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밥 먹을 때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편이신지, 아니면 그냥 먹기만 하는 편이신지. 서양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많은 편인 반면에 동양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이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제법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소. 특히 젊은 사람들은 말없이 있는 거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오. 대학교 학생 식당에 들어가 보셨소. 시끄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소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님으로부터 밥 먹을 때 말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은 것 같소. 실제로 그런 충고를 들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 무의식 한편에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특히 큰 소리로 떠들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자리를 잡고 있는 거는 분명하오. 그렇지만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나 교회에서 예배 후에 밥을 먹을 때는 편안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편이오. 어떤 쪽이 꼭 좋다거나 나쁘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는 아니오.
그대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 경험으로는 혼자 밥을 먹을 때가 밥맛이 가장 좋소. 이상하게 들리시오? 흔히들 하는 말로는 밥은 함께 먹어야 맛이 난다고들 하긴 하오. 혼자 청승맞게 밥을 먹으면 아무리 좋은 반찬을 곁들여도 맛이 안 단다는 거요.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오. 그게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소. 나도 보통 때는 그렇게 느낄지 모르겠소. 그러나 정말 깊은 맛은 혼자 먹을 때 느낄 수 있소. 밥 먹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라오. 무슨 일이든지 집중하지 않으면 깊은 맛을 모르는 법이라오. 우리는 집중하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 있어서 밥도 그렇게 먹는 것 같소. 더 맛있는 거를 찾는 이유도 역시 밥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오.
그대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밥 먹는 일에 집중한다는 말은 그것을 도(道)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라오. 절에서 승려들이 밥 먹는 걸 발우공양(鉢盂供養)이라고 한다오. 그것에 얽힌 일화들은 인터넷에서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테니, 내가 말하지는 않겠소. 그들은 경전을 공부하거나 염불을 외우고 예불을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밥 먹는 것도 구도로 여기는 거라오. 그러니 발우공양 때 말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하오. 내가 알기로는 수도원에서도 밥을 먹을 때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지 않소. 수도사 중의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나머지는 그것을 들으면서 밥을 먹기만 하오.
며칠 전에 나는 가족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집에서 혼자 밥을 먹었소. 마침 밥을 새로 했소. 우리 집에서 밥은 원래 주로 내가 하오. 전기밥솥 뚜껑을 열고 먼저 주걱으로 밥을 휘저었소. 그래야 밥알 사이에 간격이 생겨서 먹기에 적당한 탄력을 유지하는 거요. 찹쌀을 약간 넣어서 지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밥이 얼마나 기름지고 찰진지, 다시 놀랬소이다. 그 밥 냄새는 또 얼마나 황홀한지 모르겠소. 공기에 담았소. 거기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도 신기했소. 밥을 입에 넣고 씹을수록 단맛이 진해졌소. 김치와 김과 콩자반으로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었소. 그 순간에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절감했소이다. 그대는 오늘도 맛있게 저녁을, 또는 아침을 드셨소? 매번의 밥 먹기를 성찬 대하듯이 해 봅시다. (2010년 3월27일, 토요일, 햇살 후에 구름, 어제 해군 초계정 침몰로 40 여명의 젊은이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으로 하루 종일 마음이 아픈 날)
요즘 저는 집에서도 식사 시간에 일부러 방에 들어가 책상에서 은밀하게(?) 먹는 걸 즐기곤 합니다.
다른 어떤 기도회나 부흥회 시간보다, 밥을 먹을 때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장 왕성하거든요.
하루 종일 고민하던 생각거리가 그렇게 식사 중에 깨우쳐지듯 풀리고 나면 얼마나 개운하고 기쁜지.
어떤 책 이름을 보니 ‘절대로 혼자 밥 먹지 말라(Never Eat alone)’는 자기계발서도 있던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범국민적으로 ‘면벽 식사 운동’이 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성서 텍스트 문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평생 ‘밥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속의 생명을 놓치며 피곤하고 복잡하게 살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도구적인 ‘인맥 상품’이 되어주면서,
밥 안에서 자기 생명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인맥’을 외면해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관계가 무엇인지, 밥이 무엇인지, 기본적인 삶의 현실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증거겠군요.
역시 '밥 먹기' 라는 제목에 저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위에 용남군이 인용한 '절대로 혼자 밥 먹지 말라' 는 말을 절대로 따르지 말라고 하고 싶군요.
저는 혼자 밥 먹는 기회를 일부러라도 만들 때가 있습니다.
까페에서 커피는 기본적으로 혼자 잘 마시구요,
북적이는 밥 집에서도 혼자 먹고,
레스토랑의 테이블 하나를 미안하지않게 차지하려고
일부러 식사 때를 지나서 가기도 합니다.
주로 멍하게 생각하다가 밥맛도 음미하다가 보면
주위에서 얘기하는 소리는 그냥 외국어같기도 하고 못 알아들어요.
그것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쏠로라서 이렇게 된 건지, 요즘 말하는 '모태 쏠로' 라서 이런 건지....ㅡㅡ;
목사님께서 밥 하시는 마지막 단락에서
별 일 아닌 것을 대단하게(ㅡㅡ;) 묘사하시는 것을 따라가면서
만화 '초밥왕'의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일단 밥을 잘 해야 하거든요....^^
식사법
-김경미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아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밥을 경건하게 집중해서 먹도록 해야 되겠네요.
한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생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열심히 알차게 먹어야 겠습니다.~~^^
[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 -- 김훈, [칼의 노래] 중에서--
바다위에서 전쟁을 치르던 이순신의 마음을 잘 묘사한 칼의 노래 중 한대목입니다
전쟁터에선 적의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게 꼬박꼬박 달려드는 끼니때였겠지요.
끼니때마다 부하들을 먹일 걱정에 한숨짓는 수장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그는 아마도 밥 한그릇의 숭고함을 뼈속까지 곱씹으며 전쟁의 시간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오늘 묵상을 통해
밥을 무시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한번 다짐해봅니다.
교회 찾는 걸 포기하고 가끔씩이라도
서울샘터교회에 들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근데 일요일 오가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