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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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으로 인해 살처분한 돼지와 소가 200만 마리를 넘어섰으며, 조류 인플루엔자로 인해 매몰한 오리와 닭도 300만 마리가 넘어섰다고 한다. 안락사 주사를 맞은 어미 소는 마지막까지 송아지에게 젖을 다 물린 후 쓸어졌으며, 그 송아지 역시 살처분되었다고 한다. 또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내다가, 우리 밖으로 나가 차량에 실리자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고 좋아하더니만, 결국 깊은 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돼지들은 마지막까지 새끼 돼지들을 보호하느라 안간힘을 쓰다가 흙에 묻혔다고 한다. 키우던 가축들을 땅에 묻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축산업자들만이 아니라, 살처분에 동원된 사람들 역시 극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을 것이다.
이런 대량살육의 현장을 보면서 다시 노아를 생각하게 된다. 대홍수가 멈춘 후 방주의 갑판에 나온 노아는 무엇을 보았는가? 온통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과 짐승들의 시체들로 뒤덮인 바다였을 것이다. 물이 모두 빠진 다음에 방주에서 나왔을 때 역시, 세상은 온통 물에 흠뻑 불은 시체들로 넘쳐났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눈물 한 방울 흘렸다는 말이 없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본이었던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슈팀은 분명히 대성통곡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왜 창세기 기자는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것을 상당부분 그대로 베끼면서, 유독 이 대목만은 빼버렸는가 하는 점이다. 우트나피슈팀은 유일한 생존자로서 마침내 자신이 겪은 비통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해치를 열었다. 그리고 빛이 내 얼굴 위로 쏟아져내렸다.
몸을 낮춰, 나는 앉아서 울었다.
눈물이 내 얼굴에 흘러내렸다." (Epic of Gilgamesh, XI:132-37.)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태초에>In the Beginning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p. 45).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처럼, 우트나피슈팀은 자신만 살아남은 것에 대해 의기양양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생존자들은 흔히 극심한 죄의식과 심지어 절망감을 느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삶이 파괴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계속 생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에서 걸어내려와, 홍수로 인한 희생자들의 물에 불은 시체들로 황폐하게 된 광경을 보았을 때, 그런 공포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텅 빈 세상을 응시했을 때 비탄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던 것 같으며, 그런 재앙을 초래한 하나님에 대해서도 애증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방주로부터 데리고 나왔고, 짐승들을 풀어주었으며, 주저하지 않고 그 파멸자인 자신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조차도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처럼 비탄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단지 피상적인 후회를 보여주었다(창 8:20-21).”
도대체 노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창세기 기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노아 홍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표징으로 받아들이고 세상 문제에 대해 뒷짐을 지고 있었으며, , 특히 우리의 형제자매들로 창조된 동식물들을 잡아먹는 데만 혈안이 된 채 그들의 생명권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었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가?
카렌 암스트롱의 이야기는 참 흥미진진합니다. 저도 그의 책을 즐겁게 읽습니다.
하지만,
눈사람님 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신화를 성경기자들이 차용했다기보다는 근동신화의 내용에 대한 반동으로
성경이 쓰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누가복음서의 저자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라고요..
창세기의 편저자들은 고대근동의 신화에 대응하는 자신들의 사료를 정리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그중 가장 위대한 대목이 바로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하는것이지요..
거의 대부분의 신화는 해와달과 별이 피조물이 아닌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성경기자들은 달랐습니다.
이것이 태고사의 특징이지요..
미쯔라임의 태양신인 "라" 바벨로니아의 태양신"마르둑"이 당시에 존재하였지만 성서기자는 그것이 피조물임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이 고대근동의 신화를 차용하였다기 보다는 고대근동의 신화에 맞서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길가메쉬서사시도 수많은 토판이 존재하며, 지금도 프랑스의루브르박물관등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해석하지 않고 창고에 쌓여있는 엄청난 토판이 있다고합니다. 그것들도 아직 정확하게 연구된것이 아니며, 토판의 발견시기에 따른 편집에 많은 이견들이 있습니다.
동물들의 살처분에 대한 가슴아픈 이야기에 좀 어긋나는 댓글임이 분명합니다.
살처분에 대한 취지의 글에 공감하며.....
