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의 글에서 설교는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소. 그것이 오해의 소지가 있소. 공부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로 들리면 곤란하오. 설교 공부가 왜 필요 없겠소. 다만 그것을 기술이나 방법론의 문제로 여기지 말라는 뜻이었소. 설교만이 아니오. 모든 공부는 ‘지시하는’ 진리에 영혼을 여는 일이오. 진리가 지시한다는 말은 진리 자체가 가르친다는 뜻이기도 하고, 진리가 계시된다는 뜻이기도 하오. 성서텍스트 자체가 말을 한다는 뜻이오. 설교자의 첫 걸음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오.
그대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오, 아니면 설교를 듣는 사람이오? 어느 쪽이든지 오늘 성서텍스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설교자들이 드물다는 것은 인정하실 거요.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창조적인 설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것의 증거요. 기도를 쉬지 말고 하자거나, 끈질기게 기도하자고, 또는 기도로 축복을 받자는 말에는 열을 올리는데, 기도의 응답이 없는 사태에 대해서는 말 할 줄 모르오. 설교의 상투성은 지금 극에 달했소. 결국 선정적인 예화에 기울어지거나, 심리적인 자극에 힘을 쏟고 있소.
그대는 분명히 알아야 하오. 성서는 세상살이나 종교생활을 위한 처세술이 아니오. 표면적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다른 것이 있소. 성서텍스트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에 머물 수밖에 없소. 당연한 것 아니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소. 이건 설교자에게 불행한 일이오. 많은 설교자들이 영적인 소진을 경험하고 있소. 사람은 창조적인 일이 아니면 결국 영혼이 살아날 수 없는 법이오. 종교적인 처세술을 매번 설교한다고 생각해보시오. 듣는 사람도 지겹고, 말하는 사람도 지겹소. 글이 잘 되지 않는 소설가나 시인은 절필을 할 수 있지만, 설교 영성이 고갈되었다고 하더라도 목사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오. 어찌하면 좋겠소? (2010년 10월4일, 월, 구름 오락가락)
설교 영성의 고갈은, 아마도 목회자 자신과 교회가 공동으로 초래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성서와 교회를 인격으로 보지 않고, 기능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겠죠.
얼마전에 ㅅ 교회 ㅈ 목사님의 사건이 보도되고, 적지않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충격받은것이 아니라, 당회의 결정이 충격이었습니다.
3개월 설교정지에 6개월 수찬 금지.
징계 기간이 생각보다 짧은 이유가 나왔는데, 이미 한달정도 설교가 사라지자 교인 1000명가량이 줄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회에서는 가급적 목사님이 빨리 돌아오길 바라고 있더군요.
당회에서는 목사님을 전혀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을 한명의 치유되어야할 인격으로 보지 않고, 교인수를 채워주는 설교 '기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을 한 게지요.
토로하신 문제점들은 아마도 목회자 자신이, 교인들 자신이, 교회 생활을 '인격'으로 다가가지 않고, 이렇듯 '기능'으로 다가가기 때문일겝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성서의 말씀을 인격으로 다가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만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린 기도할 수 있고, 기도는 우리가 실재로 성서와 교회를 인격적으로 접근하는 첫 단추입니다.
(물론 이것마저도 한국교회에서는 하나의 기능이 되었습니다만...)
오늘 따라 책꽂이에 꽂혀있는 마더테레사의 책 제목이 눈에 많이 들어오네요.
마더 테레사 :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