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007년에 성화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다비아에서..
정용섭 목사님의 글을 읽고.. 성화에 대해 인사이트를 얻었지만...
결국 삶에서 실체가 되지못했었는데...ㅎㅎㅎ
그래서 예전에 질문도 했었죠 ㅎㅎ 하지만 답변이 저의 무지몽매함으로 시원치못했었다는 ㅠ
하지만 그후 군대에서 2년, 일상에서 1년동안 하나님께서 많은 생각과 인사이트를 주셔서..
제 안에서 성화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뭐꼬?"라는 책에 나오는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읽어보니...
역시나 제가 알게된 부분과 동일한 설명이 줄줄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저는 칼빈주의 계통에서 양육을 받고 도움을 받고 신앙의 기초를 갖다가..
오순절 또는 신사도운동이라고 분류되는 분들의 책과 설교와 가르침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와 동시에 칭의에 대하여 성화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성경과 박영선 목사님의 가르침과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었죠....
중요한건 칭의, 성화, 구원에 대한 저의 이해는 다비아의 정목사님이나 남포교회의 박목사님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물론 두분의 차이도 살짝 있긴 하지만... 전 좀 살짝 정목사님꼐 가깝다고 해도 될런지요..^^;;)
그런데 중요한건.. 개인적으로 오순절주의의 영향으로 주변지체들에게 성령의 감동(이것을 다비아에서는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겠네요..?)을 따라서 기도해주고.. 그들의 회복과 치유를 가끔씩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비아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아는 성령님보다 더욱 폭넓고 신비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말인데... 성령님의 은사 또는 능력이라고 불리우는 것들...
(방언, 통변, 예언, 치유, 축사 등등이 되겠군요...)
이런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그런 것을 또한 생명의 영, 부활의 영, 가르침의 영이신 성령님의 활동과는 어떻게 연관시키시는지요...?
참 오묘하지만... ^^ 한번 질문해봅니다..ㅎㅎㅎ
졸린눈을 부비며 막 자려다 이글을 읽었습니다.
그냥 잘까 하다가 몇자 적어봅니다
님의 말씀대로 성경을 읽다보면 그것에 관심이 안갈 수 없습니다. 이적을 믿는자나 믿지 않는자나 예수님의 치유역사에 관심이 없다면 성경을 이해하기 힘들것입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각장마다 거의 예수께서 이적을 행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성경에서의 성령의 은사와 현대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유집회등을 구별합니다. 다만 목자다윗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언, 통역, 신유, 축사등에 대해서는 제가 다비안을 대표하거나 제 생각이 다비안과 같다고 할수 없어 크게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1에서도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중 하나는 한권을 집중해서 여러번 읽는것입니다. 마태복음 읽고나서 마가복음으로 넘어가지 말고 마태복음을 여러번 읽는거지요.. 고린도서도 그렇게 하면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도 다른 성서와 마찬가지로 첫장부터 끝장까지는 다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그중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13장도 당연히 다른장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워낙 유명한 13장을 그냥 떼어서 알고 있지요... 고린도전서는 잘 아시다시피 교인들이 서로 갈등을 겪고 있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쓴 서신입니다. 여러문제를 이야기하던중에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곳이 바로 12장입니다. 12장의 마지막에는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라고 합니다. 이은사 갖고 있는 사람과 저 은사 갖고 있는 사람이 서로 잘난체하고 그랬나 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의 저자는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더욱큰 은사인 사랑을 13장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시 14장1절에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너희가 서로 은사를 가지고 싸우고 다투지만 은사는 지체와 같다 귀하고 천한것이 없고, 맡은바 직분과 같다 그러니 서로 다투지 말고 더큰 직분을 맡기위해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해라 그러면 더 좋은 은사를 받는방법은 무엇인지 내가 가르쳐주마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렇게 크기 때문에 모든것을 포함한다. 그사랑을 추구하면서 은사를 사모한다면 얻을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은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은 하나님이지요.. 은사는 하나님의 부분이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전부입니다. 부분만 있으면 전부가 없는것과 반대로 전부가 내게 있으면 부분이 내게 있는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정용섭목사님의 책을 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목사님의 부분이지요.. 그분의 책을 어느 누구는 기독교가 뭐꼬를 읽었고, 다른 누구는 세상은 마술이다를 읽었고, 또 다른 누구는 설교의 희망과 절망을 읽었습니다. 서로 정목사님의 각부분의 주장을 읽고서 서로 잘난체하며 싸우는것 보다 정목사님 자체를 모시자는거지요... 그렇게 되면 정목사님의 부분부분인 기독교가 뭐꼬와 세상은 마술이다와 설교의 희망과 절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나 판넨베르크까지도 얻게 된다는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사모하고 사랑을 의지하며 사랑을 부른다면 그 사랑이 다른 모든것을 다 줄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그 은사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하게 알수 있을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장과 13장과 14장은 그런식의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 하나 설명 드리자면 끝이 없겠지요..
