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Articles 7,958
관련링크 : |
---|
출판물 홍수의 이 시대, 참으로 많은 책들이 있다.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책을 써보지도 못한 나로서는 이런
얘기를 꺼내기가 좀 그렇기도 하지만, 어떻든 내가 지금껏 살면서 느낀 점은, 건전
한 신앙적 측면에서 과연 다독이 반드시 좋기만 한 일인지에 관해서는 다소간 의문
이 생긴다.(참고로, 한참 음악에 입문할 때는 이것 저것 많이 섭렵하다가 깊이가
생기면 생길수록 듣게 되는 음악<악곡>의 수는 오히려 줄어든다. 그게 보편적인
일이다)
위 문제와 관련한 구구한 얘기는 여기서 접고 본론으로, 최근에 이스라엘 현지에서
공부한바 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예수에 관한 책을 써냈다고 신문 지면을 통해서
알게 됐다. 그러한 사실이 소개된 후 며칠이 지난 오늘 그 책을 선전하는 내용을 일
견 훑어보니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 예수 사악한 사제였던가?"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책을 팔아먹을 당사자 측에서 어떤 식으로 고상한 말장난을 하더라
도 겉으로 전달되는 뜻은 그 비슷한 얘기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그러한 상업적인 의도의 화두일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싶지도 않다. 위 던져진 질문만 보더라도 일단 팔아먹기 위한
책으로 비쳐진다. 그리스도 예수를 뛰어난 종교인 그런 정도의 반열에 세워 놓는
그런 화두로 비쳐진다.
출판물 홍수, 홍수철에는 탁한 강물에 쓰레기도 많이 떠내려 온다.
책에 관한 지나친 긍정적 시각도 경계하고 책도 조심해서 읽어야 할 판이다.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책을 써보지도 못한 나로서는 이런
얘기를 꺼내기가 좀 그렇기도 하지만, 어떻든 내가 지금껏 살면서 느낀 점은, 건전
한 신앙적 측면에서 과연 다독이 반드시 좋기만 한 일인지에 관해서는 다소간 의문
이 생긴다.(참고로, 한참 음악에 입문할 때는 이것 저것 많이 섭렵하다가 깊이가
생기면 생길수록 듣게 되는 음악<악곡>의 수는 오히려 줄어든다. 그게 보편적인
일이다)
위 문제와 관련한 구구한 얘기는 여기서 접고 본론으로, 최근에 이스라엘 현지에서
공부한바 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예수에 관한 책을 써냈다고 신문 지면을 통해서
알게 됐다. 그러한 사실이 소개된 후 며칠이 지난 오늘 그 책을 선전하는 내용을 일
견 훑어보니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 예수 사악한 사제였던가?"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책을 팔아먹을 당사자 측에서 어떤 식으로 고상한 말장난을 하더라
도 겉으로 전달되는 뜻은 그 비슷한 얘기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그러한 상업적인 의도의 화두일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싶지도 않다. 위 던져진 질문만 보더라도 일단 팔아먹기 위한
책으로 비쳐진다. 그리스도 예수를 뛰어난 종교인 그런 정도의 반열에 세워 놓는
그런 화두로 비쳐진다.
출판물 홍수, 홍수철에는 탁한 강물에 쓰레기도 많이 떠내려 온다.
책에 관한 지나친 긍정적 시각도 경계하고 책도 조심해서 읽어야 할 판이다.
교회력에 의지하여 설교해야 한다는 정 목사님의 말씀처럼,
개인 신앙인의 사유보다 인류 전체 역사의 사유가 우월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대가들의 텍스트에 의지하여 사유하는 것이 성령을 의지하는 사유 방식일 것입니다.
음악의 깊이가 생길수록 듣는 악곡의 수가 줄어든다는 말씀을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한편 그것이 음악적 창조성에서 비롯되는 일이니만큼,
책읽기에서도 창조성이 발현되기까지 일단 훈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려되는 부분은, 예수를 '뛰어난 종교인'으로 묘사한다고 하여 다 저급하게 보시는 듯한 부분입니다.
물론 그런 묘사 자체에만 머물게 된다면 영성의 심화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때로는 그런 부류의 생각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깨달음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열광하는, 가령 <예수는 신화다> 같이 천박한 텍스트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긴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책이 그런 이야기를 할 경우에 말입니다.
한편 진 예수만님의 강력하게 비판적인 생각 또한 그런 맥락에서 충분히 존중받을만 하다고 봅니다.
평화는, 에큐메니컬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인위적인 행위로 발생하기보다는,
성령에 의하여 존재론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인류는 다만 꾸준히 '진리 논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신비롭게 이루어지는 평화는, 오히려 극심하게 배타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돋보일지 모르겠네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바울의 말처럼 말입니다.
성령이 세속사회에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불어닥치게 한 이유는,
그렇게 모든 것의 존재론적 예술성이 부각되게 하려는 전계획의 과정이 아닐까요?
마치 정 목사님께서 언젠가 댓글로, 예배 중에 어린 아이들이 떠드는 것에 대하여
"그런 아이들이 있어야만 정말 살아있는 예배가 될 거에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댓글을 읽고 참 많은 것을 깨달았는데,
각양각색의 음표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음악을 이루듯이, 형형색색의 꽃들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듯이,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들이 모여서 연출하는, 그런 '있음'의 놀라운 세계, 그 자연스러운 연합성.
그 깊이에서 언제나 즐거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끝은, 모든 것을 옳다하는 하나님의 '옳다함', 곧 칭의(稱義) 사건일테니까요.
꼭지글과 별 상관없이 댓글이 줄줄 나가서 죄송합니다.
깊은 밤, 자기 전에 하루 동안의 생각들이 명쾌히 정리되는 길을 열어주신, 진 예수만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