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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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전에 추기경 김수환씨가 타계한데 이어 이번에는 불교계 인물 法頂이 타계했다.
지금 이 시대 그런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추앙되고 조명받는 그 이유를 알 듯하다.
구한말 이후 100년이 넘게 한국사회는 사상(이념)과 정쟁과 물질 추구의 논리로 점철
돼 왔다.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다름아닌 "몰인간" 그것이다. 인간이 지금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그 방향을 가늠할 수조차도 없다. 방향성의 완전한 상실이다.
자동차라는 이상한 장난감을 각일명 하나씩 굴리고 다니는가 하면, 손에 전화기를 쥐고
다니면서 이사람 저사람과 언제든지 조잘댈 수 있기도 하고, 이제는 아예 입에서 나는
고기 냄새가 식상할 정도로 모두들 배가 부른 참으로 기가막힌 세상이 됐지만, 그것들
모두가 물질 이상의 것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질이 인간에게 있어 필요한 요소일망정, 그것이 인간 본래적인 것일 수 없다는 그게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일 것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부터 이점을 분명히 짚어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들에 의해서 "인간"이 함몰되어 상실되고 말았다.
시대적 흐름의 사정이 이러하니 그러한 것들에 초연한 사람들의 삶이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
지 선택된 극소수만이 화려한 우상처럼 조명을 받게 된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 모습의
하나에 해당되는 일이다.
영적인 안목이 없이는, 이처럼 시대적으로 조명을 받게 되는 인간들의 "우상"과 그리스도
예수의 차이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차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유기적인 생명
력 유무와 영원 불멸성 여부에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유기적 일원이며, 인간
들의 우상과 달리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역사적 나사렛 예수는 언젠가 우리의 구원을
복음서와 계시록에 제시된 그대로 실재적, 현실적으로 완성시키신다. 불멸적, 영속적으로
존재하시는 사랑의 능력이시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기독교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이다.
지금 이 시대 그런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추앙되고 조명받는 그 이유를 알 듯하다.
구한말 이후 100년이 넘게 한국사회는 사상(이념)과 정쟁과 물질 추구의 논리로 점철
돼 왔다.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다름아닌 "몰인간" 그것이다. 인간이 지금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그 방향을 가늠할 수조차도 없다. 방향성의 완전한 상실이다.
자동차라는 이상한 장난감을 각일명 하나씩 굴리고 다니는가 하면, 손에 전화기를 쥐고
다니면서 이사람 저사람과 언제든지 조잘댈 수 있기도 하고, 이제는 아예 입에서 나는
고기 냄새가 식상할 정도로 모두들 배가 부른 참으로 기가막힌 세상이 됐지만, 그것들
모두가 물질 이상의 것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질이 인간에게 있어 필요한 요소일망정, 그것이 인간 본래적인 것일 수 없다는 그게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일 것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부터 이점을 분명히 짚어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들에 의해서 "인간"이 함몰되어 상실되고 말았다.
시대적 흐름의 사정이 이러하니 그러한 것들에 초연한 사람들의 삶이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
지 선택된 극소수만이 화려한 우상처럼 조명을 받게 된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 모습의
하나에 해당되는 일이다.
영적인 안목이 없이는, 이처럼 시대적으로 조명을 받게 되는 인간들의 "우상"과 그리스도
예수의 차이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차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유기적인 생명
력 유무와 영원 불멸성 여부에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유기적 일원이며, 인간
들의 우상과 달리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역사적 나사렛 예수는 언젠가 우리의 구원을
복음서와 계시록에 제시된 그대로 실재적, 현실적으로 완성시키신다. 불멸적, 영속적으로
존재하시는 사랑의 능력이시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기독교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이다.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 신화적인 존재.' 매우 중요한, 그래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논제의 제시이십니다.
한마디로 간단히 얘기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성서적인 관점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분에 관해서 예시되었다는 것이 다른 '인간들의 우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서의 모든 장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관해 말한 것이다." 라고 본
워치만 니의 관점이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그러한 면에서) 우리
에게 구약성서가 필요하고도 또한 유효한 것이지요. 나무들에게 우리의 눈으로 관찰
가능한 줄기와 가지와 잎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숨겨진 생명을 가진 견고한 뿌
리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석가모니의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이러한 인문적인 관점(과거
적으로 역사적 흐름이 존재하고 있느냐 혹은 그게 단절되어 단지 우발적이었는가 하
는 관점으로 사고하는 방식)에서 언급하기도 했었습니다.
제1성서가 예수에 관한 예언이라는 것은
예수를 신으로 믿는 사람들만의 이해 아닐까요?
유대인이나 이슬람인들도 그렇게 이해하며 성서를 읽을까요?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 않나요?
유대인들이 보는 이사야와 우리가 보는 이사야는 다른 책은 아니지만 전혀 다른 이해를 낳지 않습니까?
역사안에서의 예수, 신화로써의 예수, 갈릴리의 예수........
