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섭 목사님!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친구 집사가 주일예배를 소흘히 여깁니다.
무슨 말로 권고해 주면 좋을까요?
주일에 등산을 간다든지
동호회 모임 때문에 자주 빠지거든요.
볼 때마다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요.
주일을 빼먹는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순 없지만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서요.
"주일을 빼먹는다고 구원을 받지못한다"
자신의 모든 삶을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야하는 성도가
일주일중 하루 주일 하루도 온전히 지키못하고 살면서 구원을 받는다니요..
당연히 구원받지 못합니다. 저도 집사입니다만 솔찍히 말씀에 비추어 저의 삶을
보며 구원 받기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주일을 지키는 일은 기독교 신앙의 시작 입니다.
일주일중 6일을 내 먹을 것과 입을것을 위해 살았다면 최소한 하루만 이라도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안식하라는 의미 이지요.
이 의미가 확대되고 성화되어 "안식년"의 규례가 나오는 것 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 재물, 노예, 곡식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일년동안 요구하신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받은 가장 큰 죄악입니다.
주일하루도 못지키면서 자신의 온 삶을 주를위하여 온전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여 버릴수 있을까요?
친구에게 해주실 말씀요^^ 주일 성수도 못할것 같으면 아야 구원은 포기하시라고!!
아마 이게 진리일 겁니다.
주일성수에 관한 신학적인 말씀들은 다비아 어딘가에 많이 있겠지요?
저는 신학적인 용어사용은 다른 분들께 기대하고
아주 단순하고 유치한 생각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어지간한 일로는 주일 예배 제치고 싶지가 않습니다.
주일 예배시간이 좋고 기다려집니다.
살면서 주일 예배 빠진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도 못할것 같으면 아예 구원은 포기하시라고!! " 와 같은
코람데오님의 권고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신자에게는 주일 성수가 보장되지 않는 일은 처음부터 성경적으로 악한 직업이 됩니다.
예를 들면, 소방구조요원, 군인, 경찰, 경호원, 의사, 운동선수, 간호사, 빌딩 관리기사, 서버관리자, 운전기사, ...
그렇다면 주일날 화재시에 신고해도 안되고, 아파도 주일에는 응급실도 안갈 것이며,
주일에는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말아야하고, 주일에는 서버가 운영중인 인터넷 사이트에도 들어가지말아야 합니다.
코람데오님도 본인이 서버관리자가 아니더라도 주일날 열심히 데이터센터에서 서버관리하는 사람의 덕에
운영중인 사이트에는 주일날에도 들어가지 말으셔야합니다.
주일에 도둑이 들거나 강도당해도 신고는 월요일날 해야하고요.
우리 동네 개인병원에서는 격주로 주일날 오전에도 진료를해줍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동네 부모들은 그 병원에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모릅니다.
저도 너무너무 감사하고요.
제가 병원의사라 해도 주일예배 격주 빠지더라도 그렇게 운영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힘들어서 못할거에요.
예수님이 안식일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했으니,
생명과 관련된 직업은 예외가 된다고 한다면 직업자체가 선악이 구분 될 수도 있겠네요.
기독교 신앙 위에 제대로 서서 가고 있다면 주일공동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놓게 된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주일성수 못하면 구원을 포기하라는 것이 진리라 선언하신 것은 바른 이해라고 보지 않습니다.
친구집사가 주일예배를 소홀이 여기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주일예배가 아직 그 분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한다고 봅니다.
이유가 있겠지요.
주일성수, 십일조, 온갖 봉사, 등등...
이 모든 것이 율법이지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 말도 안돼지요.
주일성수와 구원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에 올인합니다.
(감히 이것은 제가 언급할 문제는 아니지만 질문이 있기에 성경에 근거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린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살다보면 잘 안되지만 말입니다.
주일 하루만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모두 알고 있잖아요.
이렇게 사는 우리들이 일주일 중 하루 함께 모여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주일입니다.
왜 이날 모이느냐.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날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살면서 하나님을 잊고 살거나,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지 못할 수도 있기에
특별히 이 날을 정해놓고 가능하면 서로 모여 예배드리자는 것입니다.
주일성수 안하면 , 무엇 안하면 구원을 못받는다. 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말일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행위를 해서 얻어지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면
잘못된 생각일 것입니다.
우린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랑하고 찬양하고 경배할
마땅한 의무가 있는 것이고, 이것이 곧 하나님을 믿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어찌보면 구원은 우리가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이니까요.
