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지울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이크로 코스모스. 초원의 작은 생명체들이 벌이는 평생과도 같은 하루를 담은 영상입니다. 멀리서 볼 때는 별일 없어 보이는 땅과 숲과 연못 속에 사실은 우주보다 더 크고 기기묘묘한 곤충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놀랍도록 정직하고 아름답게 담아낸 걸작입니다. 대충 대여섯 번은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조의 영광과 신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을 깨고 나온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에서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의 나비가 나오는 것을 볼 때는 숨이 멎을 정도였습니다. 모든 존재는 정말 제각각 완전했습니다.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생명 앞에선 언어가 사라졌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고 나서 입을 닫았던 것처럼.
생명. 생명은 서술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신비일 뿐이고 은총일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생명을 보십시오. 모든 생명은 서로의 생명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자기만으로 살고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얽힘이요 상호의존이요 흐름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씨줄과 날줄이 얽히고설킴으로써 오늘의 ‘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생명은 온 생명이고 온 생명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죽음과 생명의 진실
이와 같은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란 것도 새롭게 읽힙니다. ‘죽음’이란 개체 생명의 멈춤이 아니라 온 생명으로부터의 분리요, 하나의 생명이 온 생명의 흐름에서 단절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 악마를 뜻하는 ‘devil’이란 단어도 어원을 따져보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devil’은 본래 ‘떼어내다’, ‘동강내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ollein’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 사람들은 복잡하게 얽힌 생명의 씨줄과 날줄을 해체하여 자기중심성에 묶이게 만드는 것을 악마의 본성이라고 이해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악마의 본성이 바로 죽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깨어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의 탁류에 휩쓸려 살지 않는 사람, 세상의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을 가리켜 의식이 깨어있다고 합니다. 또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가리켜 영적으로 깨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깨어있음’은 단순히 기도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깨어있음’의 본질은 타인의 아픔과 처지에 동참하는데 있습니다. 다른 존재를 향해 열려 있고 다른 존재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에 ‘깨어있음’의 본질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깨어있음’이란 자기 안에 갇히지 않은 상태,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열어놓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깨어있지 않음’은 자기의 성 안에 굳게 갇혀 있어 타인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 온 생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겠고요.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생명 현상은 흐름과 깨어있음으로 나타나고, 죽음 현상은 단절과 깨어있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생명 현상은 온 생명과 함께 함이요, 죽음 현상은 온 생명을 거부함입니다. 생명 현상은 변화의 흐름이요, 죽음 현상은 붙박인 멈춤입니다. 생명 현상은 나눔이요, 죽음 현상은 쌓음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생명과 죽음의 진실입니다.
죽음 현상에 몰두하는 삶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생명과 죽음의 진실이 이처럼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줄기차게 생명 현상을 거부하고 죽음 현상으로 내닫는다는 것입니다. 다들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는 있는데 실제로는 죽음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죽음에 삶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느 한 둘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모순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십시오. 누가 더 훌륭하게 죽음 현상을 살아내는지를 겨루고 있지 않습니까? 지극한 모순을 보편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인 채 상식 안에 갇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말입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살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죽음 현상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삶의 의욕이 넘칠수록 죽음 현상으로 치닫는 어리석음을 봅니다. 바울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2:1)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저들을 가리켜 죽었던 자들, 즉 죽음을 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께서는 하나의 생명을 위해 온 생명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들은 세상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할 도구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세계를 광대하게 펼쳐놓으셨는데 우리들은 손 안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눈곱만한 성취에 도취되어 삽니다. 창조주께서는 기묘와 신비로 가득한 세계를 만드셨는데 우리는 어린 시절에만 잠깐 호기심과 의문의 복된 삶을 살뿐 이내 곧 먹고 쌓는 일에만 코를 박고 삽니다. 