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섭 목사님의 책과 설교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갈구하며 믿음을 잃지않고 종말을 기다리는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또 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나름 이해하며 따르게 됐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종말'의 의미랄까, 중요성이랄까, 그런 것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어제(20일) 정 목사님과의 질답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의 좀 난삽한 질문에 목사님께서 현답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목사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다 더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저의 어제 질문은, 실존하는 개인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와, 하나님은 왜 계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다른 이야기도 있었지만, 질문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생각, 느낌을 말씀드린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은, 대체로 이런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통치 방식은 알 수 없다/알기 어렵다, 종말에 가서야 드러날 것이다. 목사님의 책과 설교 말씀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그 누구로부터의 영향도 받지 않으시고 홀로 계시는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은폐'하시고 '노출'하시면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것이고, 이제까지 인간의 역사에 있었던 일들은 '종말'에 가서야 그 의미를 온전히 획득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설명(?)을 (말 그대로) 완전히,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어젯밤과 오늘 사이, 좀 다른 생각이 듭니다. 정 목사님의 말씀 혹은 해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질문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꼭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어제 정 목사님의 답변 가운데 이런 말씀도 있었습니다(녹음한 것이 아니기에 정확한 단어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지만, 종말이 와야 알 수 있지만, 우리는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이 부분은 정확한 워딩은 아닙니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 국가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부합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조심스러운 질문은 이것입니다. 목사님의 언술에 미묘한 긴장 또는 모순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거기에 맞게 사느냐는 기본적인 질문도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지금의 우리가 성경과 (설교 등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석하고 행하는/실천하는 것들이, '종말'에 하나님께서 보이실 그 뜻에 맞다는 것을, 무엇이 담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좀 과격한(!) 예를 들자면, 카톨릭 신부님들과 기독교 목사님들을 포함해, 불교와 원불교까지도 '생명 파괴'를 이유로, 즉 하나님(신)의 섭리에 어긋남을 이유로 반대하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과연 '종말'에 하나님께서도 반대하는 것이 맞다고 하실 수 있는지를, 우리가 감히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냐,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니, 생명을 죽이는 4대강 사업은 당연히 반대하시지 않겠느냐고, 설명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과연 그러냐고 되묻는 것입니다(제가 '4대강 사업'에 찬성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봐도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도 자주, 종종, 인간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살펴보면, 그런 부분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인식과 사유,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고,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본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정 목사님의 말씀도 그런 것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말 심각하게 자리잡습니다. 위의 예보다 좀 더 급진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과연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또다른 조심스런 질문이 나옵니다.
역사를 생각해봐도 비슷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제까지의,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역사는, '종말'까지는 모두 잠정적입니다. 역시 '종말'에 가서야 그 참된 의미가 드러나리라 믿습니다. 불안과 긴장, 모순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역사에서 옳다, 맞다라고 지지했던 것들이, 또 틀리다, 그르다라고 손가락질했던 것들이, '종말'에는 전복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또다른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박정희와 전두환, 이명박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혹은 그들이 그르지 않다라고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어제 십자군 전쟁을 잠깐 말씀하셨지만, '종말'에는 인간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십자군 전쟁이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 목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면서도, 긴장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칫 '종말'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종말'에야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인간의 상식과 판단으로 접근하고 잴 수 없다는 점이, 우리 삶의 좌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우리 삶에 불안을 더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너무나 커서 알 수 없는, 인식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활기를 주시고 소망이 되시기보다, 알 수 없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때로는 무시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질문입니다.
여기서 기도, 믿음, 신뢰 같은 설명이 시도될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다고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질문 드립니다.
글을 올릴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아이도 아픈데, 그런 고민까지 할 겨를이 있냐,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까 싶고. 저도, 이런 질문할 시간 있으면 기도를 더 하자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신앙을 위해 여쭈보고 말씀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다비아와 서울샘터교회를 알면서 놀랐습니다. 목사님께 질문도 할 수 있다는 게, 참 고맙습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 이 조심스런 질문에 대한 말씀은 듣고 싶지만, 제가 이 질문들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거나 어떤 의혹에 잠겨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서 질문 드린다기보다, 이 질문을 통해 제 신앙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어제에 이어 또 난삽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도님들과 정 목사님의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sola gratia
정 목사님, 감사합니다(그것도 빠른 답변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노숙자의 한 명인 저에게 정 목사님 말씀의 좋은 점은,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알려주신다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설명을 잘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님의 자상한 설명이 다 납득되는 건 아닙니다. 이해는 하고 알아는 듣겠는데, 체화가 안 된다고 해야할까요? 그렇다고 목사님 말씀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을 유보하고 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면서 오로지 '종말'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 현재 나(우리)의 삶에 묘한 긴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네요. 특히 삶의 바람직한 상(아마 '이데아'일 수도 있겠지요)을 모르는 채 바람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불안이 떠오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되는 한편, 그것이 '종말'에 뒤집어질 수 있다는 걱정을 떨굴 수 없습니다.