누구에게 넌 이러이러해서 구원 못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행위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모든 성도의 의무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못간다 하더라도 어느 곳에서나 주님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주일을 지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만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 아니니까요.^^
우디님, 눈사람님 제 글의 행간을 좀더 깊이 이해 하실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우디님 말씀에 모두 동감 합니다.
우디님은 제 글의 전후 문맥과 질문자이신 오메가님의 친구분의 주일을 지키지 않는
신앙 상황에 관한 언급은 제외한체 단순히 "주일 성수도 못할것 같으면 아예 구원은 포기하시라고!! "
라는 글을 인용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다시 제 글을 정리해 드리지요..
주일을 지킨다는 말의 본질은 "욕심대로 살지말라" 나아가서는 "사랑을 실천하라"
라는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식의 근본적인 의미이며 나아가 주일의
의미입니다.
요즘 되먹지 못한 목사들이나 신학 교수들이 안식년 지킨다고 월급받고 일년씩 노는걸 봅니다
안식의 기본 개념도 없는 목사나 신학자들 입지요..
우디님의 말씀대로 어쩔수 없이 일요일날 직장가야한다면 가야죠 그러나 평생 성도들과 예배를 할 수 없는
직장이라면 그문제로 심각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그삶이
주일성수의 본질적 의미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라면 제 생각에 구원이 결코 멀지 않을 것
입니다..
그리고 눈사람님
성경어디에 구원은 행위로 얻는것이 아니라 했나요?
되게 궁금 합니다.
구원이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공짜 은혜라구요^^
성경어디에 그런 말이 있나요?
바울서신들에 전후문맥 다 없애고 한 문장만 가져와서 20세기 언어 감각으로 보면
눈사람님처럼 바울의 편지를 오해할 만한 구석이 있습니다만. 베드로도 이부분을 상당히
경계했었습니다..
그리고 "넌 이리이리해서 구원 못받는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권한을 침번하는 행위라
말씀 하셨는데 눈사람님 정말 요즘 한국 기독교가 웃긴건말이죠?
말씀에 비추어 보면 도대체 구원받기가 불가능한 사람들 때거지로 않혀놓고
"여러분 모두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말 입니다..
"그렇게 신앙해선 구원 받지못한다"는 말이 참말일까요?
"그렇게 신앙해도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참말일까요?
"회계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요한의
외침이 참 일까요? "할례를 받아서 언약의 백성이니 구원 받았다"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참일까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지나 않은지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구원의 길요 ^^ 좁고 험해서 가는자가 적습니다.. 저도 솔찍히 그길 가길 포기한 심정이구요..
눈사람님 구원의 길은 전토와 처자를 부인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부자 청년에게 주님은 말씀하시죠 "니 가진것 전부 가난한자에게 주라"
주께서 농담하신것 일까요? 주일을 지키는것은 처자와 소유를 부인하는 삶에 비하면 조족지혈
이겠지요.. 아마 그게 진리일 겁니다.
코람데오님의 상세한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제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거저 주신다 라는 말을 드린게 아닌 것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어떤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이고
오직 구원은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의 행위를 떠나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여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욕먹이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전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받은 자로써 마땅한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리 쉽게 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짜 은혜(여기서 공짜라는 의미는 위에 설명을 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성경 어느 구절에 있냐고 물어보셨네요.
솔직히 제가 어떻게 성경을 다 외우고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동안 성경을 읽었던 제 기억 속에 있기에 질문을 받고 성경을 또 볼 기회를 얻었기에 감사드립니다.
(에베소서 1장)
"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2장)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구절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 구원은 행위로 인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 한 곳이 여러군데 있습니다. 코람데오님께서 성경을 다시 읽어보시면서 찾아보셔도 되고 저도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그런 구절만을 따로 적어 기회가 된다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요. 그러니 구원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구원을 받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전하여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교회 등이 해야할 마땅한 의무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참고 참으시사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이 아주 적을지 아니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는 종말에 가서 알게 되겠지요. 구원받기를 포기하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구요
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1)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코람데오님 제 의견에 대한 상세한 답변 잘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물론이고 질문자나 다른분들을 위해서도 행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다시 해주신 것이 코람데오님의 본 의도를 아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보입니다.
성경인용에 오타가 있네요.
"회계하라(account)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X)
"회개하라(repent)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O)
제가 성서철자주의 경향이 좀 있지만, 설명내용에는 집중해서 잘 읽었습니다.
눈사람님의 글 잘 읽엇습니다.