창세기 1장의 위대한 서술에 대한 웃음님의 설명은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노아설화보다는 상대적으로 후기(포로기 시절)에 완성된 문서로서 자신들을 핍박하던 이방인들에 대한 신앙적 항거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신으로 숭배받던 대상들을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로 기술하는 고차원적 신앙해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노아홍수가 기술된 문서층은 그보다는 훨씬 고대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중근동 신화와 충돌하는 측면이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아설화까지도 중근동 신화에 대한 반동적 기술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쓰고보니 이 댓글도 원글의 취지에는 좀 어긋나버렸네요... 살처분을 꼭 해야만 했을가 분노하면서...
비록 댓글이 흰구름님의 뜻과 다른쪽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닥터케이님의 덕분에 오랜만에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창세기주석을 뒤져보았습니다.
그는 성경의 홍수 설화에만 있는 독특성은 홍수 설화가 자리잡고 있는 성경의 보다 큰 문맥
안에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는 성경전체의 큰주제이며 성경의 홍수설화도
이것도 평행을 이룹니다.
하지만 우트나피쉬팀이나 지우수드라, 데우칼리온은 그것과 아주 상의합니다.
물론 닥터케이님의 말씀대로 홍수설화가 기술된 문서층이 훨씬 고대에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창세기는 창세기 1장이나 홍수설화나 편저자는 동시에 작업을 했습니다. 홍수설화가 원사료가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홍수설화는 J와P로 이루어져있으며, 창세기의 편저자들은 두사료를 가지고 자신들의 신학을 표현했습니다.
창세기1장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반동적 기술이 홍수설화의 편집과정에서도 반영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9:1에서 P는 홍수와 창조를 긴밀하게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에누마 엘리시"를 설명하자면
인류가 창조되기전 '아눈나쿠'라 불리우는 상급신들이 '이기기'라는 하급신들에게 노동을 시켰고, 결국 이기기들은 엔키의 형인 엔릴의 집앞에서 시위를 벌립니다. 엔릴과 엔키의 아버지이며 최고의 신인 아누와 엔키는 하급신들을 대신해 노동을 할 인간을 만들기로 하고 하급신중 하나를 죽여 그의 피와 지성을 자궁의 여신 닌투에게 주어서 사람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울부짖는 황소처럼 시끄러웠기" 때문에 엔릴은 그들을 죽이려 계획했고, 처음에는 역병으로 두번째는 가뭄으로 세번째는 인간이 영양분을 얻는 수단을 차단했습니다. 그후 토판이 깨져서 중간을 잃었고, 엔키는 결국 여러 계획이 실패하자 대홍수를 일을키기로 하지요. 엔키에게 인간과의 소통을 금지시키고, 계획을 옮기려하지만 엔키는 아트라하시스에게 이 비밀을알려주지요. 그후의 이야기는 노아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이처럼 홍수설화는 홍수설화 한가지로만 전해지던것이 아니었고, 그앞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지요.
창세기편저자들이 갖고 있던 사료를 재편집한 노아홍수이야기는 J와 P의 문서로 되어 있었고, P는 세계 창조로부터 족장 설화, 출애굽, 시내산 계시, 광야유랑등을 거쳐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까지 이어지는 역사적인 작품을 저작했지요. 창세기의 여덟가지 창조행위는 에누마 에리쉬와 비슷한 전승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편저자들은 직접 길가메쉬서사시나 에누마엘리쉬를 창세기에 집어 넣은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창세기의 노아홍수의 기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에누마 엘리쉬나 길가메쉬서사시를 차용한것이 아니고 에누마 엘리쉬나 길가메쉬서사시가 갖고 있던 전승과 거의 비슷한 전승을 갖고 있었다는것입니다.
마치 복음서에 Q복음서가 있었던것처럼요..
