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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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도 못하는 제가 독일어를 말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조금 하였기에 용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독일어 알파벳도 가물가물 하지만 말입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이 말은 우리말로 적당한 단어는 없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의 반대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남의 불행에 기쁨을 누리는 심리적상태를 말하는것입니다.
오늘 만난 몇몇의 사람들은 지진 피해를 당한 일본의 아픔에 미묘한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반일감정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저는 이런 사람들을 나무랄 마음은 없습니다. 그동안의 우리 정서가 그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고통에 직접적 목격이 양이 적기 때문일것입니다. 만일 누구라도 그들이 죽어가는 그 순간 그장면을 그 장소에서 목격한다면 미묘한 즐거움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것입니다. 그것은 공감능력의 부족으로 보아도 될것입니다.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웅진지식하우스)에서 IQ, EQ 이외에도 여러가지 지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공감지능입니다. 저는 다비안들께서 다중지능중 특히 이 공감지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글들에서 공감능력이 뛰어난 글들을 봅니다.
샤덴프로이데를 느끼기전에 공감지능이 뛰어나신분들은 불쌍함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긍휼이 여기는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글개역판에서의 히브리서 4장15절에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체휼하신분이라고 하십니다. 이 체휼을 개정개역판은 동정으로 바꾸었습니다.
나사렛대학교의 전광돈교수는 <태초에 한이 있었다>(대한기독교서회)에서 파토스에서 유래된 그 개념들은 반파토스적인 애퍼시(냉정, apathy), 준파토스적인 심퍼시(동정, Sympathy), 순파토스적인 엠퍼시(긍휼, empathy)이다. 이 세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심리학적인 함의를 내포하고 있지만,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신학적인 단초를 제공해 준다.(389쪽) 고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을 영어로도 심퍼시로 번역한책들이 많은것 같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말을 다시 체휼로 바꾸는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조성돈교수는 계속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학은 세 종류의 신학으로 분류할수 있다. 반파토스적인 애퍼시신학, 준파토스적인 심퍼시신학, 순파토스적인 엠퍼시신학이다."(같은책 390쪽) "파토스는 헬라어인 'paschein'(고통받다)에서 유래된 용어로써 존재의 심층적인 가슴속으로부터 긍휼히 체휼되는 원초적인 애상적 정념을 뜻한다"(같은책 390쪽) "심리적으로 심퍼시는 동정을 베푸는 내가 동정을 받는 타자 위에 수직적인 감정이지만, 엠퍼시는 고통을 체휼하는 내가 고통당하는 타자 옆에 있는 수평적인 감정이다"(같은책 393쪽)
불행한자들에 대한 공감이 없이는 엠퍼시를 발할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인간과 문물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며, 사랑입니다. 샤덴프로이데를 이기는 방법은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공감이 선행되어야합니다.
일본에서 큰 불행을 당하신분들과 전일본의 국민들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웃음님, 잘 읽었습니다.
파토스가 "존재의 심층적인 가슴속으로부터 긍휼히 체휼되는 원초적인 애상적 정념을 뜻한다"는 의미였군요. 개역개정은 히브리서 4장 15절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숨파데스)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로 되어 있군요. 심퍼시(숨파데스)가 "함께 고통받는다"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심파시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엠파시는 수평적관계로 풀이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