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17일
그는 살아나셨다(31)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16:6)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명제에 모든 것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도박과 같습니다. 이것이 옳다면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이 확인될 테지만, 그것이 인정받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부활이 아니라 도덕성과 정신수양을 신앙의 근거로 삼았다면 위험성은 훨씬 줄어듭니다. 도덕성과 정신수양은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거니까요. 초기 기독교는 오히려 위험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니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아니면 기독교가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예수 부활은 무조건 증명이 불가능한 사건일까요? 앞에서 한번 짚은 대로 예수 부활은 공공의 장소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며, 부활 장면을 직접 목도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예수 부활이 경험되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 부활을 확실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요? 부활을 경험한 사람보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확실하지 못한 것일까요? 궁극적인 진리조차도 다수결로 결정되어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진리는 존재론적인 사건입니다. 진리는 계시 사건입니다. 진리는 스스로 드러날 뿐이지 도구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예수 부활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 사건 앞에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눈을 뜨면서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거라고 말입니다. 지금의 생명 형식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생명 형식이 시작될 종말에 그 부활의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라라님의 예수의 부활하심으로 하늘을 가르시는 주의 종말적인 영광의 하나님 나라가 강림 임하셨다는 말이 깊은 울림을 주네요 .전적으로 동의를 표합니다. 그렇네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종말에 이루어질 영광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어진 임한 그 종말적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 실체를 경험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바울은 우리가 위엣것을 찾아야 함을 말하면서 그 이유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종말적 하나님의 영광의 생명에 참여한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적 영광의 생명의 실체는 그 날에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다만 현재 우리가 할일은 그 생명의 실체 근본에 얼마큼 다가가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욱 그 종말적 생명의 영광의 실체가 드러날 그 날이 기다려지는 오늘입니다.
"예수가 살아 나셨다"라는 이 시리즈 말씀은,
이 명제가 왜 기독교의 뿌리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밝히는 해설서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이 말씀을 따라 오면서, 부활이 일어 날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구약 말씀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본문은 그 유명한 이사야서 64:1~12절 말씀이군요.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가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사64:1~3)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엠마오 도상에서 구약의 말씀을 풀어 주셨을 때에야,
"그인줄 알아보더라"라는 말씀이 얼마나 생생해지는지요.
그분은 이렇게 하늘을 가르시고 '예수의 부활하심'으로 강림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목사님께서 "그가 살아나셨다"은 수동형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참으로 옳습니다. 예수님은 죽은자들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일으켜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출현, 입성을 의미하시는 것이 아닐런지요.
초대교인들이 붙잡았던 것은 '죽었다가 살아남'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 그것은 하나님의 강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생명의 근원이며, 창조라는 사실을 더 믿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