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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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탄할 일이다
2011년 1월 4일 소망교회 김지철담임목사가 부목사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폭행한 부목사들을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을 믿는 일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자리다툼을 하는가?
잠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조상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뱀의 유혹에 이끌려
감으로서(창3:1~7) 뱀의 세상의 지배하에 살게 되었다.
뱀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가?
뱀은 동물이다. 동물의 속성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동물의 세계는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한다.그 법칙에 의해 동물들은 살아간다.
동물들의 세계에는 자비나 평등, 공의, 사랑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러한 동물과는 반대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뱀의 세계의 이끌려 가게 되었고,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가 2000 년전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전까지 계속되었다.
예수는 뱀의 지배체제속에 살고 있는 인류를 뱀의 체제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이 땅에 온 분이다. 그는 뱀과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하나님(조물주)의 변신이다.
즉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의 세상은 뱀의 세상인 무자비, 불평등, 불의 등의 세상이었으나
사랑의 속성인 예수가 옴으로서 뱀의 세계가 예수의 사랑의 세상으로 지배체제가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때부터 세상은 예수의 세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예수의 속성( 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당에든 어느 곳에서든 장소를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에 보내진 분(요3:16)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의 속성을 잘 실천하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당당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렇게 하도록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그들은 그것을 실천하였다. 그 뜻을 이어받아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곳에서든 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면
그러한 삶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그 곳이 교회이다.
왜냐하면 그것(예수)을 행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기 때문에 행동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에서 비롯된 행함,
그것을 예수나 바울은 성서에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예수(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말로는 가르치기는 하나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며
믿음과 행함이 없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교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교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교회가 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자비, 평등, 공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므로
하나님앞에 아무 것도 아닌 곳을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육친의 부모,형제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내 형제'(막3:33~35)라고 말한바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예수의 속성인 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면서 사는 일이다.
이것이 믿음이고 행함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실천이 될때
세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세상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하나님이 원래부터 계획하셨던 에덴동산의
생명과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세상은 인간의 내면에서 인간을 조종(지배)하고 있는
성령의 힘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게 하여
인간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데에 걸림돌이란
아직도 예수그리스도와 반대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는가에 상관없이
제재하고 회초리를 들어 훈계해야 한다.
더우기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친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 뱀의 세계를 향하고 있을 때는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오늘의 잘못된 목사들의 행동은 대부분 교인들의 무지몽매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도 된다. 이것이 아주아주 커다란 문제이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은 성서를 많이 읽고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진정으로 기도해야 한다.
더 이상 같지않은 목사들에게 배우고 관리를 받거나 의존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목사들은 신학자들에게 신학을 배운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대원이란 곳에서 성서해석에 관한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어떻게 잘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한다.
독일이나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왔다는 목사들이 하는 말도
대부분 틀에 밖힌 교회운영을 잘하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 오묘한 성서를 해석할 수 있을까?
한국의 기독교 성도들이여 더 이상 같지않은 목사들에게 속지마시라
그들의 적그리스도같은 행동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마시라
하나님의 뜻이란 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의 잣대로 들이대어 자세히 관찰하고 교회가 그렇지 못하고
뜬구름잡는 소리를 한다면 과감하게 버리십시요.
2011. 01.05 / 에덴나라
ㅎㅎ 첫날처럼님! 덮어놓고 욕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 쉽지요?
소망교회의 문제를 들여다 보면 이렇습니다
1월6일자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소망교회를 세운 곽선희 원로목사는 2003년 은퇴했다. 그 후 장신대 교수로 있던 김지철 목사가 담임을 맡았다.
이후 소망교회는 신구 세력 간 갈등을 거듭했다. 장로들 상당수도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양측은 소송도 불사하면서
대립해왔다. 폭행사건에 가담한 두 부목사는 원로목사 측 사람이다. 곽 목사 은퇴 뒤에도 두 사람은 담임목사
비서팀에 계속 남았다. 김지철 목사는 지난해 7월 최 부목사를 해임했고, 조 부목사를 올해 사목계획에서 제외시켰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돌발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김 목사를 담임직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지난해부터 계속돼 왔다.