도시의 미학에 갇혀 살고 아파트의 편안함에 갇혀 살고 자동차의 편리함에 갇혀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는 끝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며 새롭게 펼쳐지는 경이의 세계입니다.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해야 할 것들로 가득한 진리의 세계입니다. 신비와 다채로움으로 가득한 풍요의 세계요, 한없이 깊고 오묘한 심오의 세계입니다. 하여, 인생의 산은 결코 정복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삶의 지평은 너무 좁습니다. 한없이 지루하고 단조로울 정도로 빈한합니다. 누추하고 천박합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깊이와 진리의 풍요로움에는 관심이 없고 각종 심심풀이로 삶의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해갈하려고만 합니다. 각종 오락, 게임, 스포츠, 문화 활동들이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심심풀이를 만들어 공급하는 일들이 갈수록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펼쳐놓은 삶의 경이와 신비는 사라지고 인생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라는 체념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고지론의 이면
교회는 어떤가요? 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한국교회에 소위 ‘고지론’이라는 화두가 화제였던 적이 있습니다. 김동호 목사가 코스타 집회에서 던진 메시지로부터 시작된 그 화두는 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뒤흔들었고, 지금도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지론’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는 문제가 많은데 그리스도인들이 요지경인 세상을 불평만 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변화시켜야 한다. 고지를 선점하는 진영이 전쟁에서 승리하듯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높은 자리로 진출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세상의 고지를 점령하라.’는 것이 소위 ‘고지론’의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높은 자리에 올라 사회를 변혁하는 일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썩은 정치판에 들어가서 선한 정치력을 발휘하고 정의로운 입법을 해야 합니다. 맑고 투명한 창의성으로 빛나는 아이들의 영혼과 정신을 쪼가리 지식 겨루기로 억압하는 학교에 뛰어 들어가서 교육시스템을 전환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런 꿈을 꾸고, 젊은이들에게 그런 비전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에 순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사리사욕에 매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매이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으로 무장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론’을 환영할 수만은 없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열심히 노력해서 다스리는 위치에 서라’고 말씀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해 힘과 권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힘과 권력으로 세상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었지 주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랑으로 피차 섬기는 공동체의 도(道)이었고, 주님이 실행하신 것은 십자가에 죽는 비움의 도(道)였습니다. 힘의 사용과 효율성 숭배를 삼간 것이야말로 주님이 선포하고 행하신 복음의 어리석음이요 독특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지론’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어리석음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복음과는 정반대되는 힘과 효율성의 논리가 깊이 배어 있습니다. 사실 힘을 가지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은 온 세상이 숭상하는 가치관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반공동체적인 문화코드입니다. 마귀가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더욱이 김동호 목사의 진심이야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고지론’을 듣고 가슴에 불을 지핀 사람들의 대다수는 인간의 성공 욕망을 청산하지 못한 채 ‘고지론’으로 자신의 성공 욕망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때문에 ‘고지론’은 매우 복음적이고 매력적인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성공 이데올로기처럼 우리 삶을 삶의 본질과 생명에의 충실에서 멀어지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극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를 양산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삶을 회복시키기보다는 삶을 저당 잡는 또 하나의 죽음 현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이면
‘고지론’과 함께 한국교회를 휩쓴 또 하나의 화두가 있습니다. 릭 워랜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고지론’이 한국산이라면 ‘목적이 이끄는 삶’은 미국산입니다. ‘고지론’처럼 ‘목적이 이끄는 삶’에도 일리와 설득력이 있습니다. 삶이란 근본적으로 목적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면에서, 또 목적이 분명하면 삶의 소중한 자산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면에서 분명히 유익이 있습니다. 바울도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결승선에 닿으려고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 일에 쏟고 있습니다. 되는 대로 사는 것은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9:26-27,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옳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 충실한 삶을 살 가능성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한 목적조차도 삶과 생명을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비도덕적인 악만 인간과 삶을 소외시키는 건 아닙니다. 도덕적인 선도 인간과 삶을 소외시킵니다. 그것도 매우 흔히.