모두 우리의 삶에서 그의 길이 발견될때 믿음, 또는 구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MB도 신의 아들 예수를 믿고, 김X도 목사도 신의 아들 예수를 구주로 섬깁니다.
인간 예수냐 신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성서가 우리 삶의 기준으로 뿌리내릴때
드디어 성서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합니다.
"나 예수 믿었어요! 하나님!"
"그래서?"
예수를 신으로 믿는 사람들만의 이해 아닐까요?
유대인이나 이슬람인들도 그렇게 이해하며 성서를 읽을까요?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 않나요?
유대인들이 보는 이사야와 우리가 보는 이사야는 다른 책은 아니지만 전혀 다른 이해를 낳지 않습니까?
역사안에서의 예수, 신화로써의 예수, 갈릴리의 예수........
모두 우리의 삶에서 그의 길이 발견될때 믿음, 또는 구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MB도 신의 아들 예수를 믿고, 김X도 목사도 신의 아들 예수를 구주로 섬깁니다.
인간 예수냐 신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성서가 우리 삶의 기준으로 뿌리내릴때
드디어 성서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합니다.
"나 예수 믿었어요! 하나님!"
"그래서?"
<"그의 길"이 발견될때 믿음, 또는 구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요한 말씀이십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신앙"을 "the Way"라고 봤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이를 우리식으로 말하면, "도" 즉 '구원으로 가는 길' 이지요. (오래전 그들과 우리네
전통 "길"이라는 시각이 묘하게도 일치했었나 봅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는 기독교 신앙을 "구원의 도"라고 보지 못하고 단순히 교회(성당)에
다니는 그러한 행위가 곧 기독교신앙인 것으로 피상적으로 오판하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다름아닌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현대 기독인들의 관념적 "신앙"과 기독인들의 현실적 행실이
이분적으로 너무나도 상호 괴리되어 있을 것입니다.
엄격히 분별해서 말하자면 어떠한 종교기관에 다니는 것(예배 참여)은 신앙의 어떤 한 요소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걸로써 이미 신앙을 얻었다고 보는 것은 모든 이들의 "희망사항"을
한꺼번에 先반영한 것일 겁니다. 분명히 교회에는 나가지만 신앙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인데, 워치만 니도 이를 확실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중요한 말씀이십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신앙"을 "the Way"라고 봤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이를 우리식으로 말하면, "도" 즉 '구원으로 가는 길' 이지요. (오래전 그들과 우리네
전통 "길"이라는 시각이 묘하게도 일치했었나 봅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는 기독교 신앙을 "구원의 도"라고 보지 못하고 단순히 교회(성당)에
다니는 그러한 행위가 곧 기독교신앙인 것으로 피상적으로 오판하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다름아닌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현대 기독인들의 관념적 "신앙"과 기독인들의 현실적 행실이
이분적으로 너무나도 상호 괴리되어 있을 것입니다.
엄격히 분별해서 말하자면 어떠한 종교기관에 다니는 것(예배 참여)은 신앙의 어떤 한 요소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걸로써 이미 신앙을 얻었다고 보는 것은 모든 이들의 "희망사항"을
한꺼번에 先반영한 것일 겁니다. 분명히 교회에는 나가지만 신앙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인데, 워치만 니도 이를 확실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부언하자면, 이 시대의 어떤 인물들에 대한 우상화 현상은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달리하여
드러나는 또다른 하나의 "자기현시(顯示) 욕구"적 발로' 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그 사람들을 추앙하는 부류 대부분이 먹고 살만한 중산층 사람들(특히 언론계층)이라
는 면이 그러한 점을 방증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아주 면밀하게 분석한다면, 지금
의 상업적 언론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서 세인들의 그러한 관심을 교묘하게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러한 사고가 극단적인 면이 있다는 비난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
김수환씨를 조명한 "사랑"이라는 화두를 놓고 생각하자면, 만약에 사람들의 그러한 관심이
가식이 아닌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수십 년 전에 (여순사건 당시) 자신의 두
아들을 처단한 공산도배를 양아들로 삼고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 여수의 손양원 목사님이
사람들에 의해서 주목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고, 만약 "무소유"라는 화두를 두고 생각하자
면, 그리고 사람들의 그러한 관심이 "외식"이 아니고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면, 법정이라는
인물보다는 오히려 이 밑에서 소개된 <이분의 이러한 삶>의 장 목사님 그분이 사람들에
의해서 주목되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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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에 언급한 여수의 손양원 목사를 객관적으로 소개하고자 검색한 글입니다>
000 의원은 3.1절을 맞아 "민족의 자주독립과 원수를 사랑한 세계의 성자가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이셨다”면서 “그의 고결한 정신과 거룩한 삶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확대해 여수 애양원을 세계적인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000의원은 보도자료를 내고 “손양원 목사는 그의 부친이었던 손종일 장로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 거부와 독립운동으로 구속을 당하고, 손 목사 자신도 수차례 검속을 당하면서 자주 독립에 앞장서왔던 분”이라고 말했다.