반대파에선 "물러나라. 마지막 경고다"며 올해부터 김 목사를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폭행사태가 빚어진 건 새해 첫 주일예배였다. 주일 1부 예배가 끝나자마자 반대파 교인 20여 명이
담임목사실을 찾아가기도 했다. 소망교회의 구조적·조직적 갈등의 표출인 셈이다.... "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 vangoghjoongang.co.kr >
필자의 글의 의도는 예수(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믿고 실천 하는 데 왜? 자리다툼이 필요하느냐 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를 믿고 실천 하기보다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내는 것만이 보여지고 그것을 둘러싼 투쟁만이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국회에서의 싸움과 교회의 싸움은 그 본질에서 크게 다릅니다. 국회에서의 싸움은 국민의 주권과
생존, 복지 등 국민과 깊숙히 관련되어 있는 커다란 일입니다. 국회의 싸움은 그 싸움이 진흙탕일지라고
국민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간과 할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소망교회와 같은 대부분의 교회는 사회에 이렇다 할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국회가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기독교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의 힘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국민을 위한 일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야 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가끔씩 들려오는 소리는 예수의 속성의 실천은 없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권력투쟁의 안타까운 소식만을
내 보내어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개신교 교회가 예수를 실천하지 못하고, 사회의 골치덩어리로 일반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어 있는지를 점검 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를 찾아내어야 고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지적하고
또 대안을 제시해 보는 것입니다. 2011.01.06/에덴나라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교회를 잘 운영하는 방법만을 배운다. 아무리 현대의 교회가 문제가 있고 목사들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을 펴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에게 성서를 배우면 안된다면 그럼 누구에게 성서를 배워야 하는지도 좀 알려 주십시오.
목사라고 완전한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 역시 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혹 인간의 죄성이 모두 소멸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시지는 않겠죠. 그럼으로 목사역시 죄성을 언제나 발현할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 예수님의 12제자들 속에도 너무나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가롯 유다의 이야기는 너무나 우리가 잘 아는 얘기 아닙니까?
물론 많은 목사들의 회개와 자성이 있어야 하는것도 맞고 소망교회의 사태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대안없는 비난은 자칫 모든것을 더 혼란스럽고 망쳐 버릴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마셔야 할 것입니다.
디아코니아님의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필자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교회를 잘 운영하는 방법만을 배운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맨윗글의 내용을 잘 이해하시지 않으셨네요. 그리고 님은 교회의 목사들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억지 주장을 편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는 대부분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필자는 오늘날의 한국개신교회의 문제점을 성서해석의 부재로 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한 목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의 사고 방식이
자리다툼에 연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스스로를 성직자라고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직자에게는 더 호된 회초리를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그러한 잘못된 사고 방식을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이 잘못되어 있으면 800만의 기독교성도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쉽게 되기 때문입니다.
댓글을 읽어보니 님은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시는 군요. 또 다른 말씀을 하실까봐 ' 성서는 대부분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필자는 오늘날의 한국개신교회의 문제점을 성서해석의 부재로 봅니다. '님이 쓰신 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문학적인 지식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 , 이스라엘 민족의 문화를 이해하고 읽었을때 더욱 더 폭넓게 이해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그리 힘들게 구약을 읽기위해 히브리어와 신약을 읽기위해 헬라어을 배우는 것도 그 언어속에 담겨 있는 본래의 의미와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때론 어떤 구절은 한국어로 읽으면 도저히 원어속에 담겨 있는 그 의미를 잡아 낼수 없는 것도 성경에는 허다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것이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님이 말한 깨달음도 이러한 근본적인 소양이 갖추어져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마치 돈오돈수와 같이 그렇게 성경의 말씀들이 해석될거라고 믿으시나요?
