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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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7일에 서울샘터교회 방문했던 김민호 라고합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지극히 근본주의적이고, 교권주의적인 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기복주의.. 미신(신을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나쁘게 표현하면, 꼴통보수인...
그래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와서 여러 글들을 읽으니 상당히 유쾌상쾌통쾌한 기분을 감출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부족하지만 '오두막 레포트'에 대해 커멘트를 받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냉철하고 날카로운 커멘트들 기대합니다.
(아래 글은 09-2학기 신학과 선정도서로 레포트로 제출한 저의 글입니다.)
매듭풀기
09년 2학기 신학과 선정도서로 『오두막』이 정해졌고, 아는 형의 권유로 인해 읽게 되었다. 분량은 적지 않았지만, 책의 종류가 소설인 까닭에 부담없이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대략 1주일에 1권의 소설을 읽기 때문이다.) 『오두막』의 옆 날개 작가 폴 영의 소개를 보고, 역사적 사실을 담은 자서전일 거라고 예상했으나 빗나갔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자서전적 액자형 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중간 부분은 판타지 소설로 오인할 요소가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으면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인 것을 알게 된다.) 큰 이야기-딸의 죽음에 대한 아픔-의 속에 작은 이야기-신과의 만남-가 있다. 작은 이야기는 기독교적 용어로 '환상'이다. 이 속에는 신론에 대한 깊은 고찰이 들어가 있다. 반면에 큰 이야기 속에는 상처와 회복이라는 과정이 들어가 있다. 이 보고서는 『오두막』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소설에 등장하는 신학적 표현들을 정리하고, 문학적 기호/어휘를 정리하고, 다른 작품과 비교분석하는 순으로 작성하겠다.
줄거리
액자형태로 맥과 윌리의 만남으로 소설이 시작되고, 윌리가 맥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로 전개된다. '거대한 슬픔'을 경험한 맥에게 한 편지가 온다. 발신자는 '파파'이다. '파파'는 맥의 아내가 신을 호칭할 때 쓰는 용어이다. 그리고 '조시'가 물에 빠진 이야기, '미시'의 실종이야기를 회상한다. '미시'가 아동연쇄유괴범에게 잡혀갔고, 한 오두막에서 옷이 찢겨 졌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거대한 슬픔'을 경험하고, 아직 시신을 찾지 못했을 때에 '파파'로부터 편지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맥은 윌리에게 차와 총을 빌려서 그 오두막으로 가게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파파, 예수, 사라유와 3일간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미시'가 겪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원망을 하기도 한다. 그 후,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사고를 당하고 만다. 3일간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시간은 집을 나선 후, 3일밖에 흐르지 않았다. 회복 후, 환상 중에서 파파가 알려주었던 미시의 시신이 있는 장소를 가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신학적 표현
이 책의 특징은 기독교의 신을 매우 쉬운 말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특별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불완전하고 어려운 교리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했다. 그 교리들 중 몇 가지만 선택하여 설명하겠다. 첫째,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다루겠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이라는 신학적 명제를 처음 접했을 때, 깊은 감동/감격을 받았었다. 희생/포기/자기부인을 몸소 모범을 보이신 까닭이다. 7장 ‘선착장의 하나님’에서 잘 표현된다. ‘피조물인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서 조물주인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설정한 것’이라고 저자는 쉬운 말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모성이다. 카톨릭은 부성적 하나님이 강해, 성모 마리아를 숭배한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 않는가?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야웨는 부성이 강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성만을 가지신 분은 아니다. 모성을 지니셨다. 이것이 기성교회에서 드러나지 않는 까닭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폴 영은 『오두막』에서 God the Father를 대부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소개한다.
셋째, 삼위일체의 상호침투와 전유에 대한 부분이다. 상호침투는 3위 하나님이 서로 영역을 공유함을 의미하고, 전유는 혼합되지 않도록 막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악이다. 9장 ‘오래전에 머나먼 정원에서’에서 사라유와 대화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님을 흉내(선악구분)내거나 심판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 악을 간략히 소개한다.
다섯째, 인간론이다. 10장 ‘물위를 걷다’에서 예수와 대화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등한 남녀, 지구를 맡은 자로서의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임마누엘이다.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예수는 미시가 죽임을 당할 때 자신이 함께 하였다고 맥에게 설명한다. 또한, 환상 속에서 3일간 맥은 하나님과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 동행함 속에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이러한 틀을 보았을 때, 이 소설의 신학적 주제는 ‘임마누엘’이다.
