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믿음의 세계에 발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지탱해 준 한민족의 세계에서 빠져 나와 예수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어떤 세계를 보셨습니까? 우리의 뿌리였던 한민족의 세계에서, 오늘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세계에서 예수의 세계로 들어와 보니 뭐가 다르던가요? 무엇이 다르고, 얼마나 다르던가요?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바울은 유대의 세계에서 예수의 세계로 전환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안에서 뭘 발견했을까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예수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론 자체가 유대교나 로마의 일상적인 방법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유대교나 로마의 세계는 모든 것이 행위와 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였습니다.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의 척도였고, 힘이 지배의 원리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수 안에서 발견한 세계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의 행위나 힘으로 작동되는 세계가 아니라 믿음과 은총이 작동하는 세계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 받았으니”(V.1).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V.2). 바울은 받았고 얻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것들을 쟁취한 게 아니라 그냥 받았고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세계는 ‘받고 얻는’ 세계이지 ‘쟁취하고 취득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세계를 펼치신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출렁이던 바다를 잔잔케 하기도 했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말씀과 삶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일들이 다 가치 있고 굉장한 일들이긴 하지만 그런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은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쳤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 아니고, 귀신을 쫒아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위대한 능력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무력한 죽음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수동적인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무엇입니까? 모든 가능성의 막장이 죽음입니다. 희망의 불꽃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가능성의 막장인 죽음을 통해서 구원의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로마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인격과 도덕의 힘으로 세상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탁월한 지식으로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베푸는 신기한 능력으로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 순종하는 수동적 행위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비웃었던 죽음, 어떤 일도 해낼 수 없어 보였던 죽음,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 철저하게 짓밟힌 그 무기력한 죽음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세계는 이 세상과는 방법론 자체가 다른 세계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방법론으로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세계,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에 근거해 작동하는 세계가 아니라 ‘받고, 얻는’ 수동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 이런 세계가 바로 예수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십시오. 세상과 똑같은 방법론들이 가감 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전도했나, 얼마나 성경 읽었나, 얼마나 열심히 예배 참석했나, 얼마나 진심으로 기도 했나, 얼마나 헌금했나, 교회를 얼마나 성장시켰나, 전부 이런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 중심으로 교회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헌신과 열심을 강조하면서 종교적인 행위를 끝없이 반복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위대한 것을 성취하라고, 그 성취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부추깁니다. 예수의 세계는 능동적인 성취의 세계가 아닌데 교회는 대부분 능동적인 성취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에 초점을 맞춥니다. ‘받은 것’과 ‘얻은 것’에 빛을 비추는 게 아니라 ‘쟁취한 것’과 ’성취한 것‘에 빛을 비춥니다.
사실 우리가 쟁취하고 성취한 것은 별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과 얻은 것에 비하면 우리가 쟁취하고 성취한 것은 미미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영원한 것이고 썩지 않는 것인데, 우리가 쟁취한 것은 이내 곧 좀이 슬고 썩는 것들입니다. 최고의 권력이라도 순간이면 지나가고, 돈도 위험한 물건입니다. 아름다움도 한 때고, 지식도 돌아서면 죽은 지식이 되고, 명예도 믿을 게 못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말은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세상 모든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장로 대통령 뽑자는 것에서부터 총회장 뽑는 것까지 세상과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떨까요? 날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고 계신가요? 아마 교회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받은 것’과 ‘얻은 것’보다는 ‘쟁취한 것’과 ’성취한 것‘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자신을 평가하거나 자식을 평가하거나 동료들을 바라볼 때 거의 대부분 성취한 것을 통해 바라볼 것입니다. 성취한 것에 따라 으쓱해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의 세계일 수 없습니다. 예수의 세계는 작은 죽음으로 열린 세계이지 위대한 성취를 통해 열린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의 세계는 수동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이지 능동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받은 것에 근거하는 세계이지 성취한 것에 근거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들 예수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예수의 세계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 밖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와 바울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아픔이고 수치입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의 인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세계는 인간의 행동과 업적에 의해 작동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 사람의 행동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세계가 아니라 단지 받음의 세계라는 것,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것을 믿음으로 받는 세계라는 것을 뼛속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뭔가를 성취해서 예수의 세계에 기여해야겠다는 허망한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취한 그 알량한 것에 빛을 비추며 살지 않고, 예수 안에서 ‘받은 것’과 ‘얻은 것’에 빛을 비추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를 증명해 보이려는 허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받고 얻은 것에 감사하며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세계에 들어와서 뭔가 기여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받으세요. 여러분이 원하는 것 받아내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분이 주는 것 그냥 받으세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그분이 주시는 것이 훨씬 값지고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발견한 예수의 세계의 첫 번째 진실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발견한 예수의 세계는 비교와 경쟁의 세계가 아니라 용서와 화평의 세계였습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해서 나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살아남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쟁력을 키워야만 승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평화를 외치면서도 평화를 위해 총을 겨누는 세상이고,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진리로 심판하고 정죄하며 진리를 위해 전쟁을 일삼는 세상입니다. 예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불의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만한 자격이 없지만 당당하게 서게 해주셨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v.1).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의와 생명이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니요, 세상에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예수 안에서 사는 삶의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을 등지고 고독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면 됩니다.
