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3일

 

마가복음 후기(13)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6:17)


두 번째 표적은 방언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방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후에 제자들에게는 방언의 능력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아람어로 기도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각각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행 2:5-13) 일종의 외국어 능력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방언 현상은 고린도교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방언 현상은 외국어가 아니라 아무도 알아들 수 없는 신비한 소리입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면,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개인의 영적 경험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바울은 통역 없이 이런 방언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허공을 향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고 충고했습니다.(고전 14:9)

우리는 예루살렘과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방언 현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축귀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다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경험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또한 그들의 경험을 우리 방식으로 왜곡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바른 영적 자세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모든 것을 환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방언 현상은 기본적으로 소통의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인들 사이의 소통이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성령과의 소통입니다. 전자는 언어를 통한 소통이고, 후자는 언어 너머의 소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방언, 또는 언어 자체가 필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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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2010.02.03 11:28:00

드디오 진도를 따라 잡았네요.

방언의 부분에서 정목사님의 방언에 대한 신학묵상이 생각납니다.

현재의 방언은 성령과 소통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변질되버린 방언이 정말 성령과의 소통인가?

이런 의구심이 많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이겠지요.

 

김용남형제

2010.02.03 19:37:41

성령과의 소통이란 곧 예수 사건과의 소통일텐데,

현대 성령운동권의 방언의 은사가 원초적 케리그마라는 기독교 영성의 본질보다는

기도 생활 자체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감히 '악령의 역사'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죄해버리기엔 방언 옹호론자들에게 있는 나름대로의 영적 경험도 풍부하긴 하고요.

무엇보다 이렇게 말하는 저 또한 방언 옹호론자 중의 한 명이고요.

예수를 통하여 기독교 영성의 심층으로 들어갈 때, 어떻게든 융화의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사족을 덧붙인다면, 보편적 교회에서의 현대 성령운동권이나 은사주의권의 역할은,

영성의 전체 사유 속에서 잊혀졌지만 가장 원초적인 기독교 용어들을 끄집어냄으로서,

실존적 구체성이 풍성해지도록 신학적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방언, 기적, 권능, 기름부음, 임재, 영광, 부흥, 은사, 예언, 찬양, 권세, 치유, 계시, 예수의 이름 등등...

다 제가 은사주의적 교회에 머물 때 줄기차게 들어왔던 일종의 '방언'들인데,

이 모든 것들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사실 다 기독교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셈이기 때문에

그쪽 사람들과 형제자매로서 힘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신학적 영성에 입각한 방언통역은 매우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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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2010.02.05 10:42:11

용남형제가 언급한

'방언, 기적, 권능, 기름부음, 임재, 영광, 부흥, 은사, 예언, 찬양, 권세, 치유, 계시, 예수의 이름 등등...'

은 기독교의 본질과 맞닿았다기보다는 작금에는 말초화 된 것들입니다.

방언부터 예수의 이름까지 모두 도구화되어버린 언어들이지요.

말초에서 원류를 거슬러올라가면 본질과 맞닿긴 하겠지만...

형제가 지속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신학적 영성에 입각하여 이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그 크기와 분량 만큼 다시 정리하고픈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왜냐하면 옹호하는 것에 대한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고 싶은 것...

저도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 말초적 도구화되버린 것들을 붙잡고 정리하는 것보다는

원류가 확립 혹은 정리가 된다면 꼬리들은 어느새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정 목사님의 묵상이나 설교에서 이런 부분을 터치할 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런 은사의 부분도 더 심화되고 풍성한 이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냉소적이지않은 균형된 언급에서 은사들을 또다른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도 은사주의자(?)였지만 오늘 묵상에서처럼 '방언은 언어 너머의 소통이다'라고 표현하는

그런 품격으로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이미 우리가 핸들링할 수 있는 도구로 전락해버렸기때문이지요.

저도 용남형제의 생각처럼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계속적인 보정이 있기를 바라는 1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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