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누가복음 금화의 비유입니다.
이거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맞는건지..
혹시 참 의미를 아시는 분이 계실까 해서 여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드신건데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지 막막하네요.
"장사 잘해서 돈 많이 벌고 큰 권세얻어라"는 해석이 아닌거같은데...
각자 가진 달란트를 하나님 나라 만드는데 크게 활용해라는 말씀 같기도 하고..
힌트라도 꼭 댓글 부탁드립니다..
=====================================================
금화의 비유
11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것을 보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들려 주셨다.
12 "한 귀족이 왕위를 받아 오려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금화 한 개씩을 나누어 주면서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이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해 보아라' 하고 일렀다.
14 그런데 그의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표를 뒤따라 보내어 '우리는 그자가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진정하게 하였다.
15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 오자마자 돈을 맡겼던 종들을 불러서 그 동안에 돈을 얼마씩이나 벌었는지를 따져 보았다.
16 첫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 하나를 열 개로 늘렸읍니다' 하고 말하자
17 주인은 '잘 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하며 칭찬하였다.
18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 하나로 금화 다섯을 벌었읍니다' 하고 말하자
19 주인은 '너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기겠다' 고 하였다.
20 그런데 그 다음에 온 종의 말은 이러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가 여기 그대로 있읍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 두었읍니다.
21 주인님은 지독한 분이라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 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기에 저는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읍니다.'
22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몹쓸 종아, 나는 바로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벌주겠다. 내가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 가고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는 지독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단 말이지?
23 그렇다면 너는 왜 내 돈을 돈 쓰는 사람에게 꾸어 주지 않았느냐? 그랬으면 내가 돌아 와서 이자까지 붙여서 원금을 돌려 받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며 호통을 친 다음
24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저자에게서 금화를 빼앗아 금화 열 개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하고 일렀다.
25 사람들이 '주인님, 그 사람은 금화를 열 개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자
26 주인은 '잘 들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던 내 원수들은 여기 끌어 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하고 말하였다."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도 막눈이라 알려주셔도 이해가 잘 안되네요,ㅠ
계속 읽어보고 생각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크랩 해온건 공동번역서입니다.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가니까 조회가 되더라구요.. ㅎㅎ
이 말씀은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잘못한 일에 대한 심판이라기 보다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심판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죄책감이나 모험, 용기와도 연관있는 주제이기도 하구요..
어떻게 보면 "주어진 것 가지고 장사(?) 잘해서 ...큰 칭찬 받아라" 도 과히 틀린 것 같지는 않군요. ^^
하지만 달란트를 재능이나 능력으로 보기보다는 '갈망'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요.
우리에게 처음 주어진 갈망의 크기나 강도는 모두 차이가 있겠지만
그 갈망을 진정으로 채워줄 상대를 찾아나서는 것이 실패할까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회피하고 변명하는 것보다 좋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고 누리고 싶어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이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 하면 오해 받기 딱 좋습니다.ㅠㅠ)
오히려 복음서가 약속하고 있는 그 엄청난 보상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갈망이 너무나 약하다고 책망을 들어 마땅하지요.
인용하신 성서구절이 특이하게도 북한성경이네요. 제가 보는 바로는,
예수께서 저 예언을 하실 당시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왕권이 예수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왕권'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가 아닌 다른 방식을 통한 어떤 실증적인 정치를 하나님의 왕권의 실체로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비유의 핵심은 흔히들 말하는 '달란트'가 아니라 '종의 버림받음'이며,
그렇기에, 마가복음에서 증언되는 메시지와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십자가에서 대신 버림받으셨다는,
그래서 그가 결국엔 하나님의 왕권의 자리에 앉으셨다는 전체 복음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흥미롭게도, 복음서의 다른 곳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고 명령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모든 인류가 종말의 생명 사건에 참여할 수 없다고 숙명론적으로 규정한 것일까요?
인류는 스스로 종으로서의 능력을 계발하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완전한 종, '예수'께 의존하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왕권에 참여하게 됩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가 인류의 왕이고요. 그래서 예수를 '만왕의 왕'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흔히 저 비유를 '달란트(talant)를 발전시키자'는 자기계발적 메시지의 근거로 해석하는 설교는,
예수의 본뜻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철없는 왜곡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독교 신앙은 자기계발이라기보다 예수 계발이며, 이는 신자들의 '노력'보다 예수의 주도적인 '능력'에 근거하기에
교회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구원 계획에 귀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할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