하나님과만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끼리도 용서와 화평의 삶이 열렸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경쟁과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흑백 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생명을 홀로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생명의 세계를 보십시오. 모든 생명은 서로의 생명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자기만으로 살고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들풀 하나도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있고, 바람이 있고, 땅이 있고, 물이 있고, 벌과 나비가 있어야 풀 하나가 살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의 씨줄과 날줄이 얽히고설킴으로써 오늘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생명은 온 생명이고, 온 생명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모든 생명은 모든 생명에게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토록 아름다운 생명의 세계 속에 미움과 분열의 영을 집어넣었습니다. 악마 ‘devil’이란 단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devil’은 본래 ‘떼어내다’, ‘동강내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ollein’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악마의 본성을 복잡하게 얽힌 생명의 씨줄과 날줄을 해체하여 조각조각 동강내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얽히고설킨 생명의 줄을 잘라 해체하는 것, 관계의 그물망을 끊어 고립시키고 등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의 본성이고 사단의 본성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도 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하는데서 살인의 비극이 움텄고, 예수님도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르고, 해체하고, 담을 쌓고, 죽이는 대신 용서하고, 화해하고, 막힌 담을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를 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바로 이런 세계를 보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바울과 같은 세계를 예수님 안에서 보았습니다.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다른 버스를 타야 하고, 다른 음식점에서 밥 먹어야 하고, 다른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고, 심지어 다른 교회당에서 예배해야 하는 세계가 아니라 흑백 차별이 없는 세계,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푸른 잔디 위에서 함께 뒹굴며 뛰노는 화해의 세계가 진정한 예수의 세계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흑백 차별이 없는 예수의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세계를 살기 위해 비폭력 비무장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처럼 죽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인종 차별이 없는 세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싹이 나고 자라서 결국에는 흑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꽃을 피웠습니다. 킹 목사는 진실로 십자가가 뭔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은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으셨습니까? 만일 십자가의 은총을 입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분열을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미움은 십자가를 거꾸로 세우는 것이고, 분열은 가장 사단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가장 위대한 사건은 창조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창조와 십자가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상에서 용서와 화해로 나타났고,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의 제물로 죽었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엡1:10). 십자가는 모든 원수된 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화해의 절정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화평의 나라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화해의 축제입니다. 용서와 화해와 평화, 이것이 예수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세계를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용서와 평화의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평을 즐거워하고, 모든 생명과 평화를 누리는 은총의 세계로 들어왔습니다.
