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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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예배론
(박근원 대한기독교서회)
조금씩 거의 2주 만에 다 읽었다. 저자의 역서인 “구원의 축제”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과 실천 이라는 장자끄 폰 알멘 책을 보다가 도저히 따분해서 따라가지 못하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렸다. <오늘의 예배론>책은 처음부터 읽혀지기 시작했다. 이 따분한 책이 감동까지는 아니지만 마음에 흥분을 주고 예배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마음의 기쁨을 한 아름 가져다 준 책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개혁을 두고 말한다면 과연 예배의 개혁을 두고 말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도대체 초기 기독공동체로 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의 교회예배 속에서 무엇이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가 무엇에 근거해서 드리고 있는 예배인지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정의할 때 흔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요약 J.J.von Allmen>이라고 말한다. 쉽게 풀어서 예배는 그 구원사건의 반복이요, 그 구원사건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행위이다. 그 구원사건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복음선포로써 반복된다. 성만찬(미사)로서 반복된다. 이 반복되는 구원사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무엇인가? 감사와 찬양이다. 회개와 결단이다. 인간의 사고나 이해의 테두리를 초월한 성령 안에서 친교에 참여함이요, 그래도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 역사의 신비의 선포요, 그 신비에 열린 몸짓을 가지는 것이 곧 예배이다” p18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하는 공동체로 불러 주셨다. 각 시대마다 문화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각도로 예배를 드려왔지만 그 본질만은 중심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예배와 성만찬의 두 기둥 속에서 초기 기독공동체에서 약 5세기 까지는 예배가 하나의 역동적으로 열려 있다가 종교개혁이전까지는 로마카톨릭의 ‘미사’라는 하나의 틀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종교개혁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예배의 예전 형식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예배인도자가 설교만을 중시하는 고정된 예배로 획일화 되어왔다. 그러다가 1960년에 동방정교회가 에큐매니칼 운동에 가담하고 페루의 리마에서 세계교회의 갱신운동에서 예전적인 예배의 회복과 예배의 역동성 속에서 예배의 축제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즉, 전통적인 예배에서는 성도들의 ‘참여’가 보편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개신교의 예배는 설교자 독주의 예배가 지배적 이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청중과 함께 말도 하고, 냄새도 맡고, 그리고 만져도 볼 수 있는 하나의 부활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하나의 축제의 장인 예배가 너무나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특히 이 책은 초대교회의 전통이해와 거기서 발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이해의 빛 속에서 새롭게 조명되면서,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향한 미래의 희망에 응답하는 예배로서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존재 의미가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에 있음을 새삼 가슴 뜨겁게 느끼게 된다. 그런 반면 오늘날 예배가 얼마나 질서 없이 아니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와 신학적 바탕 없이 드려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2011년 2월24일 ....
달팽이님, 오랜만입니다.
신학서적을 꾸준하게 읽으십니다. 짝짝짝~
저는 요즈음 다석 유영모의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을 읽고 있습니다.
얄팍한 영성이라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