한 가지 예를 살펴봅시다. 한 사람은 선한 뜻을 품고 대학 교수가 되기를 꿈꾸며 박사 학위를 했고, 한 사람은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서 박사 학위까지 공부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목적이 분명했고 한 사람은 목적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단지 공부하는 게 좋아서 박사 학위까지 한 것이지 박사 학위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목적이 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 것 같나요?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 과정을 공부한 사람은 공부하는 동안에도 행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고, 설사 행복하게 공부했다 하더라도 대학교수가 되지 못한다면 헛공부를 했다며 좌절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반면에 관심 있는 분야를 연구한 사람은 공부하는 내내 행복했을 것입니다. 대학교수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좌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드라이브도 그렇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동안 멋진 풍경도 보고, 아름다운 음악도 감상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드라이브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을 중시하는 드라이브는 피곤할 뿐만 아니라 드라이브의 즐거움을 놓치게 합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분명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목적에 집착하게 되면 삶이 목적에 종속될 수 있습니다. 목적을 성취하기까지의 삶이 소외될 수 있습니다. 뜻한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 패배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삶이란 본래 목표를 달성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은 목표에 종속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멋진 목표라 하더라도 삶은 개인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통로나 수단일 수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도 그렇습니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오늘을 위하여 있을 뿐입니다. 오늘이 쌓여서 내일이 되는 것이지 내일을 위해 오늘이 있는 건 아닙니다. 물론 찰나에 충실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일은 잊고 오늘에 파묻혀 살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을 내일의 발판으로 삼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동원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목적이 이끄는 삶’은 자칫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목적이 ‘삶’을 소외시키고 짓밟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죽음 현상을 넘어서기 위하여
그렇습니다. 삶을 위한 우리의 지혜와 처방은 대부분 삶을 위협하고 죽음을 살게 하는 모순을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을 향한 의지조차도 삶을 살게 하기보다는 죽음을 살게 하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삶이란 무엇으로 장식해야 하는 게 아닌데, 태초에 창조주께서 피조세계를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걸 보면 삶이란 분명히 그 자체로서 충분히 멋지고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는 위대한 선물임에 틀림없는데, 우리는 자꾸만 삶을 성취해보겠다며, 무언가를 통해서 삶을 멋지게 장식해 보겠다며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왜 살기 위해 죽음으로 치닫는 것일까요? 왜 삶에의 의욕이 죽음 현상을 부추기는 것일까요? 왜 우리의 애씀이 오히려 삶을 일그러뜨리는 것일까요? 아마도 죽음 현상에 몰두하는 것이 삶이 되어버린 매우 어리석고 오래된 상식과 관행 때문일 겁니다. 나눔과 흐름과 얽힘을 도덕적 가치로가 아니라 생명의 지극한 작용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지 못해서일 겁니다. 삶이란 고지를 선점하거나 목적을 성취하는 것 이상임을 알지 못해서일 겁니다. 삶이 위대한 선물임을 알지 못해서일 겁니다. 비교와 경쟁에 휘둘려서일 겁니다. 삶을 위해 삶의 일부에 집중하기 때문에 삶이 소외되고 죽음으로 치닫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돌이켜 삶을 통째로 보고 삶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면, 삶의 작은 일부인 성취가 아니라 성취보다 크고 본질적인 삶에 충실하게 된다면, 삶은 절로 행복의 노래 감사의 노래가 되어 창조주와 구원의 주님을 찬미하게 될 겁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정병선 목사님, 저도 엊그제 정용섭 목사님 묵상<꽃가루>을 읽다가 영화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떠올렸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도 영화 보는 내내 생명의 세계는 경이 그 자체이며,
그리고 내가 있기까지는 영겁의 세월동안 조성해 온,
생명의 연대가 있었고, 내가 지금 그 속에 낑겨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답니다.
이 영화 본 때가 마침 <기독교가 뭐꼬?>동영상 강의 진행중일 때인데, '생명' 말씀을 하실 때,
내가, 그리고 내가 경험한 생명의 세계는 아주 작은 퍼즐 조각이라는 것과,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런 생각에 정신이 아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먼지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존재, 그 존재가 훅훅 숨쉬는 '내'가 되어서 지금 이자리에 서 있다니요!
목사님, 저는 엊그제 아주 귀한 책을 한권 접했습니다.
영남신대 김동건교수님의 <빛, 공기, 색깔>이라는 책인데요.
일종의 병상일지 입니다. 부친이신 고 김치영 목사님을 병간호 하시면서
아들로, 동료목사로, 또 동료신학자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죽음과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적어 놓은 글모음집입니다.
병상대화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김동건목사님도 훌륭하시지만, 고 김치영 목사님의 탁월한 신학적 안목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한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신앙고백,
그것은 정말 무어라 형언 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몇번이고 눈물을 삼켜야했어요.
그건 제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었어요.
저는 몇번이고 禮를 갖추며 읽어야 했습니다.
특히 후배목사님들, 제자들과 드렸던 예배, 마지막 드렸던 성찬예배에서는
도저히 글만으로 대할 수 없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김동건 목사님 자신도 그 성찬예배에서 전에 경험치 못했던 '성찬'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시더라구요.
목사님, 쓰다보니 또 길어졌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중, '생명의 연대'라는 말씀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고 김치영 목사님 말씀 중에서도 '영적인 연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이 영적인 연대야말로 바로 '생명의 연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열흘만 있음 목사님, 또 뵙게 되네요.^^
오월의 빛, 공기, 색깔이 너무 아름답지요?^^
라라 드림
라라님의 댓글은 정말 하나의 글입니다요....