셋째로 바울이 발견한 예수의 세계는 환란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환란 중에도 기뻐하는 세계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세계를 만사형통의 세계, 축복의 열매가 가득한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안에서 발견한 믿음의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환란과 고통이 있는 세계였습니다. 참고 견뎌내야 할 짐이 있는 세계였습니다. 여전히 이별의 눈물이 있고, 병마와 싸워야 하는 고통이 있고, 실패의 쓴 잔을 마셔야 하는 잔인한 세계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수 안의 세계나 예수 밖의 세계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사실입니다(v.3).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나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환난을 만나는 것은 똑같은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우리 인격을 단련시키고, 연단은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모든 일에 대해 늘 깨어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생의 어려움을 다 막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엄마들은 아들을 치마폭으로 감싸 키우지만 우리 주님은 당신의 치마폭으로 우리를 감싸주지 않습니다. 환란도 당하게 하시고, 실패의 쓴 잔도 마시게 하십니다. 인생의 광야를 겪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우리만 광야로 내몰지는 않습니다. 친히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환난 가운데에도 함께하시고, 실패의 와중에도 함께 하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종말론적인 희망 속에 늘 깨어 있게 하십니다. 이뿐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v.5). 성령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무엇도 끊을 수 없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어떤 위험이나 칼도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 심지어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위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환난이 우리를 어찌하겠습니까? 환난이 우리 삶을 좀 흔들고 힘들게 할 수는 있겠지만 예수 안에 있는 것들을 어찌하겠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온갖 선물들을 어찌하겠습니까? 절대 흔들 수 없습니다. 환난보다 더한 칼과 죽음조차도 우리의 육신을 짓밟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강탈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은 백퍼센트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예수의 세계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 안에서도 암에 걸립니다. 예수 안에서도 실패합니다. 예수 안에서도 재난당합니다. 예수 안에서도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황당한 생각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예수의 세계는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만사형통의 세계가 아니라 암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웃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세계입니다.
바울이 예수 안에서 발견한 믿음의 세계는 받음의 세계였습니다. 하나님의 화평을 즐거워하는 세계였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세계였습니다. 예수 밖의 세계는 받음의 세계가 아니라 성취의 세계입니다. 용서와 평화의 세계가 아니라 경쟁하고 싸우는 세계입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세계가 아니라 환난을 피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허황한 세계입니다. 예수 안의 세계와 예수 밖의 세계는 이처럼 다릅니다.
우리는 이처럼 다른 예수의 세계로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준비가 잘 돼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의 세계에서 살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채로 들어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세계가 익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낯섭니다. 그래서 때로 힘들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뭐가 뭔지 몰라 혼돈스럽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흔들리지 마십시오. 받음보다 더 큰 성취가 없습니다. 화해보다 더 위대한 승리가 없습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온전한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 안의 세계가 예수 밖의 세계보다 훨씬 훌륭한 세계입니다.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멋지고 풍성하고 즐겁고 행복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 멋진 세계를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이 멋진 세계의 삶을 날마다 배우고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예수님의 손 부여잡고 예수님의 세계를 배우고 연습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세계를 묵묵히 배우고 연습하며 살아가는 인생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은 없습니다.
( '하나님 경험'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어르신 만난 체험처럼 간단하게 할수 있는 말이 아닌 줄 알지만
적당한 말을 선별 못해서 일단 이렇게 해도 제 맘을 아시리라 믿고 진행하겠습니다. )
* *
제 외할머니가 계십니다. 83세 되셨어요.
아마도 6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오신걸로 알아요. 완전 깡 시골 교회 권사님이세요.
아무도 오지 않는 시골교회, 항상 거쳐가는 교역자들만 잠시 있다 가시는 교회이지요.
우리 할머니는 정말 독실하다 못해 충성교인의 표본이셨습니다.
수십년동안 교회의 새벽종은 우리 할머니의 담당이셨습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받고 얻는 것' 보다 '성취하고 쟁취하는 것'에 대해 소리를 높이는 것에
전적으로 노출되어있는 바로 그 성도였습니다.
그 할머니께서 20여년전 한 딸을 병으로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작년 또 한 딸을 병으로 또 보냈지요.
그 슬픔으로 식사를 계속 안하시다가 큰 일 날뻔 했습니다.
인간적인 슬픔이야 그 상황에서야 누구나 예외일수 없겠죠.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장장 60년간을 십일조, 새벽기도, 봉사를 해왔는데
축복은 커녕 남편도 먼저 보내고, 큰 아들 맨날 장사 힘들다하고,
산자식은 어느 자식하나 맘편히 몸편히 사는 자식이 없습니다.
게다가 딸을 둘이나 앞서 보냈으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뒤에서 헛수고 했다고 흉보는 것같고, 뭔가 문제가 있나보다 비웃는 것 같아서
사람을 대면하는 것이 힘들고 그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시골에서 지금 사람들 피하고 숨어지내는 것처럼 계신다합니다.
정신적으로 죄많은 문둥병자가 되신겁니다.
인생을 걸고 교회와 하나님 앞에 충성과 봉사를 해왔고
'앞으로, 장차, 언젠가는...' 돌아올 줄 알았던 축복이
더이상 의미있는 '장차'를 기대하기 힘든 83라는 나이앞에서
사실상 이미 그 결산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니 허탈하고 혼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그 동안 그렇게 자신을 가르쳐왔던 목사들이 미운 것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입니다.