문학적 기호
문학 작품에는 특정 어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작가가 특정 어휘를 선택하여 상징성,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적이던 의도적이지 않던 간에,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분명히 특정 어휘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문학적 기호를 살펴보자. 첫째, ‘거대한 슬픔’이다. 소설 내에서는 자녀의 살해당함을 의미한다. 미시를 지켜주지 못함, 죄책감, 자녀 잃은 슬픔 등의 여러 감정이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의미를 조금 더 확장시키자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처/치욕/아픔을 의미한다.
둘째, ‘파파’이다. 주인공 맥의 아내 낸이 하나님을 호칭할 때 쓰는 어휘이다. 이는, 우리말로 아버지에 대한 친근함을 표현하는 ‘아빠’에 해당할 것이다. 맥은 처음에 하나님을 ‘파파’라고 호칭하는데 거부감과 어색함을 느끼지만, 서서히 적응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셋째, ‘양철상자’이다. 맥이 오두막을 찾아갈 때, 양철상자를 들고 간다. 양철상자 안에는 죽은 딸, 미시의 사진이 담겨있다. 즉, 딸에 대한 사랑/그리움을 상자 안에 가둬놓았다. 딸을 잃어 정상적인 삶을 견뎌내지 못했던 까닭인지, 양철상자에 담아 둔다. 아니면, 반대로 양철상자 그 자체가 딸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하든지, 혹은 단지 소중한 것을 담아주는 물건을 의미하든지 할 것이다. 결말 즈음에 맥은 환상 속에서 양철상자를 예수에게 맡겨두고 온다.
넷째,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죄책감’이다. 앞서 맥에 대한 부분은 언급했으니, 케이트에 대해 언급하겠다. 케이트는 자신 때문에 미시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그것을 맥에게 알려주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게끔 인도한다.
다섯째, ‘용서’이다. 파파가 맥에게 살인범을 용서해주라고 한다. 하지만, 맥은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그런 맥에게 파파가 용서에 대해 설명한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 (중략)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한다는 의미야.’ 이것을 통해 저자가 얻은 ‘용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여섯째, ‘눈물’이다. 소설 내에서는 치유를 상징한다. 그래서 파파는 맥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물의 경이로움을 무시하지 말아야지. 눈물은 치유의 물이고 기쁨의 샘물이야. 또 마음으로 말하는 최고의 언어이기도 하지.’ 눈물은 소설 내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이다. 이 문학적 기호는 소설『오두막』의 핵심주제이다. 소설을 차근차근 읽고 있으면, ‘오두막’에 대한 맥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초반부에 ‘오두막’은 맥에게 있어서 아픔/피해망상/슬픔/치욕의 장소이다. 그곳에서 딸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딸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의 죄책감과 자기한계의 자각 등 슬픈 감정들이 뒤섞이게 하는 장소이다.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과 3일간 함께 했던 소중한 장소로 변화한다. 즉, 상처/아픔/슬픔의 장소가 치유/회복/기쁨의 장소로 승화된다.
타 작품과 비교
『오두막』을 읽으면서 2개의 영화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첫째는 ‘브루스/에반 올마이티’이다. 하나님이 의인화되어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계시한다는 점에서 같으나, 그 깊이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오두막』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각각 의인화 되어 나오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소설의 전체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더 자세detail할 수 밖에 없겠다. 반면에 ‘브루스/에반 올마이티’는 인간의 믿음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둘째는 ‘밀양’-이청준 원작의 '벌레이야기'-이다. 영화 ‘밀양’과 원작 ‘벌레이야기’는 차이가 많지만, ‘밀양’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기에, 주요 핵심 주제 중 하나만 비교하고자 한다. 『오두막』의 주인공과 ‘밀양’의 주인공의 공통점은 ‘거대한 슬픔’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 후, ‘밀양’에서는 확실한 용서/회복은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오두막』에서는 확실한 용서/회복의 경험이 나타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원작 ‘벌레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 벌레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고 자살하는 결론이기에 용서/회복의 메시지는 전혀 없다. 이것을 이창동 감독이 ‘밀양’의 마지막 장면, 영화제목 그대로 ‘밀양secret sunshine'을 삽입하여 회복의 메시지를 입혔다. 그리고 더 나아가 폴 영은 『오두막』을 통해 확실하게 용서/회복을 그려냈다.