<빛, 공기, 색깔> 몇 년 전에 읽었습니다.
부자 목사님간의 신학적 대화, 삶과 죽음에 대한 대화가 인상적이었지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세요??
다비아의 글들도 섭렵하시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책을 읽지 않아서 항상 아쉬워했는데
이렇게 열심히 읽는 분들도 계시다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놀랍기도 합니다.
저는 올 들어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답니다.
이곳 산속으로 들어와 처음 맞는 오월인데요
정말 오월의 상큼함과 아름다움이 이런 줄 몰랐어요.
최곱니다.
요즘 같은 날은 정말 빈 손으로도 살맛?이 날 것 같아요.
빛나는 오월의 하루하루 금쪽 같은 날들,
맘껏 즐기세요. .....^^
목사님, 이미 읽으셨군요.
저는 첫 출판이 2000년도, 재판이 2006년도여서 많이 놀랐습니다.
2006년도에는 제가 홍성사 서점을 쥐방울 드나들듯 할 때인데,
제 눈에 전혀 띄지 않았거든요?
당근 저자 김동건 목사님이 뉘신지도 모를때였고요.
목사님, 만일 제가 이 책을 2000년도에 만났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왜냐면 제 투병생활은 온통 눈물뿐이었거든요?
아파서 울고, 힘들어서 울고..
"저와는 전혀 다른 낯선 한 분을 만났다.."
제가 고 김치영목사님을 대하면서 느낀 첫 소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 제게 예배의 은총을 주신 것은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감격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의 백미를 '예배, 성찬'으로 잡은 것 같습니다.
정말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가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 -저는 예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노교수님의 투병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책을 제 주변 분들에게 강추하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삶이 죽음에 임박해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 삶을 미리 끌어당겨 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목사님께서 위에서 말씀하신 우리가 허탄한 것에 이끌리는 삶에 천착하지 않고
살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시한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밖에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제가 또 목사님과 저의 '동병상련'의 주제를 가지고 말씀 드리게 되었네요.^^
목사님,
저 책 읽는 거 별루로 하는 사람이예요.^^
낼 우리 샘터교회 소풍가는 날인데,
언제 목사님과 산책할날 손 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아빠로서 현재의 생명을 담보로 한 요즘 아이들의 맹목적 희생이 늘 마음 아픕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인내.... 미래의 열매를 위한 씨뿌리기 과정... 이라고 서로를 속이고 있지만, 실은 부모들의 불안함이 직접 원인인 것 같은데요.. 오늘도 늦은 밤 학원에서 축 처진 어깨로 돌아오는 아이에게 '내일을 위해 저당잡히지 않는 오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목사님 글을 통해 생명이 느껴지면서도 한편 답답함이 몰려오네요...
그렇습니다, 나무 늘보님!!
답답함이 당연합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일을 오늘을 저당 잡지 않으면서도 오늘에 충실할 수 있는 실력,
정말 대단한 실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지요......
대부분 그 답답함이 힘겹고 또 그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에 쉬운 길을 택합니다.
죽음 현상에 몰두하는 오랜 상식과 관행의 대세에 휩쓸려 가는 거지요.
정말 쉽지 않지만 아이가 공부를 즐길 수 있도록 이끌어보심이 어떨지요??
좋은 대학이라는 눈앞의 목표가 아니라 삶과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천부적인 호기심을 일깨워보는 거지요.
그리고 피동적인 수업 듣기 중심에서 자기 주도적인 학슴 방식으로의 전환을 .......
다 큰 성인에게도 어려운 것을 말하고 있네요.
다만 답답함을 피하진 않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평화..
정병선 목사님!
요즘 읽고 있는 책 ("폴 투르니에의 치유")에서 막 접한 곳에
'생명,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
머리 속에선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는 자주 잊어버리는 명제이기도 하구요.
목사님의 "이면들"에 대한 분석이 정확하지만
우리들의 "고정되어진 상식과 관행"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요.
죽음의 현상에 몰두하지 않으려면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명(들)에 좀 더 가까이 가야겠단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곳엔 어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비온 후엔 과연 어떤 모습의 내일일까요?
며칠 전 동네 공원에서 찍은 들꽃 사진 한 장 붙입니다.
건강하시고 아름다운 날들이시길 바랍니다.
p.s. "고지론의 이면' 세 번 째 문장은 조금 수정하셔야겠습니다. 같은 단어가 되풀이된 듯 싶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