목사님, 기왕 여줘본 거, 우문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에게 어떻게 하시면 임하실까요? 정말 절실하게 여쭙니다. 뛰어난 영성이 필요한가요? 늘 경건하게 살아야 하나요? 저는 때로 속된 자입니다. 성령님께서 은사를 주실까요? 저도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해 영원한 진리를 깨닫고 싶습니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성령님의 진리를 제게 '육화'하기를 소망합니다.
정 목사님, 늘 건강하십시오. 그래서 어리석은 저에게 귀한 선생님이 돼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sola gratia
어떤 신앙적인 사안들, 그러한 질문이나 논란들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요? 모든 일들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아마도 지난 2천년이 오기 이전에 기독교적인 논란들은 벌써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두는 "답안지"를 손에 쥐고 간간이 그 내용이나 재삼 재사 확인하면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영적인 휴식을 취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예(초대교회 시대)나 지금이나 신앙적인 논란들은 하나도 변함없이 여전한 것으로,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데 우리의 고민 / "십자가"가 있는 것일까요?
신앙적인 질문들에 확언적으로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각자가 자신의 신학 / 신조 / 자신의 해석(성서적 시각에 기초한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 혹 누군가가 성서에도 없는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되겠습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의 조심성이 요구되고 있는 어떤 시작점 / 기준점일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질문하고 계신 이러한 사안과 관련하여, 이 분의 이러한 견해 / 신학적 시각을 참고하시라고 귀뜸해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 http://www.lamp.or.kr/zb41/zboard.php?id=net_sermon
* 위 본문의 사안과 관련하여서는 특히 위 강해 사이트의
글번호 #1987(산상수훈 2010.5.9)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
우리의 예수는 처음부터 세상을 향해 외치셨고
또한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외치고 계십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우리가, 아니면 우리 중 그 누구가 과연 원초적인 주님의 이 설교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을까요?
그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넉넉히 설명할 수 있었던 신학자 / 설교자가 과연 세상에 있었을까요?
이 명제의 해결 위에 기초되지 못한 더 복잡한 '신학적 질문과 답변들'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김정환 님,
성령 경험의 방법,
또는 성령 임재의 증거를 알고 싶다는 거지요?
<세상은 마술이다> 168-179 쪽에
성령에 대한 글이 세편 나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답니다.
아무도 성령을 소유할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생명을 일으키는 영을
우리가 무슨 수로 규정하고 재단하고 처리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사이이 성령론자들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
큰 소리 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죠.
지금 김정환 님이 기독교의 근본을
정말 간절하게 알고 싶어 하시죠?
그게 바로 영의 활동이랍니다.
이미 영의 활동 안에 들어오신 거에요.
더 확실한 거를 워하시겠지요?
더 뜨겁고 분명하게 확신이 가는 경험말입니다.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어요.
1) 그런 경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걸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은 이단에 가깝습니다.
선승불교에서 화두를 붙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확실한 대답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대답 너머의 더 근원적인 질문의 신비로 들어가려는 것이에요.
인간에게서 성령에 대한 절대적인 경험이 없다는 뜻과 비슷한 거에요.
2) 성령 경험은 생명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더 생각해 봐야겠지요?
3)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말해야겠네요.
성령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것입니다.
너무 뻔한 대답같지요?
그렇지 않답니다.
역사적 예수가 인류 전체와 우주 전체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은 생명 총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2006년10월22일에 쓴 신학단상을 링크해 놓겠어요.
참고하시길.
김정환 집사님,
집사님께서 이렇게 질문해 주심으로 저희들에게는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 모른답니다.
사실 저는 목사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어도 버벅대느라 제대로 질문을 드려 본적이 없어요.
집사님께서는 어제 이어 오늘도 '조심스러운' 질문이라고 하셨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집사님이 많이 부럽습니다.
도희로 인해 집사님께서 큰 은총을 경험하시는구나, 싶어서지요.
물론 집사님뿐이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일지도요.
엊그제 목사님의 댓글 기억하시지요?
" 지금 도희가 겪고 있는 고통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믿음의 끝자락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계획하고 계실까요?"
집사님, 주님은 지금 우리 모두를 도희를 통해서
'당신에 대해서' 질문하시도록 인도하시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더불어서,
목사님의 답변의 글에서..
"기독교 신앙은 진리와 그것의 인식에 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우리의 인식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시는 계시에 근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 "
제 오랜 숙제 였던 '신탁'의 문제가 풀렸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라라 집사님, 넓은 마음으로 제 질문을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저의 '조심스런' 질문이 집사님에게 도움이 된다면 저도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진 예수만님의 말씀은 잘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생각을 조금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저의 질문은 신앙이냐 신학이냐라는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유한한 인간의 인식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제 질문은, 이성에 기반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정 목사님이 책과 말씀에서 반복해서 강조하셨듯, 신비, 계시, 믿음 등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받아들입니다. 인간인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게 결코 아니니까요.