갑자기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군요 . 각자가 자신의 소견이 옳은대로 행동하더라.. 그렇게 주관적인 성경에 대한 해석은 바로 각자의 소견이 될 위험이 너무나 많음을 혹 간과하고 계신건 아닌가요? 빈대 잡으려다 초간 삼간을 다 태워서야 되겠습니까?
디아코니아님 ! 님의 주장이 맞습니다.
성서는 인문학적 역사적 배경과 히브리어원어로 구약을 읽고, 헬라어로 신약을 읽어 그 속에 담겨진
의미를 더 폭넓게 깨닫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님 또한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문제점이 많이 있다고 지적하셨지요?
님이 말하는 한국교회목사들의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고, 그로 인하여 성도들은 어떠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며, 또 대안은 무엇이 있는지 님의 주장을 펼쳐 보세요.
님이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말꼬리잡고 물고늘어지는 것이 취미는 아니시겠지요?
오늘의 한국교회의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님의 주장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야 소망교회의 폭력목사같은 사람들이 한국기독교에서 자리다툼을 하지 않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토론은 좋은것입니다.^^
에덴나라님께서 먼저 예수님이 자비 평등 공의 사랑을 행하신 증거를 제시해주십시요....
제가 예수님의 속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이 이야기가 돌아갈것 같네요..^^
제가 님을 가르친다는것도 여러가지로 어려울것 같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은 술잡수고, 사람들에게 욕을 퍼 부으시고, 병 고쳐달라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버리시고,
등등 하셨지요..
병자들을 피하신것은 자비를 행하시지 아니하신것이고,
부자들을 욕하시고, 높으신 양반들을 비판하신것은 평등과 거리가 멀게 역차별 하신것이고,
로마에 항거하지 아니하시고, 억압받는 백성들(실로암망대가 무너져 죽은자들과 빌라도가 갈리리사람들을
제물에 피를 섞은일)을 위해서 항거하지 아니하셨지요...
벳새다와 고라신에게는 화있으라고 저주까지 하셨습니다. 이게 사랑을 행하신것입니까?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화 있으라고 자주 저주하셨나요?
이건 평등과 사랑과 자비와 공의에 어긋나는것 아닌가요?
저도 예수님의 사랑등을 인정하지만 에덴나라님께서 쓰신 글에서 느끼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38년된 병자(요5:3), 중풍병자(마9;2), 소경(요9:7), 혈루증 앓는 여인(눅8:44)등을 이외에도 많이 고쳐 주셨지요.
평등이라면 예수께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물을 주셨지요(요4:9)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10명의 소경을 낫게 해주실 때, 유대인뿐만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도 똑같이 눈을 뜨게 해주셨지요.
예수께서는 의인이면서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삭개오라는 죄인의 집에 유하셨지요(눅19장).
이는 예수께서는 유대인에게나 사마리아인에게나 똑같이 예수의 능력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공의는 구약의 시편, 욥기 잠언 등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전에서도 하느님의 적극적인 품성을
말하고 있어요. 예수께서는 성전이 돈바꾸는 곳, 비둘기 파는 곳으로 전락한 곳에서 그들을 꾸짖으셨지요.
그리고 예수께서는 의롭지 아니한 것들, 즉 진정성이 없는 것들, 거짓인 것들 바리새인들의 악한생각들을
꾸짖었습니다.(마12:34) 그리고 예수께서는 부자라는 것만으로 모두를 꾸짖으신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도 부자였지만 그의집에 유하셨던 것을 볼 수 있어요.
사랑이라면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속성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요한은 요한복음 21장25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다 말하려면
이 세상에 다 두어도 모자랄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속성이 있겠지요.