이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느냐? 원숭이와 인간의 공통의 조상에서 진화되었느냐의 차이이지요.. 우리가 원숭이에게서 진화된것이 아니듯이, 창세기의 홍수설화는 고대근동의 신화인 길가메쉬 서사시나 에누마엘리쉬등의 설화에서차용한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편저자는 신학이 있었습니다. J,E,D,P등의 사료를 갖고 있었지만 단순히 편집만 한것이 아니고 해설과 첨언도 하였고, 그것을 자신들이 갖고 있던 신학에 의해서 그리 하였습니다. 노아홍수의 설화에는 그 신학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웃음님이 자세히 설명해주셨는데, 저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그 "공통적인 전승"으로부터 갈라졌다는 견해입니다. 저도 홍수설화가 중근동 설화를 차용했다기 보다는 동일한 기원의 전승으로부터 갈라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티기독교인들의 주장과 큰 차이점이지요).
다만, 홍수설화 기술방식은 창세기 1장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배타적 서술 ("일월성신과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만큼의 히브리 신앙의 독자성은 덜 두드러진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1장을 저술한 편집자가 홍수설화까지 손을 보았는지는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베스터만의 해석은 통찰력 있는 시각으로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만, 아직 저로서는 "이것이 정답이네" 라고 할만큼의 명쾌한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심판과 구원이라는 대주제에서 볼때는 홍수설화는 분명한 메세지를 전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것이 중근동 신화에 대한 배타적인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과 홍수설화가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신학적 관점이 있는 것인지요? 뭐,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 부분은 조금 더 공부해볼만 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독교 단체들이 (한기총등)이러한 살처분 현실에 정부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어야 되는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데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단지 청정국의 이미지 때문에 아니 인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묵인해야 되는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기독교적인 지식이 없어서 노아에 대한 평가를 단정지어 말할수 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노아 가족들만 배에 타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어떤 기도을 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성서기자는 단지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만 촛점을 맞추었기에 노아 감정 상태를 표현 안했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죽은 생명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지켜볼수 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싫다고 탄원하지 않았겠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살처분에 대해 다른 방법의 대안을 내놓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들도 어떤 병만 들어도 살처분을 해야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신종플루가 번져도 즉지 않을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사람인데 ------
불쌍한 짐슬들이여!!! 사람들의 탐심을 용서하소서
안락사를 당하면서 마지막 젖을 먹이는 어미소는 끝까지 죽지 않고 아기 소가 젖을 떼자 죽듯이 소나 돼지의 생명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임을 사람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생각에는 노아에게 문제가 있는것도 아니고, 기독교인에게 문제가 있는것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인간의 생각으로 섣불리 측량 하기가 힘들것 같습니다.
화산이 폭발해서 그 지역에 살던 여러 동물들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을 방송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더군요..
화산이 분출되고 비록 동물들은 많이 죽었지만 그 지역의 생태계가 다시 살아나서
물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지역은 점점 사막화 되어 그 땅의 동물들이 풀과 먹이를 구하지 못해
아사하며 고통 당하고 있는 그런 지역 이었습니다)
물길이 다시 열리고 식물이 다시 살아 나고 동물들도 다시 살아 나서
그 지역의 생태계가 다시 더 건강하게 되살아 나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좀 더 넓은 틀의 거시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지구의 한 부분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는
때로는 사람도, 동물도 어쩔수 없이 그분이 주관하시는
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들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하나님을 탓할 아무런 권한은 없다고 없는것 같습니다.
내 생명과 이 지구 환경 자체의 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것 같습니다.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이에게 따질 권리가 없는것 처럼요..
구제역 사건은 넘 마음이 아픔니다.
안락사를 시키고 매몰 하는것이 원칙인데 그러하지 못한점은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것입니다.
또한 살처분이 능사인지 그 점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 하더군요..
하루빨리 이 재앙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참고로 저는 동물 보호론자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측량할수 없는 우리의 지식으로 해결 할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부디 이 땅의 재앙을 이제 그만 거두어 주소서!!!
추신: 그리고 혹시 흰구름님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안드시나요?
글의 말미에 동물과 식물을 우리의 형제라고 표현하며 육식을 하는 사람들을 나무래는 것처럼
보여서 물어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가 일부러 빼지 않았을까요?
노아는 방주를 지을 때부터 방주에서 나와 죽을 때까지 마음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 뺐는지는 직접 물어보기 전엔 모르겠지만
제 추측으로는
방주를 만들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에도 순종한 노아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애통해하는 모습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에도 묵묵히 순종하는 노아를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을까...
님의 글 덕분에 그때 일을 내 일처럼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