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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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앞부분을 보면 예수께서 산상 설교를 마치시고 실제적인 치유 사역을 행하시면서 이리 저리 바쁘게 다니시던 모습이 보입니다...
사족부터 먼저 한 번 달아보면...
보통 성경에 중풍병이라고 나오는 것은 사실 원어로 보면 9장 2절에 형용사 형으로 나오듯이 “παραλυτικὸν”(빠라뤼띠콘)이라고 해서 즉 영어의 "paralytic" 의 어원적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이 표현은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거나, 경련이 일어나거나, 움직일 수 없는 그 모양새를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현대의 CVA 일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참 많습니다. 고대에 뇌졸중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 리도 만무하죠.
한 가지 더 살펴보면, 8장에 나오는 문둥병이라는 표현은 “λεπρὸς” (레쁘로스) 라고 하는 명사형태로 “나병을 비롯한 피부 질환을 가진 사람, 배척받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현대 영어의 “leprosy”의 어원적 단어가 되는데 영어에서는 나병으로 특정 질환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지만, 레프로시는 원래 “악성 전염성 피부병” 을 총칭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고대는 세균에 대한 개념, 위생과 역학에 대한 지식도 많이 없던 시절이었죠. 깨끗한 용수가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니 전염성 피부병이 많았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통은 현대에도 낫게 하기 힘든 한센병 환자를 낫게 했다, 뇌줄중 환자를 낫게 했다는 그런 부분으로만 좁혀서 열광하면서 결국 기적에만 집중하게 되구요.
그러나 중풍병, 문둥병이라는 특정 질환에 대한 관심 보다는, 그 당시 마비병과 악성피부병이 종교적, 사회적으로 지니는 의미가 무엇이었느냐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제가 얼굴 피부가 좀 뒤집어져 보니, 자신감도 뚝 떨어질뿐더러 왠지 피부가 깨끗한 사람과 피부가 뒤집어진 나 자신 사이에 경계가 생긴다는 느낌이 들고, 또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면서 무의식적으로 ‘버려진’ 느낌이 들더라구요.
길 가다가 중풍이든 마비병이든 간에, 절뚝거리면서 혹은 팔이 축 늘어져서 걷는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과 함께 ‘우리와는 다른 사람’ 이라는 무의식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질병들이 위에서 제가 말한 사회적인 측면 뿐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의 의미까지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죄(ἁμαρτία)로 인해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악성 피부병 환자를 부정한 죄인으로 간주하여 영문 밖으로 쫓아내고는 커뮤니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고, 거기서 만에 하나 낫는 경우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는 정결 예식을 거치고 나서 다시 커뮤니티로 복귀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악성 피부병의 경우엔 전염병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순기능의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병자들을 모두 종교적 죄관념으로 낙인찍어 죄의식이라는 숙명 속을 허덕이도록 만든 역기능도 있었습니다. 그 역기능은 종교지도자들이 일반 대중들을 길들이는 방편이 되기도 했죠.
그런 상황에서 그 마비병을 앓는 친구를 평상에 뉘여서 데리고 왔다는 것은 예수의 눈에 굉장히 인상 깊게 보였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절에 믿음을 “보시고”에서 이 보시고라는 것은 “ἰδὼν” 이라는 “호라오” 동사의 부정과거형 - 보통 영어의 과거형과 같습니다 - 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보통 그냥 보았다는 의미가 아닌 “눈여겨보았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는 말이죠.
예수께서 눈여겨보셨을 그 친구들의 “믿음”(πίστιν)은 바로 그 친구들이 마비병을 앓고 있던 친구를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벽을 허문 가슴 깊은 사랑과 우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8장 초반부에 로마군대에 속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종이 앓고 있던 마비병을 고쳐주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어쩌면 침략자 로마의 하수인인 백인대장에게 적개심을 느낄 만도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이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고 선뜻 말씀하신 것도 신분의 차이를 무색하게 하는 그 백인대장의 종에 대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백인대장을 보고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한 것은 예수 앞에서 보여준 철저하고도 진정어린 자기낮춤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2절에 믿음이라는 표현으로 나오는 “삐스띤(πίστιν)”은 뭔가 종교적 인식이 만들어내는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잇닿아 있는 존재의 신성함이 드러내는 향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향기가 바로 예민한 예수의 영적인 후각을 자극했고, 그래서 돌아보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심증이 듭니다.
예수는 곧이어 그 마비병 환자에게 “힘을 내어라! 아가(τέκνον)... 너에게서 죄가 용서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다루듯 하는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예수는 이 사람의 마비병보다 그 병이 만들어낸, 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죄책감, 그 무거운 짐이 그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읽어내었습니다.
그 때 예수의 죄 용서 선언을 옆에서 보고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죄 용서에 대한 선언은 종교적 임무를 맡고 있던 제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판단하는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는 너희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사실 어느 것도 쉽지 않은 일이죠...
한 편 생각해보면, 죄의 용서야 말로 그냥 네 죄를 용서 받았다고 립서비스 차원에서 끝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마비병 환자가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은 더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예수는 6절에서 “사람의 아들” (인자,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ἐξουσίαν, 권세, 즉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에도 나오는 묵시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쓰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사람의 아들” 이 3인칭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겠다’ 가 아니라 ‘ 사람의 아들(그)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겠다’ 라고 표현한 거죠. 즉, 예수는 자신이 지닌 메시야적 정체성을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마비병 환자에게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라고 말하자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갔습니다.
