사발전을 전제하니 개인의 행복은 개인적 사회적 완성을 향해나아가는 보다 온전한 것이 될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개인과 사회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과같은
시장전체주의가 삶의 당연한 원리인듯한 곳에서는 참 자주 도전을 받게 되고
연약한 개인일수록 자본의 교묘함과 강고함을 느끼게 되는 듯 합니다.
이런과정에서
행복을 계속 보류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렇게 되면 지치게 되고
그래서 운동을 계속하기에 힘이 부치게 되는 원치않는 상황을 맞을수도...
전 그래서 운동도 행복하게 지속적으로 평생해야한다는 쪽으로 굳히고있습니다.
행복하게 운동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고 할까요.
이런 맥락에서 사랑과 행복은 시작점이자 도달점까지 견지해내지않으면 안될 기본적인 능력인것 같습니다.
더럼님의 댓글에 댓글을 다는 워낙 새로운 상황이라
이후에 어떻게 파생되어갈 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겟습니다만,
제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더럼님, 그리고 정병선 목사님의 댓글을 기대해보겠습니다.
초신자의 특권님
그렇습니다 개인 행복 추구는 구조인 변혁이 동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 주장의 전제입니다.
시장 전체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 할 지라도 우리는 행복추구를 방해 하는 메카니님증메 대해서 방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연약 하기 때문에 좌절하고 특권님 주장 처럼 개인의 행복을 보류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투쟁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목슴을 버리는 극단적인 발생하지요
이 때 하나님이 주어진 고귀한 생명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개인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결고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를 가진 투쟁에서 지신의 생명을 바칠 때 때로는
순교라고 평가 하지요. 열사로 표현ㄷ히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조직인 변혁에 초점을 둔다고 자신의 자아실현을 포기를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자아 실현 기반에서 구조직인 변력이 동반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이론일 수 있지요
현장에서 실현되기 어렵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롭게 적을 할 수 있는 현명한 인간이
되는 것도 행복일 수 있겠지요. .
그리고 개인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지 할 수 있겠지요
아니면 세상의 논리로서는 혼자는 연약하기 때문에 정의 실현에 가치를 두고 실현하는 사람들과
연대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서 조직이 필요하고 하고요.
그 조직은 어떨게 운영되어야 할 까요. 개인 자아와 평등이 실현을 잔제로 하는 조직 운영이 필요합니다.
이 조직 운영을 서양 학자들은 페미니트 원리에 기반을 둘 것을 강조 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한사람이 조직을 독접 하지 않고 상호 참여 와 행동의 평등한 기반에 운영 하는 것입니다.
서양 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보았는데
행복의 추구에 사람관계에서 평들 개념이나 그 실현을 부각시키지 않는다고요
영국에서 지금 5, 6월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언론이
영국의 지배 정당인 고든 브라운 노동당이 지난 10년 이상 지방 하면서
국민들의 평들 지수를 얼마나 개선 하였는가에 대한 지표를 발표 하고 있습니다.
저는 랠복의 평가 지수에 평들의 지수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행복을 논하면서 개인적인 측면에 강조 두기 보다 관계 중심에 논의가 있어여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개인적인 수준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세게화, 국가 수준, 지역 개인 수준에서) 언급 되어야 하지 않을 까요.
그래요 행복해질 수 있는 지식, 기술 방법 등을 많이 알 수록 더욱 행복 해 질 수 있겠지요
동시에 행족을 방행하는 요인들이 무엇인 알고 이것을 변할 수 있는 능력을 power를 가져야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행복한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하는 가를 끊임 없이 논의 해야 겠지요.
진행하는 과정에 부딫지는 구조적인, 개인 심령적인 제약의 환경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예술이겠지요.
두서 없는 글입니다.
은총이 함께 하시길
더럼님,
반갑습니다.
저에게 주신 건 아니지만 들어왔네요.