비평
삼위일체 교리는 매우 민감한 교리이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교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 경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두는 성서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절, 삼위일체 교리를 논증하는 구절은 한 구절이다. 더구나 그 구절은 -신비주의/헬라철학적 요소와 고양된 기독론의 신학적 전제를 갖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저작물이다. 교부시대에는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체계화 시키는 과정에서 소위 ‘이단’ 정죄가 이뤄져, 사람을 포용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도 있었다. 그런 가슴 아픈 과거는 둘째로 치고, 역사적으로 꾸준히 난해하게 여겨지는 삼위일체 교리를 『오두막』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쉽고 명료하게 제시한 것이 이 소설의 거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보수적 교단에서는 매우 환영받을 수 있는 소설이다.
인생을 많이 살지 않은, ‘거대한 슬픔’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경솔할 수밖에 없다. 그 경솔함을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실패나 상처 같은, 흔히 부정적인 동시에 긍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경험을 한다. 종종, 그 경험은 너무나 치욕스러워서 평생 가슴에 남아있기도 한다. 이청준은 그것을 ‘벌레이야기’에서 아주 잘 그러냈다. 솔직히 나는 폴 영의 소설 『오두막』보다는 이청준의 자칭 졸작 ‘벌레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녀 잃은 슬픔과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벌레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여 자살하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물론, 본인이 초현실/초이성적인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두막』보다는 ‘벌레 이야기’가 실존적으로 본인에게 더 가깝게 와닿는다.
매듭짓기
소설의 배경은 저자의 경험이다. 저자 윌리엄 폴 영이 ‘오두막’에서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가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아픔/치욕/상처들, 그것들을 신앙으로 이겨낸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 소설 『오두막』이다. 폴 영은 그의 소설을 통해 자녀들에게, 지인들에게 각자의 상처를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 그렇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런 상처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간다. 그 상처가 가시적이든지 불가시적이든지 말이다. 그것을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로만 남는다. 아물지 않는 상처는 지속적으로 아픔/치욕으로만 남게 된다. 상처가 치유된 후에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치유된 상처는 흉터이자, 과거에 상처를 입었다는 흔적일 뿐이다. -임레 케르테스의 말을 빌린다면- 상처라는 큰 바위를 잘게 부수어 돌멩이로 만들고, 짓눌려 살지 말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억하고 싶을 때 꺼내서 잠시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과정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래서 폴 영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통해, 신앙으로 극복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 『오두막』이다!
잘 봤습니다. 뭐, 이미 제출하셨으니까... 사후엔 약방을 하지 않는 법이죠^^
"역사적으로 꾸준히 난해하게 여겨지는 삼위일체 교리를 『오두막』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쉽고 명료하게 제시한 것이 이 소설의 거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저자의 해석이 '바른(?)', '명확한(?)' 해석인가 하는 점은 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맞을 겁니다. 그렇지만 문학이라는 장르를 고려하자면, 저자가 얼마나 신학적 담론을 '정확하게' 서술했는지보다는, 얼마나 '흥미롭게' 녹여냈느냐가 이 소설을 평가할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구요. 그리고 많은 이들의 평가를 따르자면, 이 기준에도 적당히 충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 기독교 사상과 문학의 '조우'를 시도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대중적'이었다는 측면을 고려하자면 충분히 호평할만 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적'이라는 덕목이 불필요할 때도 있지만, 이 경우는 대중적이었기에, 더욱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았나...
herdkmh님의 비평도 매끄러워보입니다. 다만 굳이 한 가지를 생각해보자면, [비평]과 [매듭짓기]로 이어지는 후반부가 다소 주의가 분산되어 보입니다. 초점을 좀 더 명확하게, 이를테면 기독교 사상에 대한 소설의 관점과 그에 대한 비평자의 의견을 보다 면밀하게 다루거나, 아니면 '상처' 논의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좀 더 매끄럽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예 2가지 관점의 2가지 비평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암튼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단적 성향이라고나 할까요..
소위 정통 기독교의 입장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말/언어로 표현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슴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소위 정통 기독교의 교리들-삼위일체 신론, 기독론, 구원론 등- 모두 인간의 표현일뿐이라고 생각하지, 절대시하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답변들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