결론적으로 말씁드리면 오순절 주의나 신사도운동등은 거의 쓰래기에 가까운 복음들이죠.
성령의 은사가 뭔지 기본이 안된 무당 잡귀들이나 하는 짖거리들 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령하나님의 역사를 그런 잡령의 역사로 왜곡하는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을많큼
분노를 느끼게 합니다. 목자다윗님은 뭐가 뭔지를 전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단순히 방언해 대해서만 봐도 바울은 대중 앞에서의 방언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방언의 행태가 어떤가요?
그리고 예언의 경우도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요즘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개인의 앞날의 이야기하는 것이아닙니다.
요즘 예언사역의 99%는 개인의 미래사에 관한 일로 엄격히 적용하면 "길흉화복"에 관한 언급으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종교행태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을 좀 알면 감히 예언 은사 받았다고 경솔히 행하지 않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 신명기 18:1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전도서 7:14
하나님께서는 장래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는데 자꾸 안다고 경솔히 말하는것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병고치는 은사도 굉장이 왜곡된 부분이 많이 있으며 요즘 행해지는 거의 모든 행위가 잡령의
역사인 것은 자명 합니다..
글들 읽어 보심 도움 될 듯
밥갑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분 같습니다. 설명절 잘 보내십시요!!
박영선목사님과 정용섭목사님과의 구원 칭의 성화를 이해하시는 부분은 님께서 흡사하시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차이가 분명 있습니다.. 설교비평에 보시면 박영선 목사님 스스로 무엇이 틀린지를 답을 해 놓으셨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장로교 합신측이신데요 설교를 들으면 굉장히 보수적인 관점에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시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삶의 변화에 비중을 많이 두시죠 다비아는 그런 관점에서 틀립니다.
다비아는 정통신학인 독일신학자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역사비평과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공부를 많이 합니다.
여기는 칼빈주의와 성서를 해석하고 인지하는 방향은 틀립니다. 성령부분도 기독교는 뭐꼬를 읽으셨다고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해하시는 정도가 아닌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기독교는 뭐꼬를 정독해 보시면 다름을 이해하실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3번정도 읽었는데요 아직 감이 안잡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쉬운 책이 아니라는 뜻이죠
제 생각에는 오순절, 신사도운동은 한마디로 신학적 본질에 벗어난 운동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흠. 왠지 이렇게 얘기하면 제가 오순절 & 신사도 운동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거같긴한데(저도 그쪽을 지지하진 않습니다만;) 그 나름대로의 '역동성'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렇게 혹평을 받을만한지에 대해선 조심스럽습니다. 적어도 최소한 가장 '역동적'인 기독교 전통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비 콕스도 그렇게 평가를 내리곤 하죠)
성훈님 "역동적"이라고 해서 긍정적인 측면에서이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초림때 서기관과 바리세인들 또한
"바다와 육지를 두루다닌다'는 표현을 통해서 짐작해 보듯이 대단히 역동적인 신앙인들 이었습니다.
