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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다


"예수의 운명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마27:46~52,눅 23:45)

 

 성경사전에  "성소란  거룩한 처소.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에게 제사드릴 때 지성소 휘장 밖의 곳.
이곳에서 제사장이 제사드림. 언약궤를 모셨던 세겜 땅을 성소라고도 하였고 (수8:30).

"벧엘"  (삿20:27)."길갈" (수9:6),"예루살렘" (삼하6:16)등이 성소가 되었고.

솔로몬 이후에는 " 예루살렘" 성전을  성소로 인정하고 그 안에 지성소를 마련했다 (출26:33,히9:2). "

고 하고 있네요.


예수가 운명하는 시간에 맞추어 그 성소 안에 지성소와 구별하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땅의 진동도 있었고 바위도 터졌고...하는 충격이 있었으니까 성소가 있는 곳도 흔들려서
찢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서 해석을 해보고자  왜? 라는 질문을 붙여봅니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많은 것(율법적인것)을 파괴(뒤집음)하는데 그 가운데 제자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커튼을 찢어 오픈시킨 것입니다.

지성소가 오픈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던 하나님이 보여진 것입니다.


그곳은 더 이상 제사장만이 들어가 비밀스럽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여지게  되었다는 말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특권이 아니라

보편화 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도 그 곳은 더이상 제사장들만 들어가는 곳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지성소에 있다고 믿었던 그 하나님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있던 커튼이 찢어지게 됨으로서 누구에게나 보여지는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대사제만이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곳이 더이상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니, 지성소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고나 할까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그 시점에서부터는 하나님과 일반 성도들간의  

매개의 역할을 하던 제사장이라는 역할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직자라는 것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시점에서부터는

필요가 없게 된 것이라 봅니다.

 

아마도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을 주장한 이유도
성서의 이 부분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의 많은 목사들이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과 성도들간의 매개역할이라도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해요.  함께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서로 격려하는 차원이라면 모를까 오늘날에도 성직자라는 직업이 필요한 것일까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이유를 또 다른 여러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 성경구절을 읽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되어지셨는지 나름대로 적어보면 어떨까요?

2011.01.14-에덴나라

 

글의 일부분과 제목을 수정 하였습니다....^^


안희철

2011.01.14 17:50:50
*.142.13.139

신과 인간의 직접성(Unmittelbarkeit)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 중 하나였죠.

그렇기 때문에 그 둘 사이의 중재자들(Vermittlungen)은 불가피하지 않다면

스스로 신인 사이의 매개자임을 자처하선 안 되죠.

근데 이 방점이 막나가게 되면

성서, 전통,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중재자로서 자격이 박탈되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랬었다고 봐야죠).

개신교는 성직자가 없어야 한다기보단, 사제(Priester, 중재자 성격이 강하죠)가 없는 거구요,

오히려 한국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목회자"라는 개념이 더 성서적이고 복음적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런데 그 어떤 뛰어난 자발적 공동체도

그 공동체 자체만을 위해 헌신할 사람은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공동체 자체가 조만간 붕괴될 거구요.


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성은 저 휘장 본문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구요,

오히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내용 자체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어요.

예수께서 선포하신 많은 비유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자연스레 갖게 되는 확신이죠.


에덴나라

2011.01.17 08:21:11
*.199.195.40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 만남은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건들, 어느 하나만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범위가 너무 넓어기기 때문에 막연하게 이해 되기 쉽상이지요

이제는 뭉퉁거려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보다는

얼굴과 얼굴을 보듯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성경말씀을 말해주어야 할 때라고 보아요.

오늘날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시대라고 봅니다.

 

 

진 예수만

2011.01.17 10:31:29
*.118.18.237

직접만남, 그래요. 이제는 Face to face예요.

남이 소개하는 예수는, 이제는 우리에게 그런 시기가 이미 지나갔어요.

그건 단지 성령운동이 시작하는 처음 시기만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내가 만난 예수'가 반드시 있어야 해요. 

예수는 한 분이지만, 내가 만난 예수는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또 그게 정상인 것입니다. 다 똑 같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이지요.

 

관악산은 분명 하나이지만 동서남북에서 바라보는 관악산의 모습이 각각 다 달라요.

각자 자기 쪽에서 바라본 것이 모두 관악산 맞지요.

한 사람이 모든 방향을 다 볼 수는 없어요.

획일적인 것을 강요하는 그런게 바로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바 "보편적 교회"

개념이 가진 원초적인 문제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실상은 오늘날의

개신교회도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봐야 맞아요. 그게 바로 교단주의입니다.

교회 공동체 위에 "교단"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건 엄밀히 말하면 프렌차이즈사 "간판"같은 것이지요.

 

그래서(강요되고 교조화돼서) 신앙은 생명력은 없고 피상적인 겉모습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교조적인 지식으로 치장해 있으면 뭐 하겠어요.

규격화된 겉모습 밖에는 생명이 없는 걸요.

 

우리가 디와이트 무디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분은 학식(지식)은 없어도, 그 속에 생명이 있었어요.

