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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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아침 라디오 박재희의 3분고전에 관포지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전 내내 두 친구의 우정이 나의 머리에 머물고 있네요.
이기주의와 기회주의,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적 시대에
이런 고사성어가 오늘날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눈앞의 이익과 욕심에 머물지 말고 참된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에게 이런 친구를 원하기 전에,
내가 그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돕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管:대롱 관. 鮑:절인 고기 포. 之:갈 지( 의). 交:사귈 교.
[유사어] 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반의어] 시도지교(市道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 사이와 같은 사귐이란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
춘추 시대 초엽, 제(濟)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 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 )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倉 實則 知禮節(창름실즉 지예절)]'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의식족즉 지영욕)]'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출전]《史記》<管仲列傳> 《列子》
포숙아와 같은 사람이 많아 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달팽이님,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