그렇게 많은 속성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속성덩어리)를 주셨으니(요3:16)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필자가 네 가지의 속성을 언급한 것은 소망교회의 목사들의 자리다툼을 지적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그 많은 하나님의 속성중에서 네가지 부분만을
선택 사용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동에는 문자가 아닌 비유나 은유, 상징으로 해석해야 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것들이 논의 되어질 때 다시 언급해야겠지요. 오늘은 소망교회의 자리다툼하는 목사들의 행태를
보고 성서해석의 부재로 인한 목사들의 다툼의 원인을 생각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면서도 거기에 이렇다 할 대안이 그다지 없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교인이라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 그것을 지적 할 수 있어야 하고, 자유롭게 표현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올바로 나아갈 수 있는지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들을 주장함으로서 우리는 서로가 몰랐던 부분을 배울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의를 행하신 증거는 좀 부족하신듯 해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바뀌어 시편과 잠언과 욥기로
바뀐듯 하군요...
속성덩어리라는 표현도 좀 그렇고...
예수께서는 많이 고쳐주셨기도 하지만 안 고쳐주셨기도 하지요... 그럼 이건 뭔가요?
참고로 저의 삶도 기록해서 이 땅에 다 두려해도 부족합니다.
이세상 어떤 사람의 삶도 이 땅에 다 두기 부족한 삶을 살것입니다. 그건 단지 수사학적 표현일뿐이지요...
예수가 위대한 CEO라는 취지의 책도 있지요..
예수기 때문에 무조건 떠 받들고, 그의 행위를 무조건 비평없이 받아들이는 행위가 바로 문제를 발생시킬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예수의 잘못이 아니고 잘못된 해석에 대한 비판입니다.
예수께서 삭게오의 집에 유하신것이 옳은일인가요?
시편에 보시면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시편 1편을 이루시지 아니하셨지요...
성경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는것도 옳지 못합니다.
정용섭목사님 말씀대로 성경기자들이 하나님 전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단편을 체험한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의 전체 뜻을 반영하지 못할때가 많지요..
에덴나라님께서는 예수께서 마치 완전히 사랑과 공의와 자비등을 행하신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실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다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대로 예수께서 병자들을 피하시고 욕하시고, 저주하신 부분들을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평등은 사마리안에게 적용되었지만, 도리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는 역차별이 있었던것은 뭔가요?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의를 행하신 증거는 좀 부족하신듯 해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바뀌어
시편과 잠언과 욥기로 바뀐듯 하군요...
답변--->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사23:27)이라는 것을 알기 위한 구절들이 시편, 욥기, 잠언, 이사야 등에
알기 쉽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님이 제 글에 반박을 하실려면 제가 제시한 이 구절들을 읽고 나서
읽어본 결과 저의 글의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되어 있음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 속성덩어리라는 표현도 좀 그렇고...
답변--->속성덩어리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 예수께서는 많이 고쳐주셨기도 하지만 안 고쳐주셨기도 하지요... 그럼 이건 뭔가요?
제가 말씀드린대로 예수께서 병자들을 피하시고 욕하시고, 저주하신 부분들을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이 부분은 성서 어느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참고로 저의 삶도 기록해서 이 땅에 다 두려해도 부족합니다.
이세상 어떤 사람의 삶도 이 땅에 다 두기 부족한 삶을 살것입니다. 그건 단지 수사학적 표현일뿐이지요...
답변--->왜? 이렇게 생각하시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예수가 위대한 CEO라는 취지의 책도 있지요..
예수기 때문에 무조건 떠 받들고, 그의 행위를 무조건 비평없이 받아들이는 행위가 바로 문제를
발생시킬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예수의 잘못이 아니고 잘못된 해석에 대한 비판입니다.
답변--->무조건 비평없이 받아들였다는 우려를 하지 마시고, 님의 논리를 펴주세요.
그래야 저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인 논리는 없고 비판만 하시네요.
* 예수께서 삭게오의 집에 유하신것이 옳은일인가요?
시편에 보시면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시편 1편을 이루시지 아니하셨지요...