제대로 짚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치유하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의 문제, 정말 간과할 수 없는 고민거리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도 인류의 참된 구원, 즉 행복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희생하셨잖아요!
정치적이고 구조적이고 국제적인 문제들을 건드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것을 행복을 저당잡는 것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훌륭한 행동이요 용기있는 선택이니까요.
행복추구가 자칫 이기적인 것이어서도 안 되겠고요,
사회적인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한 투쟁이 개인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어서도 안 될 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은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생명이니까요.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계속 고민해야 할 큰 숙제입니다.
계속하여 이런 문제들을 제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절제의 미를 발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평화!!
평등지수, 감격적인 표현입니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비정규직......고소득자의 임금수치는 현란하게 지금 체제의 그림자를 잊게하는 듯 합니다.
원인없는 결과는 절대로 없는데 말이죠.
국가의 전체 부(wealth)는 느는데, 한 쪽에 몰리게 됨으로써 부정의와 낭비와 반인권과 과열경쟁...
더럼님의 글을 읽고 더욱 놀라게 되는 것은
(저는 과거에 굉장히 고갈감을 심하게 느낀 적이 있었고,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떨어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크리스쳔이 되었습니다.)
구조변혁에 대한 필연성을 개인의 실현과 연관시키면서
그 변화를 믿어의심치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영국에 거주하시나요? 영국은 요즘 분명히 신자유주의를 반성하는 듯한 분위기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의식이 강한것같기도 하고...)
전 요즘의 우리나라 상황에서 다소 공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묵묵히 참아내면서
대안으로 진보정당을 선택하지도 않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려는 노력도 너무 약하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대통령이 엄청난 크리스쳔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
다음 대통령이 만약 지금 구도로 이어진다면
인권의 개념, 평등의 개념, 행복의 개념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 되어버릴 것이고,
파편화된 개인들은 더욱 고립화되어서 구조의 개혁은 더욱 멀어질 듯 합니다.
이런 공포스런 상황에서 저는 사실 저의 공포를 다스리는 방법을 찾고있고,
지치지않고, 평생 운동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방법을 찾고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지치지않고 평생, 자아실현을 동반한
구조변혁을 할 수 있기위해서
어느정도의 행복감이 전제되면 덜 지치지않을까,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더럼님의 글을 읽으면서
너무 빨리 너무 쉽게 피곤해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기회를 갖게되어서 기쁩니다.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초신자의 특권님
저의 거친 글에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하니
부끄럽습니다.
어찌 공포가 없겟습니까. 삶의 자체가 긴장이고 불안의 연속이라 하여 실촌 철학자가
케이르키고르가 불안이 삶의 신존적 근거라 주장 하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엄격히 공포와 불안 개념을 구분 하기도 하지요.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그 대상이 뚜렷 하지 않다는 점으로 말입니다.
그 공포는 신앙의 내공으로 혹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동지애를 가지므로서 다소 완하 시킬 수 있지요.
평생 운동하는 삶 방식을 택하겠다데 특권 님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희망의 끈을 놓쳐서는 안되겠지요.
변화의 씨앗은 우리가 알 수 없는데서 싹을 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용섭 목사님 거룩한 생명의 씨악(/)이라는 설교를 참고).
그렇습니다
교회가 특권님의 피로와 공포를 덜어 주기를 바라지만 한국 교회 현실을 감안 할 때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개인의 행복을 강화는 치유적인 복음에 치우는 설교가 있는 가하면
구조적인 변력을 내세우는 민중 신학 해방 신악 역사 신학 관점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도 있습니다.
이 두가지 측면의 신학을 아우러는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가까이 있다면 신앙의 행복을 맛 볼 수 있겠지요.
그런 교회가 있다 할 지라도 때로는 실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능력을 축전해야 겠지요.
영국 상황은요. 학자들은 이미 오래전 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는 거의 끝났다고 하면 저의 교만이겠지요.
