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어렴풋하게나마 그게 눈에 들어오오? 그걸 알고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오. 그걸 완전하게 아는 사람은 없소. 나도 사실은 모르오. 죽는 순간에라도 그걸 알면 다행이겠으나, 쉽지 않을 거요. 지난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위대한 종교인들이나 철학자들이 나름으로 삶에 대해서 말했지만 어느 것도 딱 부러진 대답은 아니었소.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거요. 오해는 마시오. 예수님도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는 뜻은 아니오. 삶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궁극적인 것이라는 뜻이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대에게 잘 전달되리라 믿소.
편안하게 생각해보시오. 삶이 무엇이오? 자신의 본능이 요구하거나 사회가 강요하는 것들을 일단 표면적으로라도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긴 하오. 공부하고, 돈을 벌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 것들 말이오. 그런 것들을 삶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삶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소.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성취했다고 해서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오. 오히려 거꾸로 생각해야 하오. 그런 것들을 성취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축소되는 거요. 쉬운 예를 들겠소. 고급의 먹을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삶을 확인하는 중요한 요소요. 매일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세 끼니를 해결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오. 배부르면 밥맛이 나지 않는 거요. 밥맛을 모르면 결국 삶의 축소되는 거요. 이게 우리 인간이 삶 앞에서 겪어야 할 근본적인 딜레마라오. 삶의 조건들을 풍요롭게 만들면 만들수록 삶의 내용들은 빈궁해진다는 거요. 이게 말장난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오.
삶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소. 그것에 대해서 생각은 해야겠지만 생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했듯이 아무도 완벽한 대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오. 최선의 길은 삶에 밀착해서 사는 것이오. 삶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삶에 밀착해야 한다는 말이 모순처럼 들리오? 그렇지 않소.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추수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섞여 있소. 삶의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 삶의 알맹이와 껍질은 뒤섞여 있소. 껍질은 멀리하고 삶에 밀착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이오. 삶의 알맹이와 껍질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을 거요. 그걸 구분하는 능력이 영성이오. 우리가 삶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껍질이 무엇인지는 구분해낼 수 있소.(2010년 9월6일, 월,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