답변--->죄인 이라는 의미를 구약에서와 신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에는 문자로만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요. 구약은 따로 나중에 언급을 하겠지만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9:13,눅5:32) 그래서 삭개오도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도 죄인취급하시고, 죄사함으로 병을 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이라고 하신 죄인의 의미를 우리는 상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신약성서에서 말씀하신 죄(sin)의 의미는 죄(crime)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부분은 이것만 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이 길어지게 되어서요
* 성경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는것도 옳지 못합니다.
정용섭목사님 말씀대로 성경기자들이 하나님 전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단편을 체험한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의 전체 뜻을 반영하지 못할때가 많지요..
에덴나라님께서는 예수께서 마치 완전히 사랑과 공의와 자비등을 행하신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실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다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어떤 글을 쓸 때에 성경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어떤 사건에 글을 전개해 나가야 할 때 성경구절로 근거를 삼고, 거기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해 나가야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요? 정용섭 목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성서의 기자들이 여럿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모습은 여려 방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와 사랑이 그 대표적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성서 발췌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을 표현한 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가? 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성도(목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의 행동이 공의로운가?
사랑이 느껴지는가? 로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공의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행동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의 속성은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소망교회의 목사들의 사건을 보고 그들의 행동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므로 그런 같지않은 목사의 말을 듣거나 관리를 받거나 의존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 평등은 사마리안에게 적용되었지만, 도리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는 역차별이 있었던것은 뭔가요?
답변--->평등(平等)이란 인간의 존엄, 권리, 인격, 가치, 행복의 추구 등에 있어 차별이 없이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유대인들에게서 차별을 받고 있던 시기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에게 역차별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누림이
나누어진다고 해야 이해가 가능할까요?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같은 권리를 누리고 살게 하신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지도자들(쿰란공동체 등등)의 외형적 경건, 즉 보여주기식 경건, 진정성이 없는
것들, 예를 들면 회칠한 무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옳지 못한 것들을 옳게 되도록 만들려고
예수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을 그대로 있게 하면 안되겠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그런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되도록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다툼, 또한 목사들이 예수님이 책망하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유사한 모습이라 봅니다
그러나 한국에 소망교회 하나만이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소망교회와 비슷한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님이 진정 저를 반박하셔야 할 것은 성서를 많이 읽고, 그 뜻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기도 많이 하시구요
한국교회가 앞으로 올바로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들을 올려주시는 것입니다...^^*
안녕하시지요?
일요일이네요...
정목사님께서 제가 글을 한칸씩 띄어쓰니 보기가 어렵다고 하셔서 이제부터 붙여 쓸까합니다.
저는 띄여쓰는것이 읽기 편할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에덴나라님과는 주제를 한가지로 통일해야할것 같아요..
이러다가는 점점 엄청나게 글이 많아져서 답변하기조차 힘들어질수 있기 때문이지요...
일단 저는 에덴나라님께서 제 글에 붙여주신 부분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인용부분도 엄청길군요...ㅠㅠ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의를 행하신 증거는 좀 부족하신듯 해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바뀌어
시편과 잠언과 욥기로 바뀐듯 하군요...
답변--->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사23:27)이라는 것을 알기 위한 구절들이 시편, 욥기, 잠언, 이사야 등에
알기 쉽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님이 제 글에 반박을 하실려면 제가 제시한 이 구절들을 읽고 나서
읽어본 결과 저의 글의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되어 있음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 에덴나라님께서는 예수께서 공의를 행하셨다고 주장했고, 저는 예수께서 공의를 행하신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에덴나라님께서는 예수의 공의를 행하신 증거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셨지요... 저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의를 행하셨다고 주장하신 구절들을 좀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구절들은 많지요.. 예수가 공의롭다는 증거로 혹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아니시죠?]]]
((* 속성덩어리라는 표현도 좀 그렇고...