과연 수없이 그 교회를 지나쳐간 그 목사님들은 '얻고 받는 것으로 충분한 세계'를 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이었을까요?
그들로부터 배우고 따라한 우리 할머니는 .... 정말 하나님을 경험한 것일까요?
60년 세월만큼 쌓인 그 허탈감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값없이 얻고 받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이며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없는 전부라는 것을
할머니께서 아시고 마음에 위로와 평안이 있기를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뿐입니다.
우디님,
정말 길군요....ㅎㅎㅎ
그래요. 하실 말씀이 정말 많았던거죠.....
그동안 가슴 깊이 쌓여있던 ......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디님, 가신 후 이야기했습니다만,
사실 저도 같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왜 저토록 예수의 세계와 다른 이야기를 담대하게 확실하게 말할까???
백퍼센트 다른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보는 일견 맞는 이야기를 하는데 내용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 이상함....
문제는 그들이 악하다거나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하나님 인식이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정보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예수 안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세계를 깊이 천착할 영적 차분함이 없이
학교에서 수학 공부하듯이 공식을 외우느라 정신 없이 자라왔고,
목회의 현실에 주목하느라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를 정직하게 들여다볼 시선이 없었다고 생각돼요.
그러다보니 그저 외운 공식만 반복하는 것 외에 무얼 할 수 있겠어요??
사실 이건 우리 모두의 함정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이름은 달달 외웠지만( 태정태세문단세....하면서 말이지요)
그 왕들에 대한 이해나 그 시대를 이해하는 안목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신앙의 세계는 정보의 습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면에서 우디님의 고민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적 삶의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Doing Theology인 거지요.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목사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다시 통감합니다.
항상 진지하게 말씀을 읽고 들으시는 우디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이 밤, 우디님과 할머님께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목사님 생각을 이렇게 잘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 댓글이 제가 읽기도 너무 길군요. 없어도 내용상 큰 지장 없는 전반부는 지웠습니다.)
목사님의 설명을 읽다보니 다시 저에 대한 성찰의 내용으로도 읽히고요.
저 또한 생활의 현실에 주목하느라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를 정직하게 들여다볼 시선을 놓치고
그저 배운 공식 외우느라 그리고 그 공식을 내용 부실하게 남에게 적용시키느라
얼마나 부끄럽고 위험한 말들을 많이 해왔을까 하는 마음에 두려움도 생깁니다.
제 말들로 인해 시험에 들었거나 들 수도 있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목사님의 글을 항상 기다리며 잘읽고 있습니다 주위에 좀 알려서 같이 읽고 싶은데.. 그래서 언젠가 이글들이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정병선 목사님,제가 다니는 성공회 교회에서는 미사때마다 성서정과(Lectionary)에 따라 성서말씀을 제1독서(구약성서),제2독서(서신), 시편, 복음서로 나누어서 읽습니다. 평신도는 제1독서,2독서,시편을, 신부님은 복음서를 읽게 되어 있지요. 삼위일체 주일인 이번 주일(2010.5.30)엔 제가 전례봉사자로 제2독서를 맡았는데, 그날 읽은 서신 말씀이 로마서 5장 1절부터 5절이었습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는 성 바울의 신앙고백을 읽으며 하느님나라는 평화의 나라라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러한 깨달음을 되새김질하였습니다.
추신:벌은 모르겠는데 나비는 풀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어른벌레야 풀들을 수정시켜 대를 이어 살게 해주지만, 애벌레는 풀을 먹이로 하거든요. 배추흰나비가 화분에 심은 갓에 알을 낳아서 5월 한 달동안 정성을 들여 배추벌레들을 키웠는데, 갓이 뿌리만 남을 정도로 배추벌레들의 식성이 대단했습니다. 그래도 배추벌레가 번데기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될 때마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놓아줄 때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감탄합니다.
정병선 목사님,
어제 예배 인도하고
설교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바울의 영적인 경험이 참으로 놀랍지요?
"받음보다 더 큰 성취가 없습니다. "는 목사님의 표현이
바울 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존재지향적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겠군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영적 능력이겠군요.
오늘도 다시 이미 '받았음'을,
이미 거기 '있음'을 절실하게 느껴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