또한 이사야서에 보면 이사야의 책망을 들었던 당대 종교인들또한 대단히 역동적인 신앙인 이었습니다.
지식에 기반을 두지 않은 신앙의 역동성은 더욱더 심각한 신앙의 문제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초림때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나 이사야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 "역동성"자체에 의미를 부여
하므로써 신앙의 타락의 길로 들어선 것 이라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독교인 이라 칭하셨는데 ^^ 제가 보기엔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의 "원수" 입니다.
제 말이 좀 심하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만 원수라는 의미를 좀더 성경적으로 깊이 이해해 보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66장 3절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와우....다비아라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인지 몰랐네요...방언. 예언 이런것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는다구요..성경이 말하는데도 아니라고 하네요...더 이상 할 말 없네요..누가 누구를 옳다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Nobody....도대체 뭔차이가 있나요? 여기 다비아와 신사도 운동과 오순절 계열과 뭔차이가 있나요....서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전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평신도로서 생각하는 점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
확실한 것은 둘다 성경에 써있고..
그리고 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개인적으로 저 역시 성령의은사 체험과 능력을 체험했으니까요.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은 사람의 마음...
그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인지... 아님 세상에 속한 마음인지..
은사와 능력은 사단도 우리에게 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은사와 능력은 이런 단어를 써서도 않되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다는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이것이 옳다 틀리다고 이야기 하는것은
그 만큼 우리 크리스찬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졌다는 것이 아닐까요.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힘든세상입니다.
세상은 진실과 거짓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말았으면~~~~~~~
다비아 즉,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뭐꼬를 제대로 소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님께서 하신 질문이 이런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성령의 감동(이것을 다비아에서는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겠네요..?)을 따라서 기도해주고.. 그들의 회복과 치유를 가끔씩 도와주고 있습니다 - 이런 것 없습니다. 다비아에서는 이런 행동을 신학적으로 전혀 정당한 행동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2. 방언, 통변, 예언, 치유, 축사 등등이 되겠군요...)
이런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전혀 생각할 가치도 없고, 또 이런 질문 자체가 전혀 말이 안되거나, 의미없는 질문이라 여깁니다.
3. 신사도운동이라고 분류되는 분들의 책과 설교와 가르침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신사도운동과 다비아는 관계전혀없으며, 신사도운동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동시에 다비아에서 도움받을 수 없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다비아는 신사도운동이 말 자체가 안되며, 틀린 운동이라 판단합니다.
4. 기독교가뭐꼬를 좀더 숙고하시며, "다비안"이라는 책자를 정목사님께 얘기하셔서, 구독하십시오.
석달치가 1200원 정도합니다. 그리고, 정목사님께서 쓰신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설교비평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조용기 목사님에 대해서 이렇게 과감하게 쓸 수 있는 분은 몇분 없습니다.
오순절 관계에 대한 정리부터 하셔야 뭔가 보일 겁니다.
5. 이런 저의 태도와 글에 대해서 혹시라도 섭섭하게 여기거나, 반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맘 상하게 하셨다면 죄송하구요. 그래도, 제가 혹시라도 님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있어서
이렇게 쓰지는 않을까 하는 이런 긍정적인 생각도 가져 주십시오.
저는 신학을 전문으로 한 사람으로서, 전문인이 아닌 타인에 대한 공적 배려라는 책임감에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내면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만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지요.
개신교의 할아버지격인 루터가 생각한 자유도 한번 읽어보십시오.
신앙의 대 선배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사이트를 넘어선 소위 충격이지요.
"수도회 서약에 대한 루터의 심판"(종교개혁사상선집, 박건택 편역, 개혁주의신행협회, 63쪽부터 85쪽까지입니다)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