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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타고난 이기주의자입니다. 매사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욕망이 채워져야만 만족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다들 사회정의를 말하고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논하다가도 구조조정으로 인해 본인이 해고될 처지가 되면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자기 이익과 반대되는 사회정의는 결코 사회정의가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입으로는 지역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정치인도 뒤로는 교묘하게 지역 연고주의를 이용하고 자극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혀 나갑니다. 무엇이든 내 입에 달면 좋은 것이고 내 입에 쓰면 나쁜 것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사람은 진실로 타고난 이기주의자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것은 무조건 신앙적인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한없이 복잡하고 오묘한 존재라서 거의 모든 행동 속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분명히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영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이 없이도 열심히 기도할 수 있을까요?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소망 없이도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영생을 얻고자 하는 소망 없이도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대부분일 겁니다. 무병장수에 부귀영화를 얻고 싶은 갈망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사실일 겁니다. 물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신앙적인 행위 속에는 신앙적인 부분뿐 아니라 신앙적이지 않은 부분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신앙적인 행위 속에는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과 영적인 이기주의가 뒤섞여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적 욕구나 사회적 욕구 못지않게 영적인 욕구도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굶주림을 느끼고 영적인 만족을 얻으려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밥을 찾는 게 당연하듯 영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끝난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밥을 먹는 것이 생활의 시작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이 신앙적인 삶의 시작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워서 영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영적인 이기주의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원이나 소위 뜨겁다고 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것, 화려하고 멋진 찬양집회나 간증집회에 참여하는 것,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아멘 할 수 있는 설교를 좋아하는 것,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면서 영적인 쇼핑을 즐기는 것, 한 바탕 울고 나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매우 은혜를 사모하는 행위 같지만 실상은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의 발로일 뿐입니다.
반면에 은혜를 사모하는 행위는 좀 다릅니다.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는 것, 잠잠히 그분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굳어진 죄악들을 살피는 것, 자유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것, 삶에 충실하기 위해 세상이 쳐놓은 거짓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 진정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행위요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들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은혜는 진정한 만족감을 줍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시23:1)고, ‘내 잔이 넘친다’(시23:5)고 고백했을 정도로 은혜는 충만한 만족감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결코 영적인 갈증을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 자기만족을 뛰어 넘어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형제에게 다가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순종하게 합니다. 공동체의 방관자로 물러서지 않고 공동체의 지체로 투신하게 합니다. 죄를 보게 하고,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살기 위해 이기적 본성과 싸우게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거스르는 이 세대를 분별하며 대안적 삶을 살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진정한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믿음을 주신 것은 신앙으로 삶의 깊이를 보게 하고, 찌그러진 삶을 진정한 삶으로 회복하게 하고, 생활이 삶이 되게 하고, 하나님나라방식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지 은혜와 믿음을 강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신앙적 현실을 보면 대부분 은혜를 위해 은혜를 사모합니다. 신앙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신앙이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느 누가 신앙적 행위 속에 비신앙적인 요소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영적인 필요를 채우다가 자칫 영적인 이기주의에 갇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도 백퍼센트 순수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순도 백퍼센트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순수한 것이 반드시 최선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혼돈과 뒤섞임 속에서 뒹굴어야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기에, 죄악된 환경이 없이는 배울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에게는 죄악과 죄악된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신앙적 불순물이 섞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고 회개를 일깨우는 영적 환경을 제공하기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교회의 순전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현실에 안주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순전함을 향해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교묘한 뒤섞임을 섬세하게 분별하여 속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인 갈증을 해갈하고 영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영적 만족이라는 고립된 성에 갇힌 영적 이기주의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알고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에 함몰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신앙적인 행동인양, 또 그것이 삶을 복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지름길인양, 하나님의 뜻인양 소리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신앙을 위한 신앙의 길을 강요하는 자들, 믿음과 은혜마저도 신앙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눈과 귀를 빼앗긴 채 지내왔습니다. 신앙을 강화하는 것이 삶을 소외시키고 삶을 신앙 안으로 쑤셔 넣어 질식시키는 죄악의 온상으로 작용할 때가 더 많다는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또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를 자극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속지 않도록 눈을 떠야겠습니다. 무지한 신앙생활을 청산해야하겠습니다.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책임 전가도 중단해야겠습니다. 백퍼센트 순전할 수는 없지만 순전하기 위해 씨름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에 자석처럼 이끌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말씀의 눈을 뜨게 해주고, 진실의 눈을 뜨게 해주며, 삶을 삶 되게 해주는 신앙생활로 부활해야겠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것은 무조건 신앙적인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한없이 복잡하고 오묘한 존재라서 거의 모든 행동 속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분명히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영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이 없이도 열심히 기도할 수 있을까요?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소망 없이도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영생을 얻고자 하는 소망 없이도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대부분일 겁니다. 무병장수에 부귀영화를 얻고 싶은 갈망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사실일 겁니다. 물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신앙적인 행위 속에는 신앙적인 부분뿐 아니라 신앙적이지 않은 부분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신앙적인 행위 속에는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과 영적인 이기주의가 뒤섞여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적 욕구나 사회적 욕구 못지않게 영적인 욕구도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굶주림을 느끼고 영적인 만족을 얻으려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밥을 찾는 게 당연하듯 영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끝난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밥을 먹는 것이 생활의 시작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이 신앙적인 삶의 시작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워서 영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영적인 이기주의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원이나 소위 뜨겁다고 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것, 화려하고 멋진 찬양집회나 간증집회에 참여하는 것,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아멘 할 수 있는 설교를 좋아하는 것,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면서 영적인 쇼핑을 즐기는 것, 한 바탕 울고 나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매우 은혜를 사모하는 행위 같지만 실상은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의 발로일 뿐입니다.