다만 저의 '조심스런' 질문은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종말'의 신앙이, 상대주의적인 영역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상대적인,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이 긴장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진 예수만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답'을 내놓으라는 게 아닙니다. 정 목사님이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어떤 인간이 '대답할 위치'에 있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박한 생각은, 그래도 질문은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심화'될 수 있고, 하나님의 통치의 신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sola gratia
아내가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웁니다.
일어나라 아침이다.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찬란한 태양이 떠 올랐습니다.
지구는 여전히 자전과 공전을 멈추지 않고 낮과 밤을 통해 그 시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에 대한 감사,
삶에 대한 기쁨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을 느낄 수 없을 때 가장 가까이 와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치와 기쁨과 평화가운데로 이끄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찬양드리고 싶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정환 집사님.
주일 예배 후 처음으로 인사드린 이경엽 입니다.
침상의 도희를 보며 고통이 말할 수 없이 크실 텐데...
마음으로 나마 위로에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 주위에 계시는 분들 중에도 도희와 같은 병으로
가족들 모두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고통과 그에 따른 번민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나 집사님이 도희를 위하여 기도요청을 했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코 끝이 찡한 무엇인가가 전달되었습니다.
도희의 쾌유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폐는 종말에 밝히 드러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온전히 밝히실 하나님이
역시 현재에도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 분의 뜻을 보이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언어를 통하여 존재를 밝히시고, 환경을 통하여 언뜻 언뜻 내 보이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종국에 가서 손바닥 뒤짚듯이 엎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사람이야 지금까지의 신뢰를 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성경을 통하여 알게된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겠지요.
저의 위 말이 집사님께는 좀 답답하게 들릴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도 다비아에서 초신자와 같은 입장입니다.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 다비안님들의 글에 매료되어
아둔한 생각을 정리하고 파 댓글을 달아봤습니다.
집사님 힘내세요!
도희 아빠의 질문 덕분에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웁니다.
아빠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해준 도희가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도희의 아픔을 늘 기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제가
이런 중보의 결단을 하게 된 것
또한
성령님의 활동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 잠시 해봅니다
힘 내세요
저의 우문을 책하지 않으시고 알아듣게 말씀해 주시는 목사님과, 조언을 아낌없이 주시는 성도님들께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물음에 많은 답 혹은 더 많이 생각할 것들을 주셨습니다. 진 예수만님의 말씀처럼 어디에, 누구(사람)에게 정답이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을 뿐이지요. 고맙습니다. 종종 여쭙고 도움말씀을 청하겠습니다.
도희를 위한 기도, 꼭 부탁 드립니다. 진통제를 늘려서 쓰고 있는데도, "지금 진통제 들어가고 있냐"고 묻는다고 엄마한테 전해듣고,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싶어서, 마음이 너무 찢어집니다. 마음이 타들어가서 까만 재만 남는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기도 부탁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sola gratia
김정환 님,
좋은 질문을 이어서 주셨네요.
'조심스럽게'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시는데,
김정환 님은 원래 조심스러운 분이래서
그렇게 조심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주신 질문은 나도 똑같이 느끼는 질문이에요.
내가 대답할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김정환 님과 똑같이 질문할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목사이고 선생이니
한 마디 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겠지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판단을 종말로 유보한다면,
여기서 궁극적인 질문은 예컨데 무죄한 자의 고난 같은 것인데,
지금 여기서 옳고 그름의 판단은 무의미해지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이지요?
어제 대답을 하면서도 그 대목을 한번 짚어야 할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시간을 살피다가, 그리고 이야기를 해나가다 놓쳤습니다.
일단 우리 인식의 종말론적 우위성은
김정환 님도 동의한다고 했지요?
지금 우리가 종말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잠정적인 인식의 한계를 안고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거지요?
기독교 신앙은 진리와 그것의 인식에 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우리의 인식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시는 계시에 근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약간 늬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신약도 역시 계시를 말하는 것은 비슷해요.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과 역사 안에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탁(oracle)이라고 합니다.
바른 신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참 예언자이고,
거짓 신탁을 경험한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이지요.
무엇이 참된 신탁, 또는 계시이고,
무엇이 거짓 신탁, 또는 계시인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또 궁금하지요?
다시 김정환 님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성령의 활동과 우리의 인식을 설명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나가기는 힘들겠네요.
중간을 뛰어넘어서 결론 부분을 말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진리를 인식하거나
무엇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일에 순종하는 것뿐이지요.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지요.
그리고 모든 것을 그분의 마지막 심판에 맡기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 가라지가 아니라 알곡에 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오해는 마세요.
지금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우리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지금의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진리의 영에 개방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무엇인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판단도 궁극적으로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족-
지금 김정환 님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기세좋게 파고 드는 중입니다.
그런 고민을 아는 사람만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신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