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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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GAD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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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원래 인터넷에 글 안쓰는데 술 기운에 씁니다. 우선 한국교회에서는 복음주의란 말이 너무 왜곡되게 쓰여있구요 지금 한국교회의 현상황은 복음주의가 아니라 근본주의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말이죠. 그 사람들이몰트만을 볼때 분명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욕하겠지요. 하지만 사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닙니다. 굳이 노선을 설정하자면 역사적으로 성서를 바라본 프론티어중하나구요 신정통주의와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신학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종말론'입니다. 종말론은 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다루기 꺼려왔던 주제죠. 하지만 교부 특히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보면 종말이 얼마나 기독교의 핵심주제인지 아실겁니다. 몰트만은 그 종말이라는 주제를 되살려서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놓고 싶어하는겁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새로운창조이다.' 가 그의 핵심명제일 것 같군요. 하나님의 첫번쨰창조가 있었다면 죄로 파괴된 그 창조를 하나님이 종말에 완성시킨다는게 그의 신학입니다. 종말이란 절대적 유토피아를 의미하며, 우리의 힘으로 성취될 수 없는 피안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완결됀다는 점에서 차안의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변증법적인 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땅에 계시됩니다. 종말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힘을 넘어선 것이기 떄문에 우리는 종말을 기다리면서 모든것에 대해 잠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말이 주어진 이상 우리는 현재사회제도와 주어진 모든것들에 만족할수 없고 종말이 올때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명제도 따라나옵니다. 몰트만은 이것을 강조했는데 동시에 그가 간조했던건 피안의 하나님의 나라에대한 희망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절망속에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카이로스의 때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양자 즉 현재에대한 투쟁 그리고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몰트만의 신학을 끄는 쌍두마차일 것입니다. 그점에서 즉 현재에 대한 투쟁과 미래에 대한 희망 양자의 긴장속에 몰트만 신학의 창조성이 있습니다.
이답변으로 부족하다면 의문점을 얘기해 주십시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한 형제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판사로 일하고 있다는 그는 몇년 전에 간으로 심하게 고생한 이래로 몸과 생명 더 나아가서 생태계에 과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처음 읽은 신학책이 위르겐 몰트만의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위
르겐 몰트만,김균진,한국신학연구소)이었는데, 내게 전화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책을 이상한 신학자의 괴이한
문서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적어 보낼테니 그것이 이단인지, 아니면 적어도 위험스러운 것은 아닌지 판단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새악과 말이 정통 기독교가 아닌지 자기 스스로 검열했고, 주변에서도 의혹의 눈초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간단히 몇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
몰트만에 대한 호불호나 찬반이 서로 다를 수 있고, 그래서 거세게 비판할 수 있으나, 단선적으로 이단이냐, 아니냐, 자유주의
신학이냐, 아니냐는 논의는 적절하지 않은 잣대이다. 그는 살아있는 현대신학자중 독일에서는 판넨베르크(Wolfhart
Pannnenberg), 융엘(Eberhard Jungel)등과 함께 뛰어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니 몰트만을 비판할 수는
있으나 당신의 생각이 그의 책에 확고하게 의지하고 있다면 이단은 결코 아니며, 그 점에 대해 논쟁은 할 수 있을지언정 위험하지
않다."고 말해주었습니다.(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김기현 지음/복있는 사람)
음. 제가 어떻다고 평가하긴 좀 그렇고,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이 공저한 <20세기 신학>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이 비교적 정확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번 참고해보시면 평가를 내리실 때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