조금 늦게나마 님의 답변과 질문에 대해 대한 저의 생각을 좀 적어보고자 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것 처럼 구원은 우리의 행위를 떠나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언급이 본질상 진리라는 말씀에 동의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는 그렇게 바울이 말할때는 "구원"의 개념을 매우 협소하게 그리고 "과거적"인 사건 으로
의미할 때에 사용한다는 사실에 유의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글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구원을
미래적에 완성될 사건으로 보고 있음을 간과 하여서는 안된다 봅니다.
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이신 권영경 교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에배소서 2장의 말씀에서 처럼 신자들을 구원받은 자로 묘사 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그들이 과거의 죄악된 삶에서 구출되었다는 의미이지 미래의 구원의 선취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출애굽과 가나안을 혼동할 수 없듯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간격은
무시 될 수 없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구원을 소요한 자와 구렇지 못한자의 차이가
아니라, 소망이 업슨 이들과 산 소망을 가진 이들의 차이이다(벧전1:3~5)" 라고 요약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님의 글에서 자체적으로 대단히 모순된 명재는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받은 자로써 마땅한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되물어 보면 그러면 마땅한 행위가 없으면 어떻게 되지요?
이는 다른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하고 "(이)행위없는 믿음은 받드시 행위로
이어진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항대립의 명제로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 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선물로 받는자는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고 경배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하면 의도와는 달리 본질이 흐려질 염려가 매우 많습니다. 은혜에 찬양하고 경배하는 삶이
행함의 전부인양 느껴 질 수 있거든요. 정확히 표현하면 구원을 선물로 받은자는 처자와 전토와
소유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다라고 표현해야 듣기는
껄꺼러워도 더욱더 정확한 표현 아닐까요. 좀더 정곡을 찌르자면 내 가진것 모두 가난한자를 주고 주를
따르는 것 입니다.
눈사람님 성경을 읽을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점은 본문이 의미했던 바"what it meant"를
정확히 발견하지 않으면 그 본문이 지금 의미하는 바"what it means"를 곡해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설명을 가장 장황히 설명하는 부분이 로마서에
나옵니다만 일반적인 목사들의 로마서 해석은 완전히 왜곡된 것으로 바울 또한 행함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로마서를 통해서 역설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서신서 전체를 톻해서
말하고 있다고 베드로사도가 베드로 후서 3장 후반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행함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율벙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라는
로마서의 말씀 이지요. 거두 절미하고 로마서 전체의 흐름의 의미로 보면 "율법의 본질을 행하는 삶의 행위가
결여된 상황에서 할례나 율법소유 제사행위등 외적인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 되어
져야 합니다.
구구 절절히 행함으로 구원을 받음을 이야기 하자면 지면이 넘 부족 하군요.
본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이있는 해답을 원하시면
현재 안양 대학교 신학부 교수 재직중이시고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살라디아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권연경 교수님이 지으신 "로마서 산책"이란 서적과
김나사로 목사의 "구원을 위한 동역 믿음과 행함"이란 서적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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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꼬리를 너무 많이 무셨습니다. ^^.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이고,
그 구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셨을때에 판별이 날 것이기에
님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 있으나
오랜 경험에 의하면, 소모성 논쟁이 될 수 있기에 삼가하겠습니다.
서로의 글을 읽으며 한번쯤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에 해석은 님의 판단에 맡기고
전 그냥 성경 구절을 옮기는 것으로 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로마서 제 10 장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ㄱ)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두분다 말씀이 맞습니다. 지식이 출중하신 위에 두분에게 제가 끼어 드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그냥 지나 가다가 한번 적어봅니다. 기독교는 뭐꼬에 보면 구원론과 칭의에 대해서 정목사님께서 설명하십니다. 간단히 요약해 보면요
우리가 아무리 율법적인 삶을 100% 실천한다 해도 우리는 의로울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인이라는 것만 확인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죠 칭의론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태도라 할수 있습니다. 행함이 무의미 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칭의의 관계가 상수이고 행위의 문제는 종속변수입니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의 존재론 즉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관통하도록 그저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칭의입니다. (칭의는 실제적인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인정받는 것이죠)
이세계에서 인간의 행위 자체가 구원론적이죠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들에게나 이세상에나 진행중이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완료되지 않는 것 종말적으로 열려져 있습니다. 곧 종말에 가서야 그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마지막 때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이고 고민이죠 구원은 종말론적 구원입니다.
