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Views 2604 Votes 1 2010.07.13 23:21:43

 

     고은 시인의 연작 시 <만인보(萬人譜)>가 전 30권으로 완간되었다는 소식을 그대도 들었소? 25년에 걸친 역작이오. 고은 시인이 계간지 ‘창작과 비평’ 이번 여름 호에 이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적었소. 그중의 일부를 여기에 인용해보겠소.

 

     1930년대 후기로부터 기억 속에 쌓이기 시작한 어린시절의 고향 혈친이나 이웃 삼이웃의 세상에서 시작한 만인보가 1950년대 전쟁시기의 격동이나 그 이후 4월혁명 전후, 그리고 1980년대 이래의 광주민중항생 등 여러 변동의 세월에 담긴 인간상의 자취를 거치는 동안 그들 각자의 중단된 삶의 상상적 연장이나 재생을 통해 삶이란 하루만의 단일성 이상의 복합서술이요 요구됨을 깨닫게 마련이었다. 또한 역사 속의 군상들은 그것의 현재화를 통해서 현재의 삶으로 재생되어야 할 터였다. 요컨대 진혼이 아니라 진혼 이후이다.(322 쪽)

     어쩌면 나는 내 글을 나 아닌 타자가 쓰는 것을 꿈꾼다. 이런 지향은 최근에 더 두드러지고 있다. 삶이란 사는 것 이상으로 살아진다는 깨달음,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씌어진다는 것에의 번뇌와 함께 하는 만인보 안의 명멸하는 시의 화자나 시 바깥의 작자는 그 이상의 존재인 어떤 타자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323 쪽)

     만인보 30권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나는 이것이 어서 과거의 책이기를 바라며 이것이 어서 타인의 것이 되어 나로부터 동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어제의 나로서 내일의 나로 일관되기를 거부한다. 내일은 다른 나의 새로운 세상이고자 하는 것이 내 시의 행로이다 변(變)은 불변(不變)으로 저물고 불편은 반드시 변으로 빛난다.(325 쪽)

     인간의 삶이 그 삶의 터전인 땅 자체로 총칭될 때 땅에 쓴 글씨라는 의미는 하늘의 의미마저 땅의 일로 깃들이게 마련이다. 당연히 만인보의 의미도 거기 있어야 한다. 어느덧 안의 노래가 밖의 노래로 나래쳐 가뭇가뭇 떠돌고 있다. 떠돌거라. 떠돌다가 어느 나라의 삶으로 태어나거라. 이로부터 내 알 바 아니다.(325 쪽)

 

     고은은 지금 한국인으로서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시인이오. 김지하 시인도 물망에 오를만하지만, 그랬을지도 모르고, 경우에 따라서 현실감이 떨어진 너무 고차원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터에 좀 멀어진 것 같소. 박경리 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셨다면 고은 보다 더 근접했을 것이오. 이런 시인과 소설가를 대한민국이 배출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하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적인(동양적인) 세계관과 정서를 바탕에 깔고 삶의 아득한 경지를 말한다는 것이오. “이로부터 내 알 바 아니다.”(2010년 7월13일, 화, 낮은 구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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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아

2010.07.14 09:24:37

딸이 졸업후 이곳 저곳으로 직장을 알아보다

델리만주 미국지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첫출근을 하고 자고 일어나 전화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좋고 비전도 있고

배울 것이 많고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끝에 이제 봉급을 받게 되었으니

아빠 소원들어 주어야 하겠다고 하며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시집을 갈때까지만이라도 살아있으라고 하더군요.

아빠의 역할을 거기까지는 해달라는 이야기인 듯 하였습니다.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하루를 선물로 받는 이 아침에

고은 시인의 글을 읽으며

정말 이 땅의 그 어느 것도 나의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내 몸, 호흡기속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바람 그리고 이 글..

 

내 것 아닌 언어가 내 안에 들어와 맴돌다가

내 손을 빌려 이 글로 이 땅에 태어나

댓글 등록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내 손을 떠나 또 다시 자기 길을 바람처럼 걸어갑니다.

읽는 사람들은 각각의 처한 상황에서 이 언어와 대화를 하겠지요.

 

바람처럼 가볍게.

구름나그네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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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2010.07.14 23:56:55

선교사님, 저는 이 글을 읽자 마자 파하하 웃었다는 거 아닙니까?(죄송해요^^)

은혜양과 선교사님이 어쩜 저리 국화빵일까 해서지요.

은혜양이 무지 성숙하네요. 아빠 의중을 단박에 알아차리니 말이지요..

선교사 아빠의 깊은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것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네요.

 

글구.. 선교사님, 모처럼 선교사님 한테서 인도향기 맡아보네요.

구루냄새요..ㅋㅋ(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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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2010.07.14 11:29:46

오늘의 묵상글과 사 땨님의 댓글이

삶에서 보이지않게 나를 잡아두는 거미줄과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는 기미들을 느끼게 하는군요.

고은 시인의 글을 보면서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를 남기고 그것이 고형된 형체화가 되기를

무수하게 시도하는 것과는 다르게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불어다니는 느낌,

성령의 활동상과 유사하게 되어가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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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2010.07.14 21:48:02

만인보가 나온지 몇달전에 신문에서 본것 같아요... 만인은 안되고 4천인정도 된다는것으로 기억합니다.  안타깝습니다. 목사님도 그곳에 들어가셨으면 좋으련만^^ 근데 그런것은 마주대하면 질려서 못 읽을것 같아요...

비오는저녁

2010.07.18 11:09:19

내 안의 노래가 가뭇가뭇 떠돌다가,

떠돌다가

어느 나라의 삶으로 태어나는,

이로부터 내 알 바 아닌,

원래부터도 우리네 알 바 없는 삶이라면,

 

최소한 남의것 빼앗아 나라 불리고

경쟁이 교육의 모토되는 세계관은 되지 않으리. 

 

(고은이 글로벌(?)하게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시인임에는 마다할 일 없으나,

노벨상 갖고 황석영과의  행보는 좀 촌스럽다.   그 사람됨과 따로 노는 업적이나 재주를 늘 의심쩍어 하는 나도 참

거시기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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