답변--->속성덩어리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
[[[속성덩어리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감은 잡겠지만 따지고 들면 엄청 의미없는
그런 단어가 아닌가 싶다는 제 표현이었네요..]]]
((* 예수께서는 많이 고쳐주셨기도 하지만 안 고쳐주셨기도 하지요... 그럼 이건 뭔가요?
제가 말씀드린대로 예수께서 병자들을 피하시고 욕하시고, 저주하신 부분들을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이 부분은 성서 어느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 가셨는데 거기에는 병자 맹인등이 많이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께서는 38년된 병자 한사람만 고치셨지요.. 나머지는 다 그냥 두시고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
고향에 가셨는데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지요.. 38년된 병자도 믿음이 있었던것은
아닌데. 왜 그만 고쳐주시고 나머지 환자들은 그냥 두셨나요?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2장34절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하시지요.. 그 당시 흔한 욕이었는데 지금 우리가 쓰는 개새끼라는 말과 비슷하겠지요.. 마태복음 11장21절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참고로 저의 삶도 기록해서 이 땅에 다 두려해도 부족합니다.
이세상 어떤 사람의 삶도 이 땅에 다 두기 부족한 삶을 살것입니다. 그건 단지 수사학적 표현일뿐이지요...
답변--->왜? 이렇게 생각하시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행적에 대한 요한복음기자의 표현(요한복음 21장25절)인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는 당시 자주 쓰이는 수사법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행한 일을 전부 성서기자들의 방식대로 기록한다면 설마 세상이 그것을 감당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아주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한다면 모든 인간의 삶은 세상에 기록되어 두기가 힘들겠지요.. 예수께서 행하신것들이 아주 많다는 수사학적 표현일뿐이지.. 실제 오직 예수님의 행적만 세상이라도 그 행적을 기록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예수가 위대한 CEO라는 취지의 책도 있지요..
예수기 때문에 무조건 떠 받들고, 그의 행위를 무조건 비평없이 받아들이는 행위가 바로 문제를
발생시킬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예수의 잘못이 아니고 잘못된 해석에 대한 비판입니다.
답변--->무조건 비평없이 받아들였다는 우려를 하지 마시고, 님의 논리를 펴주세요.
그래야 저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인 논리는 없고 비판만 하시네요.))
[[[이건 구체적 논리를 전달하는 제 개인적인 방법입니다. 일단 질문을 던져 놓으면 님께서 님의 논리를 변하게 하는 형태지요. 선문답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저는 제 개인의 주장을 하고 싶은것이 아니고 님의 논리의 헛점을 생각해보는것입니다. 그러니 님께서 자신의 헛점을 보강하시어서 더 좋은 주장을 하시면 되는것입니다. 사실 이런말들은 토론에 의미가 없네요... 자신의 주장이 옳았는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되는것인데.. 상대의 논리를 내 놓아라하는것은 나중에 너는 그렇게 살았느냐? 하는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지요... 예를 들어서 제가 에덴나라님께 님께서는 공의와 사랑과 평등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살았느냐?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럼 님께서는 믿음의 증거로 공의와 사랑과 평등과 자비를 실천하시면서 사시는겁니까? 라고 질문하면 님께서는 대답하시기 곤란해 지시거든요... 이건 토론을 하지 말자는 제 질문이 됩니다. ]]]
((* 예수께서 삭게오의 집에 유하신것이 옳은일인가요?
시편에 보시면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시편 1편을 이루시지 아니하셨지요...
답변--->죄인 이라는 의미를 구약에서와 신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에는 문자로만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요. 구약은 따로 나중에 언급을 하겠지만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9:13,눅5:32) 그래서 삭개오도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도 죄인취급하시고, 죄사함으로 병을 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이라고 하신 죄인의 의미를 우리는 상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신약성서에서 말씀하신 죄(sin)의 의미는 죄(crime)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부분은 이것만 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이 길어지게 되어서요))
[[[[[이 시대에 유대인학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를 많이 제시합니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라면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셨어야 한다는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것은 지금의 주장입니다. 초대그리스도교시대에는 이것이 희미했지요.. 유대교에서는 죄인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에덴나라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과 자비와 평등과 공의를 행하신분으로 전제하셔서 그렇지 당시에는 그렇지 아니했지요...