요약이 잘안된 것 같은데요 의미만 참고하십시요
제 생각에는 주일성수와 구원의 연결은 조금 생각을 해볼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교회생활은 쉴때도 필요한 것 같구요
주일 성수에 대한 문제는 무엇이 주일 성수인가 우리에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주일성수가 단지 주일에 한번 드리는 우리의 공예배인지 아니면 주일 하루의 하나님께 온전히 행하는 우리생활인지 생각해 보아야지요 예배만 드리고 아무렇게 사는 것이 주일 성수는 아닐 것이고요 기준에 대해 생각해 볼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가운데에서 모든 날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주일이 아닐지 아무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띤 토론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학생회 교사인 저로써도 올한해 굉장히 큰 갈등이였습니다.
주일날 시험 공부를 위해 학원을 가는 학생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이며 주일 성수에 전혀 개념이 없는 학생들을에게
어떻게 신앙을 심어줄 것인가?
교회 나와도 되고 안나와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고 구원받을수 있다고 했는데... 한 학생은 1년에 2번나왔습니다.
과연 이 학생이 구원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본질을 알려주기에 애들 수준이 너무 어리다는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입식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주일은 빠지면 안되는거다. 절대로!! (강한어조로...)
하지만 빠진다고 어떻게 되진 않는다.(약한 음성으로..ㅋㅋ)
여기 다비아 모인 사람과 겨우 일주일 예배한번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그조차 못하는 사람들은 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가 우월하지도 않지만 신앙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국 기도하는 낮은 자세로 나아가야 된다고 봅니다.
그자리까지 인도할 동역자가 되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방법은 여러가지로^^)
전 학생들 하고 당구치고 피씨방 가면서 친해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ㅋㅋㅋ
집사님도 토요일날 등산같이 가주시고 주일엔 교회 손잡고 오시면 어떨까요^^
(p/s 모든 문제를 성격적으로 신학적으로 풀어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상식과 유도리..도 필요하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로마서서신의 수신자들에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어떤의미 였을까 생각해보셨나요?
교회 나와서 "주님을 믿습니다" 고백하는 수준 일까요? 로마 황제가 곧 신이던 시절 사람들에게
입으로 시인 이라는 것의 의미를 보금더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할듯합니다..
믿음도 두가지지요? 입술의 믿음과 행함의 믿음 두종류 입니다.
예수의 명령 계명을 지키는 행위가 없는 입술의 믿음은 구원하고 관계 없다는게 성경의 가르침 아닐까요?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약 2:20~22]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실존,존재자체가 던져지는 행위,결단 ,신뢰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미 행위까지 포함된다는 전제가 깔려져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위는 분리해서 가르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위에서 언급하신 성경구절은 믿음과 행위가 따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표현을 서로 다른 표현방식으로 강조하고자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세분의 존재론으로 설명하듯이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은 복음공동체가 아니라 유대 기독교인 율법 공동체에 가깝습니다.
(기독교는 뭐꼬를 공부하면서 참고하면서 적어보았습니다.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삼송님 믿음이란 행위까지 포함 하며 그 행위를 자기실존, 존재 자체가 던져지는 행위 결단, 신뢰라고
말씀하신것으로 이해되는데 제 생각으로 그리 말씀 하시면 "행함"의 본질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행함이란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질적 실천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즉 형제를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행위 말이지요.. 그리고 그 핵심에는 "물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빙빙 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진 모든것으로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를
실천 하는 행위를 말씀 드리는 것 입니다.
그리고
믿음 이라는 것은 행위 까지 포함된다 는 말과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는 말의 차이가 무었인지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 해위가 없는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나요? 만약 행위가 없는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면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는 말이 외 복음공동체가 아니라 율법 공동체로 말씀하시느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느군요.
저도 참 이문제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는데요 사실 기독교는 뭐꼬를 공부하면서 조금 감이 잡히더군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구요 조금 맛만 보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코람데오 선생님보다 정말 잘나지 않아서 말씀드릴 위치에 있지 않지만 공부한것과 제가 아는 것을 설명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제로 신앙은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차원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행하는 것을 가지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구원은 내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죠 내 밖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믿음도 내가 추구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자기 확신 자기 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을 사람이 증명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서 끌어 주시는 분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성향은 증명되는 것을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행동을 통해서 확인하려 듭니다.
예를 들면 교회는 교회 확장 ,사람들은 증명되는 어떤 결과 -예를 들면 선함 ,의로운 행동, 구제, 이런 것들을 통해서 구원과 믿음을 확인 하려 듭니다.