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믿고 있던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눈앞에서 그 사람이 일어서서 걸어가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을 것이며, 예수의 죄 용서 행위에 대해서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군중들은 두려워했고(ἐφοβήθησαν, ‘포베오’ 라는 동사의 과거형으로 phobia의 어원적 단어입니다 - 이 두려움은 어떤 무서움이나 겁에 질리는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느끼는 존경심과 경외감에 가깝습니다 - 사람들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사람‘들’ 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마지막에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라는 복수 형태의 표현입니다. 개역 성경은 그냥 ‘사람에게’ 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그냥 생각하면 ‘예수에게 이러한 권한을 주신’ 이라고 표현이 되어야 하겠지만 ‘사람들에게’라고 표현된 것은 무언가 성서가 말하려는 의도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건 어쩌면 ‘하나님의 현존 경험’이 종교 귀족들을 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로 열려져 있다는 것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증명되어버린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 선언을 할 때,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을 주인이다라고 할 때에도 안식일을 통해서 자신이 경배 받겠다는 의미가 아닌, 안식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의미였다는 것도 왠지 지금 이 부분과 많이 통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요것은 그냥 맛배기로 올리는 원문입니다. 묘한 느낌 한 번 가져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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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Καὶ ἐμβὰς εἰς τὸ πλοῖον διεπέρασεν καὶ ἦλθεν εἰς τὴν ἰδίαν πόλιν
9:2 καὶ ἰδού, προσέφερον αὐτῷ παραλυτικὸν ἐπὶ κλίνης βεβλημένον καὶ ἰδὼν ὁ Ἰησοῦς τὴν πίστιν αὐτῶν εἶπεν τῷ παραλυτικῷ Θάρσει τέκνον ἀφέωνταί σοί αἱ ἁμαρτίαι σου
9:3 καὶ ἰδού, τινες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εἶπον ἐν ἑαυτοῖς Οὗτος βλασφημεῖ
9:4 καὶ ἰδὼν ὁ Ἰησοῦς τὰς ἐνθυμήσεις αὐτῶν εἶπεν ἵνα τί ὑμεῖς ἐνθυμεῖσθε πονηρὰ ἐν ταῖς καρδίαις ὑμῶν
9:5 τί γάρ ἐστιν εὐκοπώτερον εἰπεῖν Ἀφέωνταί σοι αἱ ἁμαρτίαι ἢ εἰπεῖν Ἕγειραι καὶ περιπάτει
9:6 ἵνα δὲ εἰδῆτε ὅτι ἐξουσίαν ἔχει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πὶ τῆς γῆς ἀφιέναι ἁμαρτίας τότε λέγει τῷ παραλυτικῷ Ἐγερθεὶς ἆρόν σου τὴν κλίνην καὶ ὕπαγε εἰς τὸν οἶκόν σου
9:7 καὶ ἐγερθεὶς ἀπῆλθεν εἰς τὸν οἶκον αὐτοῦ
9:8 ἰδόντες δὲ οἱ ὄχλοι ἐφοβήθησαν, καὶ ἐδόξασαν τὸν θεὸν τὸν δόντα ἐξουσίαν τοιαύτην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의욕(열망)이 대단하시군요.
제가 유년시절부터 젊은시절까지는 복음서가 그저 하나의 얘기책인줄로 착각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도 대체로 그런 식(그러한 텍스트)으로 사용하고 또한 그렇게 가르쳐왔구요.
그러나 복음서들은 이적이나 그 옛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있었던 예수라는 분에 관한 흥미
로운 얘기거리에 관한 관심이 사라지게 되는 날이면 그저 시시한 얘기책으로 비쳐지기 시작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근래 예수보다 바울의 생애와 간증과 유훈들이 더욱 더 조명을 받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깨닫고 보니, 성서에서(아니 세상 모든 책들 중에서) 복음서보다 어려운
텍스트는 없을 것이라고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학구열과 일정 수준에 이르는 상당한 지적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러나 복음서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령적인 영력이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에 관해서는 정답도, 혹은 어떠한 모범답안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의
각자의 깨달음(구도적 응답)의 경지가 곧 "정답"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깨달음들을 서로 나눌 때 틀림없이 배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바의 "성도간 교제 / 교통" 의 필요성일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서를 읽고 그 즉시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천재이거나, 아니면 주님이 특별히 택하신 사람이거나, 그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의 가호를 빕니다.
종교적으로 규정된 "죄"라는 관념이 사람들을 얼마나 억압하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는 철저히 "죄" 를 존재의 상태로 보았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즉 죄라는 것을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어떠한 규정으로가 아니라, 어서 빨리 풀어줘야 할 존재를 압박하는 포승줄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전자에게는 관념적 법적 정의가 작동한다면, 후자에게는 사랑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율법학자들과 예수의 차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예수는 스스로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가지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누구와도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그러한 자기숨김과 동일화를 통해서 메시야적 구원 사역을 행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예수는 바로 모든 사람들이었고, 또한 모든 사람들은 바로 예수였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