예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것은 공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요... 에덴나라님께서 말씀하시는 한국의 않좋은 목사들이 여신도들을 성희롱하고 교회헌금을 사유화하고 교회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큰 죄인이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먼저 찾아가시면서. 정의를 부르짖고 그들에게 옳바른 길을 가라고 외친 사람들에게는 외식하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하신꼴이거든요... 그것을 공의로 받아들일수 있으십니까? 남을 죽이고 강간하고 빼앗은 사람들을 용서해버리는것이 공의라고 한다면 그것이 죄인을 부르러 온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타락한 목사들도 그 범위안에 드는것은 아닌가요?]]]
((* 성경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는것도 옳지 못합니다.
정용섭목사님 말씀대로 성경기자들이 하나님 전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단편을 체험한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의 전체 뜻을 반영하지 못할때가 많지요..
에덴나라님께서는 예수께서 마치 완전히 사랑과 공의와 자비등을 행하신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실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다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어떤 글을 쓸 때에 성경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어떤 사건에 글을 전개해 나가야 할 때 성경구절로 근거를 삼고, 거기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해 나가야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요? 정용섭 목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성서의 기자들이 여럿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모습은 여려 방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와 사랑이 그 대표적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성서 발췌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을 표현한 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가? 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성도(목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의 행동이 공의로운가?
사랑이 느껴지는가? 로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공의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행동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의 속성은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소망교회의 목사들의 사건을 보고 그들의 행동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므로 그런 같지않은 목사의 말을 듣거나 관리를 받거나 의존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구절을 인용하는것은 옳습니다. 다만 자신의 논리가 성경전체의 갖고 있는 이미지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리를 증명할 목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는것이 옳지 않다는 뜻이지요....]]]
((* 평등은 사마리안에게 적용되었지만, 도리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는 역차별이 있었던것은 뭔가요?
답변--->평등(平等)이란 인간의 존엄, 권리, 인격, 가치, 행복의 추구 등에 있어 차별이 없이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유대인들에게서 차별을 받고 있던 시기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에게 역차별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누림이
나누어진다고 해야 이해가 가능할까요?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같은 권리를 누리고 살게 하신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지도자들(쿰란공동체 등등)의 외형적 경건, 즉 보여주기식 경건, 진정성이 없는
것들, 예를 들면 회칠한 무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옳지 못한 것들을 옳게 되도록 만들려고
예수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을 그대로 있게 하면 안되겠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그런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되도록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다툼, 또한 목사들이 예수님이 책망하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유사한 모습이라 봅니다
그러나 한국에 소망교회 하나만이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소망교회와 비슷한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보통의 경우 바리새인들이 겉만 깨끗하고 속이 더러운 이중인격자라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것으로 이해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또 유대인들이 많이 갖고 있는것을 사마리안들에게 나누어준것은 아닙니다. 유대지도자들을 저주해서 그들을 버리시는듯한 발언을 하신거지요... 유대인들이 많은 구원을 갖고 있고 사마리안들이 없었는데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구원의 일부를 사마리안들에게 나누어준것이 아니고, 유대인들만 독점하던 메시아를 사마리안들에게 알려주시고 유대인들은 저주하신거지요.. 이건 역차별입니다.]]]
((님이 진정 저를 반박하셔야 할 것은 성서를 많이 읽고, 그 뜻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기도 많이 하시구요
한국교회가 앞으로 올바로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들을 올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글은 토론에 별 도움이 안되는군요...]]]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자비,공평,사랑, 공의를 이루시었다는것에 대해서 저는 확실하게 동의할수 없다는 뜻이었지요..
