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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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수도사 The Monk by the Sea> (1808~1810)
캔버스에 유화, 110×171.5cm,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
19세기 초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가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가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평생 금욕적인 루터교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신앙체험과 신앙고백을 그림 속에 쏟아냈다고 하지요.
이 그림을 마주 대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수평으로 3분할되어 있는 한 곳에 수직으로 서 있는 한 사람.
이쪽과는 등 돌린 채 저쪽과 마주한 그의 고독의 깊이와 넓이가
마치 화면 가득한 하늘이거나 넘실거리는 검은 바다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의 발 앞은 낭떠러지이고 바다 저쪽은 가늠할 수 없이 깊고 어둡기만 합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니,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 걸까요?
어떤 무엇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겠지만
이제 그의 영혼은 무엇인가에 깊이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딛고 서 있는 땅은 풀 한 포기 없이 메마른 모래언덕입니다. 거친 황무지.
그의 앞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도록 검푸르게 넘실대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구요. 파도가 세찹니다.
그의 암울하고 어두운 현재를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척박한 땅과 더 이상 내딛을 수 없는 바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 있는 그의 탄식과 고독이 거칠고 차가운 파도소리처럼 마음을 울립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암울하고 슬프지 않은 것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하늘 때문입니다.
검푸른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어둡고 차가운 기운을 승화시키며
위로 올라갈수록 구름 속의 빛을 예고해 줍니다.
빛으로 열린 하늘. 환하고 높다랗게 정면으로 뚫린 그 하늘은 화면을 압도하며
그가 서 있는 척박한 땅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멀어진 이쪽의 하늘은 가슴 설레게 파랗습니다.
땅과 바다, 하늘이 수평으로 분할된 거대한 자연 앞에 홀로 수직인 인간.
그가 바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 바로 나인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표상이겠지요.
누구든 그분 앞에 우리는 단독자로 설 수 밖에 없지요.
그럴 때 이 그림 속 수도사처럼 나 역시 그분의 광활함과 깊음과 높음에 영혼이 사로잡혀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근심도,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다 사라지고
그저 텅 비어 버리겠지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나라는 자아감마저 사라지고 말 때
비로소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과의 교감이 시작되겠지요.
그분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겠지요.
나는 나 아닌 존재, 그분의 존재가 되는 거지요.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있음이 이것 아닐런지요.
누구든 건널 수 없다고 느끼는 좌절된 삶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발버둥쳐야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느끼는 한계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내 문제로부터, 현실로부터 등 돌리고 싶어집니다.
내 몸은 한없이 작아지고 내 맘은 어둡고 암울함으로 파도칩니다.
하늘은 나에게서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뼛속까지 외로워집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우리에게 하늘만이 희망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이 빛으로 열릴 때, 그 빛이 나를 비춰주고 내 현실을 비춰줄 때
우리 눈이 보이고 우리 영이 열려 내가 선 자리, 갈 자리가 보이게 되겠지요.
우리의 희망은, 나의 도움은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거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그림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또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평면으로만 보자면
내가 딛고 있는 땅과 하늘 사이에는 어두운 골짝이 흐르고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숙명이 가로놓여 있는 거지요. 내 힘으로는 하늘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도사의 탄식이 바로 나의 탄식입니다.
그의 존재론적인 고독이 바로 나의 고독입니다.
가로 놓인 어둠을 지나 하늘로 나아가려면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없이는 도저히 하늘에 닿을 수 없음을 그림은 알려줍니다.
그분의 수난과 부활의 십자가 사건이 그래서 내 것이 되어야 하겠지요.
나와 뗄 수 없게 상관되는 거겠지요.
사순절 동안 이 그림 속 수도사처럼 건널 수 없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 역시 그분 앞에 오래 서 있으려고 합니다.
내가 사라지고 텅 비어 고독해지고 싶습니다.
그 고독 속에서 십자가 위의 주님을 묵상하며 떨림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아침, 그 설렘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와, 하늘바람님의 해설, 멋지네요!!
저도 저 그림 가끔 봤는데, 볼 때마다 숨이 막혔어요.
광활한 우주 앞에서 한 점 같은 인간의 절대고독 같은 거,
저도 그렇게 느꼈거든요.
그러고 보니 요즘의 제 심정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는가 보네요.
하늘바람님,
어제 샘터교회의 <오늘의 기도>를 들어 보셔요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선하고 참되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에 위배되지 않음을 믿나이다.
우주 전체를 통해서만 설득이 가능한 세상 현상을
으리가 무슨 수로 다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이신 당신께 간절히 간구하오니
우리로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참된 신뢰를 상실하지 않게 하소서.
지금 이웃 일본 열도에 끔찍한 재앙이 덮쳤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었으며,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고, 극한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나이다.
그들에게 당신의 우리와 능력을 허락해주소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도 일본 사람들의 참된 이웃이 되게 인도해주소서.
세상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도희의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던 지난해 봄과 여름. 한동안 그림에 빠졌습니다. 이 그림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냥,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통증. 눈을 크게 뜨고 보기 두려웠던 그 무엇.
그래도 지금은 이 그림을 찬찬히 봅니다. 당신의 뜻을 알 수 없지만, 그저 긍휼히 여겨주실 것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은 아픈지, 짐작조차 못할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시길 간구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