반면에 은혜를 사모하는 행위는 좀 다릅니다.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는 것, 잠잠히 그분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굳어진 죄악들을 살피는 것, 자유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것, 삶에 충실하기 위해 세상이 쳐놓은 거짓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 진정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행위요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들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은혜는 진정한 만족감을 줍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시23:1)고, ‘내 잔이 넘친다’(시23:5)고 고백했을 정도로 은혜는 충만한 만족감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결코 영적인 갈증을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 자기만족을 뛰어 넘어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형제에게 다가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순종하게 합니다. 공동체의 방관자로 물러서지 않고 공동체의 지체로 투신하게 합니다. 죄를 보게 하고,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살기 위해 이기적 본성과 싸우게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거스르는 이 세대를 분별하며 대안적 삶을 살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진정한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믿음을 주신 것은 신앙으로 삶의 깊이를 보게 하고, 찌그러진 삶을 진정한 삶으로 회복하게 하고, 생활이 삶이 되게 하고, 하나님나라방식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지 은혜와 믿음을 강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신앙적 현실을 보면 대부분 은혜를 위해 은혜를 사모합니다. 신앙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신앙이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느 누가 신앙적 행위 속에 비신앙적인 요소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영적인 필요를 채우다가 자칫 영적인 이기주의에 갇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도 백퍼센트 순수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순도 백퍼센트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순수한 것이 반드시 최선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혼돈과 뒤섞임 속에서 뒹굴어야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기에, 죄악된 환경이 없이는 배울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에게는 죄악과 죄악된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신앙적 불순물이 섞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고 회개를 일깨우는 영적 환경을 제공하기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교회의 순전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현실에 안주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순전함을 향해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교묘한 뒤섞임을 섬세하게 분별하여 속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인 갈증을 해갈하고 영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영적 만족이라는 고립된 성에 갇힌 영적 이기주의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알고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에 함몰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신앙적인 행동인양, 또 그것이 삶을 복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지름길인양, 하나님의 뜻인양 소리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신앙을 위한 신앙의 길을 강요하는 자들, 믿음과 은혜마저도 신앙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눈과 귀를 빼앗긴 채 지내왔습니다. 신앙을 강화하는 것이 삶을 소외시키고 삶을 신앙 안으로 쑤셔 넣어 질식시키는 죄악의 온상으로 작용할 때가 더 많다는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또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를 자극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속지 않도록 눈을 떠야겠습니다. 무지한 신앙생활을 청산해야하겠습니다.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책임 전가도 중단해야겠습니다. 백퍼센트 순전할 수는 없지만 순전하기 위해 씨름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의 모양을 띤 영적 이기주의에 자석처럼 이끌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말씀의 눈을 뜨게 해주고, 진실의 눈을 뜨게 해주며, 삶을 삶 되게 해주는 신앙생활로 부활해야겠습니다.
2008.07.20 11:38:18
학교시절부터 훌륭하신 신앙의 선배들 덕택에
비교적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 영적이기주의를 강요하는 사람들 틈속에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충돌하려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방관자가 아닌
공동체의 지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지만
그도 쉽지가 않습니다
공동체의 머리가 예수님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면
교만한 말이 될까요?
많이 안다는 것은
많이 보인다는 것이고
따라서 많이 힘들어진다는게
제 아내의 푸념이기도 하고
남편인 저에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매주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느끼는 점은
그러한 문제점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질문을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의 체험과 교육을 하여야 하는지
참 어려울때가 많군요
목사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신앙생활이
진실로 복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진정 말씀에 진실에 새로운 눈이 더욱더 눈이 크게 뜨이길 기도합니다
비교적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 영적이기주의를 강요하는 사람들 틈속에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충돌하려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방관자가 아닌
공동체의 지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지만
그도 쉽지가 않습니다
공동체의 머리가 예수님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면
교만한 말이 될까요?
많이 안다는 것은
많이 보인다는 것이고
따라서 많이 힘들어진다는게
제 아내의 푸념이기도 하고
남편인 저에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매주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느끼는 점은
그러한 문제점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질문을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의 체험과 교육을 하여야 하는지
참 어려울때가 많군요
목사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신앙생활이
진실로 복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진정 말씀에 진실에 새로운 눈이 더욱더 눈이 크게 뜨이길 기도합니다
2008.07.21 11:28:41
이방인님!
꽤 오랜 시간 다비아에 들르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제 뒤에 칼럼지기로 참여하신 분들이 계시더군요.
내가 막차 탄줄 알았거든요....
오늘 보니 이방인님이 강희정님이신거죠?
님을 통해 문화 읽는 눈을 열어가야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행복하세요.
꽤 오랜 시간 다비아에 들르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제 뒤에 칼럼지기로 참여하신 분들이 계시더군요.
내가 막차 탄줄 알았거든요....
오늘 보니 이방인님이 강희정님이신거죠?
님을 통해 문화 읽는 눈을 열어가야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행복하세요.
2008.07.21 11:31:42
모래알님!
영적 이기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지만
알고 경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삶이란 결국 미완성이고,
미완성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 아닌가요?
영적 이기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지만
알고 경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삶이란 결국 미완성이고,
미완성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