 

우리 각자 각자가 적어도 '내가 만난 예수'가 없다면, 신도수를 더하는 것 외에는

나는 그런 신앙이 큰 의미가 없다고 봐요.

에덴나라

2011.01.17 12:03:55
*.199.195.40


진 예수만님
혹시 성령의운동이 지나갔다고 하는 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같은 초기 체험의 소위 성령운동이라고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인가요?

성령의 역사가 초기 오순절 마가의다락방에서의 사건을
한국교회에서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켰던 그 성령의 역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그것은 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체험을 한 것이며 부분적인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아주 희미한 것이지요. 그것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여기에 많이 치우쳐 있지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준다고 한 그 성령의 역사(요14:16)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시작으로 지금도 부흥회에서 체험하는
그것만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고 말한 것으로 보면

하나님이 인간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후,
그 후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이라는 하나님으로
인간과 계속 만나고 있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각각의 사람에 따라 다르게

현재진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어떤 현상이라  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 시대에서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지가 과제 라고 봅니다.

 

 

 

진 예수만

2011.01.17 13:05:18
*.118.18.237

제가 여기서 말한 '성령 운동의 처음 시기'는 다름이 아니라,

성령이 각자 각자에게 예수를 알게 한 때, 쉽게 말하면 각자에게

복음이 전도되는 처음 시기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적인 어떤 특정 시기하고는 전혀 무관한 얘기이지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고 하면, 신앙적인 지식이라는 게 그렇게

수십 년 이상을 지금처럼 교회에 나가서 특정 설교자의 말씀을 들어야만

반드시 열매가 맺히는 건 아니라는 그런 뜻입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오랜 시간 걸리지 않고) 급속히 예수를

알도록 역사하신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신약 기록의 초대교회 형성사를 살펴보아도 얼마나 빠르게 교회들이

창립 운영되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어요. 소요 기간이 불과 몇 달 혹은 길어야 몇 년이지요.

바울이 활동한 전체(통산) 기간을 머릿속에 대강 짐작해 보세요. 바울의 일생에서

실제로 신앙공동체(교회)를 지도했던  전체 기간이 불과 몇 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도 초대교회들은 나름대로 성장해 나갔어요. 지금처럼 체제가 완비된 것도 아닌데도

말이지요. 그리고 거기서 큰 신앙적 재목들도 많이 배출됐어요.

절대로 신앙적 큰 대목으로 성장하는데 반드시 수십 년 이상 걸릴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그러셨지요. 결국 먼저 된자가 나중 되고 또 그 반대로 된다고 말입니다.

신앙적 삶(신앙 실천적 삶)을 사는 그러한 신앙이 되어야 하지, 그저 교회 출석해서

설교 듣는다고 신앙적 재목으로 성장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믿으며, 실천하며"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게 그야말로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합니다.

마치 건강한 어린 아이가 끊임없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성장하는 그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지금의 통상적인 교회 운영 체제를 보면, 오히려 신도 각자의 신앙적 활동을

저해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그런 체제예요.

그저 자기 교회 생활에만 충실해라 그런 것을 요구하는 교회 환경이지요.

 지금 목사들의 가르침은, 계속해서 자기 설교를 들어야만 콩나물이 자라듯이

지속적으로 자라난다는 그런 말을 하고 있어요.

결국은 콩나물시루 신앙인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콩나물 시루 안에서는 규격품은 생산될지 몰라도, 재목으로는 성잘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의 무디, 죠지 뮐러, 워치만 니, 그리고 테레사 같은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한, 모두 다 이를테면 제도권 밖에 있었어요.

이러한 일들은 신앙 사안에 있어 시사점이 많은 일이지요.

 

앞단에서 언급한 목사의 그러한 가르침들(교회생활에 충성하라는 거)은

신앙공동체의 본질 위주의 얘기라기 보다는, 단지 자기 교회에 기존 신도들을

묶어 두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쪽이라고 보아야 해요.

그걸 개개인 목회자들이 나쁘다고 보기 보다는, 지금과 같은 교회 운영 체제하에서는

목사도 직업정신상의 이유로 어쩔 수가 없어요. 아마 내가 특정 교회 담임자라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동하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수백 리 원거리를 다니면서 특정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 교회 레테루를 끝까지 붙이고 다니는 것이지요.

그건 "신앙생활"보다는, 일종의 "교회생활"이지요.

그런 신앙인은 결국 교회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강남을 비롯한 국내 이름있는 큰 교회 신도들이 그런 (교회 라벨에 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가지고 신도 각자가 진정으로 예수를 직접 만나 뵐 수가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는 만나는게 겨우 담임 목사나 혹은 주위의 친분있는 다른 교인들 뿐이지요.

신앙생활에도 고통/고민이 필요한데, 그런 교회생활은 일종의 고민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종교생활을 즐기고 있든지, 혹은 한 직장에 충성하는 것과 비슷한 그런 태도일 수 있어요.

 

다 얘기하지면 긑이 없을 것이기에, 그저 생각의 대강을 전하는 걸로...