사화과학에서 세게화에 대하 ㄴ비판 하지 않고는 자기 주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말입니다.
신자우주의 체제를 주도하는 세력 미국 그리고 IMF, 세게 은행, 월스트리트 세력이 여전히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 벽을 허무는 것은 공산주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도 더욱 힘들지요..
우리가 독제 세력을 허무는데 많은 피를 흘렸지만, 거대 자본 과 이에 기생하는 보수 언론을 변화 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을 읽으면서 더욱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희망도 있음을 았았습니다. 그래도 자본의 힘에 저항하는 소수가 있다는데서 말입니다.
이야기가 길어 졌습니다.
삶의 행복한 길을 잘 찾기를 기도 합니다.
과찬해주서서 감사드립니다. .
"우리 자신이 스스로 능력을 충전해야 겠지요."
희망의 끈을 내가 세게 붙들면서...
후기소비자본주의의 오늘날을 분석하는 Terry Eagleton 이라는 영국 비평가가
다양한 특징을 가진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게 해석되든
그 이후는 파시즘일 것으로 진단하더라고요.
그러나 영국의 상황이
신자유주의의 반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기본논리를 반성하지않는 미봉책이 또다른 증상완화에 거친다면
지구는 계속 치명상을 입을 것같기도 합니다.
창조의 의도와 사회주의와 멀어질수록 혼돈은 커지지않을지...
저는 크리스쳔이라는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과거
인간의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까지만 생각할 때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생각하면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영국의 반성, 미국(오바마 대통령의 시도와 더불어)의 반성이
보다 지속가능하고 평등지수를 높이는 그런 결론으로 이어지길...
우리나라 양극화의 어두운 그림자...비정규직들이 허덕거리며
주체적인 자기위치를 주장하지않는 것이 당연한듯,
이런 논리가 대학에서조차 강화되어가는 것에 대해 교육의 기득권자들에게 화가 납니다.
존경이 줄어드는 것은 이런 맥락이 작용한것은 아닐까요?
그만큼 직무유기를 하지않고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는 것이죠.
아 물론 깨어있는 크리스쳔으로 살아가기도 쉬운일이 아니고요.
그러나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고,
싹을 틔우고 있고,
자라나고 있으니까
싹에 물을 주기도하지만,
최소한 모르고 밟고지나가는 일은 없이하면서
순응이 아니라 희망을 긍정하면서 하나님의 오른 손을 잡고 큰 발을 내어딛는 것...
목사님의 글을 읽으니
우리사회가 행복모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그런 지향과 중심을 가지고 사는 일도 필요하지만
정치, 종교, 교육 모두에 그런 철학의 기반이 깔려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음 아이들까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돈을 벌어여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고
그것이 곧 앞으로의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기본조건이라고 굳게 믿고 있더군요.
제 아들만 해도 역사를 좋아하길래 History를 전공하라고 했더니만,
대번에 하는 소리가 그건 돈이 안된다나요... 그래서 경제학을 한답니다.
저는 한번도 돈을 강조한 적이 없는데도... 분위기자체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지요.
돈이 안되는 인문학 분야보다 사회과학분야로 몰리다보니 대학경쟁률도 그쪽이 훨씬 높구요.
실제로 한국에 있는 조카들을 보더라도 취업이 안되 고민이고..
잘 나가는 친구들 속에서 위축감도 있는 것 같구요.
이런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사회 속에서, 경쟁력을 갖춘 이들이 살아남는 속에서
웬만해 가지고선 거기서 초탈하기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다른 차원의 진정한 행복을 얘기한다는게
얼마나 공허한 울림으로 들릴지..도데체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지..
우리 생각의 소프트웨어를 통째로 바꾸지 않는한 요원할 것이라는 한숨도 나옵니다.
어디서 무엇부터 바꾸어 나가야 할지.. 우리의 지향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할 일인것 같아요..
저도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주제라서 반가운 마음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두서없이 주절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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