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58960.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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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거북할까요? '폭력'을 거론하고, 거기에 '신적'이라거나 '혁명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폭력을 피해야 할 것,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 간디와 킹 목사의 비폭력 무저항은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저도 폭력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번쯤 생각해볼만한 책이 있는 것 같아 올려봅니다.
지은이 슬라보예 지젝은, 이름만 알지 그의 저작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언뜻 손이 가지 않기도 하고, 지적 혹은 현학적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기엔 현실이 너무 빡빡한 탓도 있습니다.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은 맹목이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요?
“두려워말라, 진정한 혁명을 위한 폭력을” (한겨레 1월 15일) | |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 베냐민의 ‘폭력론’ 되짚어 순수 혁명 폭력 옹호한 책 |
『폭력이란 무엇인가 』 이야기는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1892~1940·사진)이 1920년에 쓴 짧은 에세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시작된다. 당시 유행하던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을 지적 배경으로 깔고 있는 이 에세이는 폭력을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베냐민이 말하는 신화적 폭력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가리키고, 신적 폭력의 ‘신’은 유대교의 신, 곧 야훼를 가리킨다. 베냐민은 그리스 신화 속의 ‘니오베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일곱명과 딸 일곱명을 두었는데, 그 다복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니오베는 자기가 여신 레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냈다. 레토에게는 아들(아폴론), 딸(아르테미스) 한명씩밖에 없었다. 화가 난 레토는 아폴론을 시켜 니오베의 아들들을 죽이게 하고 아르테미스를 시켜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이다.
베냐민은 신적 폭력의 사례로 <구약성서>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을 든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는데, 무리를 지어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모세가 분수에 넘치도록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같은 레위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진짜 이유였다. 모세에 대한 반역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야훼에 대한 반역과 다르지 않았다. 모세가 야훼의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솟아 고라의 무리는 한꺼번에 소멸당했다. “신은 레위족 사람들(고라의 무리)을 경고도 위협도 하지 않은 채 내리치고 주저없이 말살했다.”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베냐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는 폭력, 다시 말해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이라고 말한다.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 베냐민은 이 신적 폭력을 ‘순수한 폭력’이라고 옹호한다.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2008년 저작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베냐민의 이 폭력론을 핵심 논점으로 삼아 결론을 끌어내는 책이다. 지젝의 이 책이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베냐민의 ‘폭력에 관한 성찰’이 철학적 논쟁의 중심으로 진입한 데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노력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데리다는 1994년에 출간한 <법의 힘>에 실은 논문에서 베냐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주목할 것은 여기서 데리다가 베냐민의 논리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냐민의 에세이의 배경이 된 조르주 소렐이 나중에 파시즘으로 기울어진 데서도 엿볼 수 있듯, 베냐민의 폭력론은 좌파와 우파가 뚜렷하게 구분되기 이전의 “혼란스러운 근친성” 속에서 저술된 것이며, 그런 만큼 어떤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논점이었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베냐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 피도 흘리지 않고 한꺼번에 내리치며 휩쓸어버리는 신의 폭력이 ‘최종 해결’이라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힐 가능성을 거론했다. “이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공할 만한 것은 … (하나의) 유혹이다. 어떤 유혹 말인가? 대학살을 신적 폭력의 해석 불가능한 발현의 하나로 사고하려는 유혹이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학살이 베냐민이 발설한 ‘신적 폭력’이라는 관념과 내적 관련을 맺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런 위태로운 논쟁적 방식을 통해 베냐민의 폭력론은 단숨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1995년에 펴낸 <호모 사케르>에서 즉각 “신적 폭력을 ‘최종 해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데리다”의 주장이 “정말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오해”라고 비판했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아감벤과 같이 데리다의 ‘오해’를 기각하고 베냐민의 ‘신적 폭력’을 유보 없이 옹호하는 자리에 선다. 급진 혁명론의 새로운 주창자답게 지젝은 베냐민의 신적 폭력의 구체적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의 자코뱅 공포정치, 그리고 1919년 러시아 내전 때 붉은 군대의 ‘테러리즘’을 거론한다. “신적 폭력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현상과 등치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
이렇게 지젝의 이 책은 신적 폭력이라는 이름의 ‘순수한 혁명적 폭력’을 변호한다. 이 폭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저지르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대항 폭력이다. 이 신적 폭력은 그 내부에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고 지젝은 단언한다. 체 게바라가 “진정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이끌린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칸트의 명제를 비틀어 이렇게 말한다.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함은 맹목이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혁명은 잔혹 곧 폭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이 과격 철학자의 결론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sg-
슬라보예 지젝 지음·이현우 외 옮김/난장이·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