000 의원은 “특히 손 목사는 여순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숨지게한 원수를 양 아들로 삼았고, 한센인들의 피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내면서 치료를 하는 등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랑의 성자였지만 그의 위대한 삶에 비해 그의 행적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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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는 또다른 하나의 "자기현시(顯示) 욕구"적 발로' 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그 사람들을 추앙하는 부류 대부분이 먹고 살만한 중산층 사람들(특히 언론계층)이라
는 면이 그러한 점을 방증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아주 면밀하게 분석한다면, 지금
의 상업적 언론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서 세인들의 그러한 관심을 교묘하게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러한 사고가 극단적인 면이 있다는 비난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
김수환씨를 조명한 "사랑"이라는 화두를 놓고 생각하자면, 만약에 사람들의 그러한 관심이
가식이 아닌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수십 년 전에 (여순사건 당시) 자신의 두
아들을 처단한 공산도배를 양아들로 삼고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 여수의 손양원 목사님이
사람들에 의해서 주목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고, 만약 "무소유"라는 화두를 두고 생각하자
면, 그리고 사람들의 그러한 관심이 "외식"이 아니고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면, 법정이라는
인물보다는 오히려 이 밑에서 소개된 <이분의 이러한 삶>의 장 목사님 그분이 사람들에
의해서 주목되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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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에 언급한 여수의 손양원 목사를 객관적으로 소개하고자 검색한 글입니다>
000 의원은 3.1절을 맞아 "민족의 자주독립과 원수를 사랑한 세계의 성자가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이셨다”면서 “그의 고결한 정신과 거룩한 삶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확대해 여수 애양원을 세계적인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000의원은 보도자료를 내고 “손양원 목사는 그의 부친이었던 손종일 장로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 거부와 독립운동으로 구속을 당하고, 손 목사 자신도 수차례 검속을 당하면서 자주 독립에 앞장서왔던 분”이라고 말했다.
000 의원은 “특히 손 목사는 여순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숨지게한 원수를 양 아들로 삼았고, 한센인들의 피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내면서 치료를 하는 등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랑의 성자였지만 그의 위대한 삶에 비해 그의 행적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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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원을 세계적인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
이 말과 김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을 우상화를 우려하는 시각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내 맘에 들면 성자고 맘에 안들면 헛된 우상인가요?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반공이데올로기의 기름기를 싹 빼고 바라볼때 그의 삶이 성자로써 불려질만한
그것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렇게 따지면 함석헌, 류영모, 문익환, 안병무 등과 같은
분들이 존경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그 자리를 정권의 시녀들이 차지하여 체육관만한 예배당을 지어대며
지금의 맘몬의 신앙으로 변질시킨 개신교는 타종교인의 시각으로 볼때 더럽고 추하기만한 시정잡배질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는 로마와 로마의 끄나풀에 밟히는 민중들 속에 계셨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별개라며 예수를 민중에게서 떼어내려는 어리석은 수작들이 개신교를 개독교로 만든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실 것입니까?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원하는것,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것, 그리고 그들이 아픈 이유......
거기에 하나님의 시선이 닿아있다고 봅니다.
법정스님의 죽음에 애도하는 이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며 노여워하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또한 그에 죽음에 아니 사람됨의 가치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울고 계시지 않을까요?
길상사에 1000억을 기부한 김영한은
"내가 모은 재산은 백석 시인이 남긴 시 한 구절의 가치도 없다." 라고 하였답니다.
시 한 구절로도 사람은 변합니다. 그것은 그 시 한 구절의 힘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참뜻을 찾게되는
깨달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이 말과 김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을 우상화를 우려하는 시각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내 맘에 들면 성자고 맘에 안들면 헛된 우상인가요?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반공이데올로기의 기름기를 싹 빼고 바라볼때 그의 삶이 성자로써 불려질만한
그것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렇게 따지면 함석헌, 류영모, 문익환, 안병무 등과 같은
분들이 존경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그 자리를 정권의 시녀들이 차지하여 체육관만한 예배당을 지어대며
지금의 맘몬의 신앙으로 변질시킨 개신교는 타종교인의 시각으로 볼때 더럽고 추하기만한 시정잡배질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는 로마와 로마의 끄나풀에 밟히는 민중들 속에 계셨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별개라며 예수를 민중에게서 떼어내려는 어리석은 수작들이 개신교를 개독교로 만든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실 것입니까?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원하는것,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것, 그리고 그들이 아픈 이유......
거기에 하나님의 시선이 닿아있다고 봅니다.
법정스님의 죽음에 애도하는 이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며 노여워하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또한 그에 죽음에 아니 사람됨의 가치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울고 계시지 않을까요?
길상사에 1000억을 기부한 김영한은
"내가 모은 재산은 백석 시인이 남긴 시 한 구절의 가치도 없다." 라고 하였답니다.
시 한 구절로도 사람은 변합니다. 그것은 그 시 한 구절의 힘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참뜻을 찾게되는
깨달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에 있어서도 그런 식의 신화가 형성된 건 아닌지 한 번 생각해봐야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