저는 한국교회의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님과 토론한것이 아니고, 오직 자비,공평,사랑,공의에 대한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니 한국교회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는 제가 뭔가 이야기해야할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에덴님께서 다음글로는 죄에 대해서 한번 올려봐주시지요....
제가 왜 님에게 한국교회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까?
제 취미가 말꼬리잡는거냐고 물어보셨는데 , 네 전 좀 말 같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면 말꼬리를 잡는 반골 기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님이 여기에 글을 올리실때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글을 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님의 글을 읽은 다비아의 회원들은 님의 글에 반론을 들수 있는 권리또한 있구요. 그리고 님은 자신의 글을 통해 이곳에 사상의 커밍 아웃을 하신거고요. 저는 님이 쓰신 그 이야기에 대한 다른 의견들을 낼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위한 대안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지요. 전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지만 님한테 말하고 싶지 않군요. 그리고 님도 그걸 말하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합니다. 좀 후퇴를 하셨는데 님 혹 히브리어와 헬라어 공부 해본신적이 있나요? 그 작업이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닙니다. 정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공부해야 성경 한장 원어로 겨우 읽을 수 있는 언어가 헬라어와 히브리어 입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이 성경의 깨달음을 위해서 그 모든 수순을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서 개론부터 시작하여 66권에 이르는 성서학적인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봅니까?
물론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공부를 다 하고도 성경을 올 바르게 보지 못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지요. 자리 다툼하는 목사도 물론 많고요. 그렇다고 목사들의 성경에 대한 해석과 가르침까지 부정하는 님의 방법론이 옳다고 아직 주장하시는가요? 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가 우리속에 내재되어 있고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 된다면 소망교회 사태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토론도 결국은 님이 올린 텍스트와 제가 올린 글의 텍스트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요?
제 머리속에 어떤 생각이 있던 그건 제 자유고 제 권리입니다. 그걸 까발려 보라는 권리가 님한테는 결코없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폐일언(蔽一言)하고,
에덴나라님 말씀의 뜻, 즉 '사랑, 자비, 공의, 평등을 실천하는 것만이(강조표현)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도들의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곧 예수가 우리를 향해 가르치는 바이다.' 라는 의미의 말씀에 1천 퍼센트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만약에 신도와 교회들에 대한 이와같은 책무가 망각되고 만다면 더이상 기독교는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피흘림을 자초하신 이유는 바로 짐승같은 인간들을 본래 아버지가 뜻하신 바대로 제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혹 어느 누가 그 외에 다른 것, 다른 기준을 들이댄다면 그건 종교를 이용해먹는 소행입니다.
글의 핵심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정서적 충격은 있네요.
저는 좀 극단적인 처방? 같기도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기준으로 남을(교회)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 보다
자신한테 적용하는게 먼저여야 된다고 봅니다.
소망교회 사건을 비평해야 하고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와 같이 개인이 그 사건앞에
자비,평등,공의,정의 그리고 성경의 가름침으로 살아가는지 채크하는게 먼저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요?(무지한 성도가 아는 것 만큼이라도...)
말씀으로 개인과 성도가 변화된다면 교회도 변화하리라 믿습니다. 역으로 성립되면 더없이 좋겠지만요.
그래서 깨여있고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다비안 식구들이 존재하는거 아니겠습니까?
(모든 문제를 덮어두자는 의견은 아닙니다.ㅋ)
모든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그날을 소망합니다.
덮어놓고 욕하는 것이 가장 쉽죠...
예산안 처리를 두고 정부 여당과 야당의 물리력 싸움과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그냥 덮어놓고 "국회는 썩었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더 쉽고 무책임한 태도는 없다고 봅니다...
소망교회 문제도 저는 잘 모르지만, 문제의 핵심은 따로 있는 듯 합니다... 곽선희 원로 목사의 거취의 불투명성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