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21일
그는 살아나셨다(35)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부활에 관한 마가복음의 보도는(막 16:1-8) 아주 간단하고 짧습니다. 세 명의 여성들이 무덤에서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교훈도 없고 결론도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부활 보도가 약간 확대되었습니다. 복음서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부활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서 기자가 예수 부활을 소홀하게 언급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 아닙니다. 부활 사건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종말에 가서야 확연하게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 사건을 그들이 무슨 수로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부활 경험 앞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부활 경험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오늘 예수 부활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역사적 사건이라고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책무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적 관점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관점에서 대답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죽음을 넘어서 궁극적인 생명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편적 생명의 지평에서 역사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진리론적으로 씨름해야 할 대상은 많습니다. 생명, 현실성, 역사, 시간, 종말, 존재, 언어 등등의 개념들이 그것입니다.
종말에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기존의 모든 경험들은 하늘이 종이두루마리처럼 말리듯이 폐기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립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돌입하는 국면(카이로스)에서 예수의 부활은 열쇄말로 작용할 것입니다.
보편사적 종말론에 근거한 역사적 예수의 부활론,
그 합리성은 바르트가 '빈 무덤'으로 옹호하려 했던 부활 표상이라기보다는
부활 사건의 존재론적 변증법에서 비롯되며,
부활 사건은, 판넨베르크의 생각처럼, 전인류 역사를 포괄하는 종말의 선취이기에
결국 결론은, 부활의 실체를 명확히 알아낼 때까지 깨어있어 신학적 수행에 천착해야겠군요.
진리론적 개념들과의 씨름을 강조하신대로, 신학의 기초적인 지평을 조직신학이 잡아준다면,
철학 학습에서는 언어학적 분석철학이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인 것 같습니다.
인류 역사와 한 국가의 국사, 또 한 사람의 생애까지,
예수와 그의 부활이라는 생명의 리얼리티 '열쇄말'을 통해 예견할 수 있다면,
세계는 좀 더 통전적으로 풍요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이들이 외면하는 조직신학 사유와 인문학적 성서읽기 수행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수행자의 삶을 넘어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일종의 도박이 아닐런지...
목사님 덕분에 새로운 신앙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발은 완전히 넘어섰으나 나머지 한발의 발뒤꿈치 정도는 문지방을 밟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질문많은 제가 또 질문하나 드리면...
목사님 말씀처럼 부활의 실체를 제대로 묘사한다는 것이... 부활을 직접 목도한 제자들에게도 역부족인 것이었다면... 이렇게 부실한 성서의 기술을 통해서 부활을 간접경험할 수밖에 없는 저희가 그 비밀을 '보편적 생명의 지평에서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가능한 일일런지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당위는 어떤 것인지가 궁금해지네요... 어차피 종말에 들어날 비밀이라면... 약간의 궁금증을 남겨두고 좀 더 실제적?인 신학적 작업에 더 에너지를 쓰는 편이 낳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고등학생이라고 알고 있는 용남군의 댓글은 놀라움의 연속이네요... 다비아의 다음 세대를 이끌 기대주로 훌륭히 성장해 주리라 믿어도 되겠죠?
나무늘보 님,
궁극적인 진리는 종말에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게 분명하지만
그 종말은 역사와 단절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지금 이 역사를 설명할 책임과 당위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겁니다.
또한 그 종말은 여전히 미래로 열려 있지만
이미 현재에 선취되었다는 사실도
우리가 지금 역사 앞에서 책임적으로 살아야 할 근거가 되는 겁니다.
물론 그 종말의 선취도 은폐의 방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 설교, 역사투쟁은
영적이어야하겠지요.
이런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역사에 내재적이신 분이라는 사실에서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비밀을 보편적 생명의 지평에서 해명해야할
책임과 당위가 있는 게 아닐는지요.
복음서 기자가 부활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역부족이었다해도 부활 경험은 분명하였을테지요..
오늘날 우리가 부활사건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표현의 부족인지 경험의 부족인지에
대한 질문조차 하기가 부끄러운 현실인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목사님의 글이 아니면 종말, 새생명, 궁극적인 생명들의 표현조차 듣기가 힘드네요.....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건강하세요.... 목사님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