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6일
마가복음 후기(16)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16:19)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단락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매일 묵상의 방식으로 따라오다 보니 벌써 이런 순간이 왔군요. 우리의 인생도 마지막이 순식간에 느닷없이 오겠지요. 막 16:19절과 20절은 마가복음의 결론이라 말해도 좋습니다. 19절은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것이고, 20절은 제자들의 복음 전파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신약성서 전체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19절을 봅시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주 예수’라는 표현은 복음서 중에서 이 대목에만 나온다고 합니다. 그 표현은 원래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잘 알려진 것이라고 하는군요. 예수님을 ‘주’로 경험하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는 자연인이었던 나사렛 예수를 가리키고, ‘주’는 주인이라는 뜻의 헬라어 ‘퀴리오스’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퀴리오스는 로마 시대에 로마 황제에게만 붙여진 호칭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칭호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경우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지만, 그는 신성모독자로 죽음을 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칭호를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 붙인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앞에서 몇 번 언급했던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 또는 그리스도로 경험하고 고백한 게 아닙니다. 제자들도 처음부터 그걸 확신하고 따라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천천히 어떤 사태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런 사태 안으로 끌려들어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용남아,
너는 아무래도 판넨베르크 같은 신학자가 되어야겠다.
아니면 헨리 나우엔 같은 영성가가 되든지.
철학, 문학, 예술, 과학을 공부한 다음에,
아니면 그것과 더불어
신학을 공부하는 게 좋겠군.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도 배워야 하고,
영어와 독일어는 좀 해둬야겠지.
길이 멀구나.
그래도 인생을 던질만 하지 않겠니?
나는 네가 부럽다.
벌써 나름의 정신세계가 모양을 갖추어간다는 게 말이야.
'묵시문학적 인자의 자리'를 이해하는 기독교인이
한국에서 몇 명이 될까? 음.
그게 말장난이 아니라
영적인 리얼리티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야
우리의 영성이 깊어진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기독교인이
한국에서 몇 명이 될까?
너 때문에 놀라운 다비안들이 너무 많더구나.
닉에서 '형제'는 빼는 게 부르기 좋을 텐데...
예수가 스스로는 절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한 적이 없는데,
교회가 예수를 주(主), 그리스도, 묵시문학적 인자(人子)의 자리에 앉혀놓았다는 사실은,
정말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는 예수의 경고,
그리고 미련한 처녀들의 버림받음, 무익한 종의 쫓김받음, 염소들에게 임할 영벌 심판 등의 비유들.
그 무시무시한 예언은 결국 예언자 예수가 예언 속의 '주'라는 교회의 믿음으로 성취되었다는 것.
하나님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베푸시리라는 것.
그러니 예수를 앎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고, 예수가 옴이라는 인류 보편 사건에 모든 희망을 걸어둔 채,
끝내 온 세상을 구원해 낼 역사의 중심, 주 예수의 일방적인 임재를, 다만 기다려야겠네요.
마라나타, 주 예수여, 준비되어있지는 않사오나 속히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