 

에덴나라

2011.01.17 14:19:39
*.199.195.40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은 후
세계는 예수그리스도의 통치세계로 전환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섭리는 계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신앙의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지 듣지 않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계속 되고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교회에서건 어디에서든간에 성서를 읽고
그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내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해야 하는 곳이 기독교 개신교교회이며,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목사들이지요.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것을 진정성을 가지고 하지 못하고 있지요.

문제는  교회가 오늘날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가차없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여  개신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 예수만

2011.01.15 08:00:48
*.118.18.237

   맞습니다. '오늘날에도 성직 계급이 필요한 것인가'에 관한 그러한

의문이 없는 사람은, 다른 점은 몰라도 적어도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 이후로는 종교적 특권계급(사제.성직자)이 용인될 수 없다라는 게

신약성서에 기록된 기본 지침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로마교회가 제도화된 이후 그러한 지침들은 철저히

무시된 것이지요. 워치만 니 신앙선대가 자신의 저서 <교회의 정통>에서

이러한 소견을 분명히 밝힌바 있어요.

 

아뿔싸! 주님 예수로 인해서 찢겨져버린 은폐되고 가려진 "휘장"이 훗날의

인간들에 의해서 지금 살짜기 다시 붙여져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만 

그런 형국이 되는 것일까요.

 

한편, 근대 교회사적으로는 '형제단(브레드린)'운동이 바로 이러한 지침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신앙공동체 운동이구요.

미국의 무디(부흥운동가), 독일 태생으로 영국에서 활약한 죠지 뮐러(기도의

사람, 천인 고아들의 아버지), 중국의 워치만 니(동양의 기독교 지성) 같은

굵직한 신앙인들이 바로 이러한 운동하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에도 형제단공동체가 소리없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에덴나라

2011.01.17 08:57:45
*.199.195.40

진 예수만님
하나님에대해 알고자 하는 열정이 남다르시군요
님의 글에서 매번 느끼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지금 이 시대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데도, 어쩌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성령의역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닌가 해요.

그것은 중세의 시각으로 보았던 성령님을
21세기에도 거기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일부 신학자들의 견해,
그리고 그 견해가 옳다면서 추종하는 대부분의 교회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목사들,
그들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요.
이것이야말로 성령훼방죄인데 말이예요.

 

예수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인간개인과의 직접만남,
이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봐요
형제단,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profile

유니스

2011.01.15 11:23:43
*.104.195.28

성직자라는 표현을 가톨릭 이외에는 사용하지않는 것으로 아는데요.

목회자라는 표현이 적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뿐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문적인 수업과 전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질병에 대한 치료를 예로 든다면 전문성이 없이 한다면

민간요법으로 구전되는 수 밖에 없겠지요.

에덴나라님께서 인용하신 부분에서

신과 인간의 직접적인 대면에 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확장으로 오늘 날의 전문적인 목회자의 무용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에덴나라

2011.01.17 09:29:36
*.199.195.40


목사는

일반적으로 목회자(牧會者)라는 뜻.
성서에서 신과 그리스도를 양의 목자로 비유한 데서 생겨났다고 하네요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구체적으로 성직자로 보고 있기도 하고 (백과사전)
또는 여러교회의 목회와 전도의 책임자로 보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목사를 의미하는 minister는 성도를 돌보고
봉사한다는 의미(servant)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자신의 양을 돌보는 목자나 이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에 오신

 그 사랑의 에수님에 비유 하기도 하지요.

 

대안이라고 한다면
교회 안에는 목회자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성도들도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른성도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또 그 성도가 그날을 이끌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목회자의 무용론이 아니라
목회자가 직업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지요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리옹~

2011.01.17 10:26:04
*.195.14.63

에덴나라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대안이라고 제시하신 것에는 선듯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헛점들이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영적으로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는 부분을 두고

그 공동체 만으로 분별할 수 있을런지요.

가끔 경험하는 것이지만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중에 제가 보기에 엉터리 자기 해석들이 많이 있지요.

따라서 무리가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을 수도 없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신학교를 세우고 그곳을 통해 배워 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세우는 것은

최선은 아닐찌라도 그 의미가 있는 것이며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것은

공동체에게 맡겨진 책임이 아닐까요?

 

사족이지만

형제교회(무교회주의)를 하고자 하시는건지요?

 

에덴나라

2011.01.17 11:22:30
*.199.195.40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다 두어도 둘 수 없는 것들인데

한번의 이야기로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한 부분씩 이야기 해 나가면서 전체가 어떻겠구나

하고 알게 되겠지요

 

교회는 영적으로 깨달은 해석을 공동체 안에서 말하고 토론하고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필요하고, 신학을 배운 사람도 필요 하겠지요

그리고 신학이라는 학문을 배우는 것이 나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

되어야 하고, 지도자의 길을 가기위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전문교육을 배운 사람의 말이 다 옳다고 볼 수도 없으며

영적으로 해석을 한 사람이 엉터리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형제교회를

진 예수만 님의글에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것은 교회가 어떤 교회냐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상고 하고 깨달음을 얻고 하면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좋은 교회인지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개신교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바라고

 염려하는 마음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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