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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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 한 말씀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 말씀은 묘하게 연관이 되는 듯합니다.
첫 번째 최후의 심판에 관한 본문을 보면, 양과 염소의 무리가 대비되어서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양은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상징으로, 염소는 자기가 강한, 제멋대로인 것의 상징으로 잘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임금)이 마지막 심판의 권좌에서 양의 무리와 염소의 무리로 가르게 되는데, 여기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양은 염소를 따르지 못합니다. 염소의 무리는 자신들이 예수에게 속해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쳐납니다. 반면 양의 무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두 무리는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데, 염소의 무리는 자신들이 이길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고, 양의 무리는 기대도 안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의외로 양의 무리의 손을 들어줍니다.
염소의 무리는 큰 충격에 빠지고, 양의 무리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염소의 무리는 나름 예수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열심으로 예수와 자신들이 한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표면적인 소속감 보다는 그 “존재와 삶의 본질”이 자신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것에 방점을 찍은 것입니다.
예수라는 상징 놀이에만 빠져서 살게 되면, 삶의 실체가 실종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예수가 말하는 것을 보면, 현실의 삶을 도외시한 종교적 활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냐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사실 엄청 더 쇼킹합니다. 율법교사라고 하면 유대 종교에 대한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서 경건한 원리주의자들이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남 유다는 바빌론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종교적 순수성을 지켰지만,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완전히 동화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변절자와 이방인 수준으로 취급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의 경건주의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에게 어떤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성서가 말하는 대로 예수를 떠보려는 의도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 그 한계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율법서에 관한 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예수는 율법에서 뭐라고 씌어져 있는지 되물어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옳은 대답이라고 이야기 하고, 그렇게 하면 살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일단 율법교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나름 열심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사랑해야할 이웃은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함이 생겼나 봅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강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길에 강도를 만나게 된 사람에 대한 비유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 사람은 필시 유대인이었겠죠.
두 사람은 강도 만나서 다 죽게 된 사람을 지나쳐 가버립니다... 그 둘은 바로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경건한 종교인들입니다. 그냥 이 장면에서 “야 저 위선자들!” 하면서 값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조금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그들이 위선자들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은 거룩한 종교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피 묻은 사람을 만지거나 해서 그 거룩한 옷을 더럽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개 취급 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주막에 돈을 주며 누이고는 돌아오는 길에 돈이 더 들면 더 주기까지 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가 지적하고자하는 것은 사제와 레위인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종교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그 실체와는 전혀 동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나누어서 생각하던 율법학자가 최소한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하나님은 결국은 허상이었던 거죠...
예수는 도발적으로 질문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냐?”
그 율법학자는 “그 사마리아인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여전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을 인정할 수 없어 보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이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의 자유는 금기의 영역을 건드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비유의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 곰곰이 생각해봐야할 화두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럴 때 보면 정말 한국 교회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