그리고 위의 것들이 나의 구원과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행함에 의미를 부여하고 촛점을 맟추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은 못하지만 그것에 집중하면 더 큰 것을 볼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의롭다 해도 완전한 의는 불가능합니다. 기독교는 자기부인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인식할수가 없죠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자기 부인보다는 자기 행함에 의한 증명을 하려 드니까 문제가 됩니다.
행함에만 집중하면요 기독교는 일반종교와 하등의 차이점이 없어보입니다. 일반 종교도 자비,구제 ,행함을 강조하니까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니까요 능력은 구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들어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능력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합니다.(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때만이 가능)그런데 이것이 어려우니까요 자꾸 우리는 행위를 강조할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사고를 하고 거기에 촛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사람들도 세상사람들과 차이를 이 행함에 자꾸 맞추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고요 또 어떤 의로운 행동을 아무리 해도 의로워지지 않을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전에 했던 고민과 흔적을 지금도 우리 시대의 교회와 교인들이 아니 나자신이 그렇게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행함도 존재론적 변화의 인식에 따른 충돌일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종말에 가서야 우리가 확인할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수 있어도 그것은 나의 존재론적 변화 즉 내 자신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촛점을 맟출때만이 가능합니다.
내가 입으로 아무리 말을 한다고 해도 내자신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이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나자신의 실존,존재,자체가 던지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결국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종말에 가서야 일어날 일들이 지금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할수 있는 일들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자신의 확신과 결심이 아닌 것이죠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통치를 내 모든 생명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나를 내어줌인데요 선생님께서 위에 말씀하신 물질과 타인에 대한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은 물론 중요하지만 구원과 믿음을 설명하는 표현방식이지 전부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아무튼 중언부언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뭐꼬 책을 코람데오 선생님께서 읽으셨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자세히 이부분을 정목사님께서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답은 안가르쳐 주시고 길만 제시해 주시죠 저도 이해 할려면 몇번 반복해서 읽어야 될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구원 믿음 행함 이부분은 2000년 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이 충돌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했던 것인데요 제가 성경 몇구절로 안다고 해서 문자적으로 의미있게 해석을 할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길을 바르게 안다고 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위대하시지만 지금 안보이시는데요, 성경은 하나님을 아주 작게 설명하는 손가락인데요 그 손가락의 의미도 모르는 제가 구원을 안다고 믿음을 안다고 말을 할수가 없습니다. 저의 교만이죠
아마 예전에 사도 바울과 그당시 유대교, 유대기독교인들, 이방기독교인들 사이에도 계속 논쟁이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도 편하게 신앙생활을 유도하기 위해 이런 부분을 단편적으로 쉽게 설명하지만요 저역시도 그렇게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했는데요 믿음과 행함 구원의 관계를 인식하는데 저는 완전초보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도 내려놓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초보운전자가 아이들 가르치면 영적으로 죽이겠는데 어떻게 제가 가르칩니까? 코람데오 선생님 저도 모르는데 아는 것만큼만 이야기 했는데요 죄송합니다.
제가 설명한 표현은 믿음과 행함을 설명하는데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오늘 교회에 가서 신년 첫 예배를 드리면서 저희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출장이다. 죽은후에 심판이 있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구원 받은 열매가 행함이다.
교회에 오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오라, 십일조 감사헌금을 아무리 해도 중심에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으면 헛것이다.
행함에 대한 열매는 가난한자 약한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아무리 구제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구제는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 자기를 드러내는 구제가 아닌 진정 가난한 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이 진정한 구제다.
복은 하나님께 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은 복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빌지 마라.복받을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오늘 저의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새해 이런 내용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무언가 말은 하고 싶으신데 답답해 하시는 것 같고 또 현실교회와 신학과 차이를 극복하시려고 애를 많이 쓰시지만 핵심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연결성은 존재론적으로 설명을 못하셨습니다.
저는 이부분이 현실 교회와 성도들의 신학 수준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설교할수 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를 제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
(우리 담임 목사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시죠 말씀도 감동적이시고 검소하시고 기도도 많이 하시지만 신학적인 부분에 가서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시고 설명이 충분치 않더군요 자꾸 변두리에서 설명하시니까 답답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셜교를 들으면서 이해는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 좋은 한해 되십시요
저도 궁금합니다, 저는 좀 다른 질문인데,
1] 왜 주말에 "꼭" 가야되는지, 안가면 안되는지
2] 꼭 가던교회 멀리있음에도 가야되는지, ㅎㅎ
이상, 교회다니는 와이프만난 덕에 교회 다니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