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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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던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 (사진 제공 미주뉴스앤조이)
지난주 뉴스앤조이를 찾는다고 찾았다가 못 찾았는데, 오늘에야 세번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 우리가 현명하다면 침묵 안에 머물러야 한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해하는 '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기독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다. 그런 '정답'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
얼마 전, 제가 문득 느낀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 아픕니다. -sg-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곳 다비아에서는 저보다 많이 아시는 분들이 거의100%인데요(사실 저의 수준이 제일 떨어집니다.) 저에게 질문하시니 몸들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가 글쓴 것을 보시고 한번씩 질문하실때면 솔직히 부끄럽습니다.
존재란 무엇이 있다 없다 라는 철학적인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학적인 언어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범위내에서 말씀드리면요 아니 제말이 아니라 정용섭목사님께서 지으신 책 설교란 무엇인가? 66쪽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을 살면서 신앙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신비다.
여기서 제가 글을 쓰고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사실 신비한 일이죠
예수님을 사실 완벽히 잘 모르면서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이 사실 존재론의 출발입니다. 평생 살아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죽을 것이고 그분을 볼수가 없을 것인데 그분이 지금도 나의 삶속에 간섭하시고 또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존재론적인 해석이라는 의미로 위에 적어본 것입니다. 존재란 초월자를 가르키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인식하는 능력,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데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하는 것도 존재론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선생님께서 아시겠지만요
존재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였죠 그는 존재란 말은 있다란 말로 파악되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무엇이 존재 본질이다 라고 말했고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존재 그자체다 라고 말을 했죠
철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더 설명을 완벽하게 하실 것이지만 성서가 말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는 출발이 아니겠습니까?
정용섭목사님께서 쓰신 기독교는 뭐꼬?란 책에 보면 444쪽에서-445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존재의 변화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존재가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과 행위의 문제로 설명한다면 믿음은 행위를 규정하고 행위는 믿음을 평가한다. 존재론적으로는 믿음이 우선하고 인식론적으로는 행위가 앞선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이글을 보니 위의 박사님의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제가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책을 보고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인용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신학마당이나 성서마당에 들어가시면 정용섭목사님께서 존재론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있을 겁니다. 일교차가 심한데요 늘 건강하시고요 감사드립니다.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광토님의 물음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시는지
사실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너무 광범위한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단 단순히 개념 정도에 대한 질문이라 생각하고요...
존재론이라 하면 하이데거를 떠 올리게 되지요.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분리하고자 했거든요.
하이데거를 읽으시면 그가 말하는 존재론에 대한 개념을 좀더 자세히 얻을 수 있겠네요.
그는 기존의 철학이 '존재자'에 천착해 정작 '존재'를 놓치고 있다고 말하죠.
그래서 자신은 이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개념 설정을 목표로 철학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근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존재자'는 말 그대로입니다.
'존재자'란 '존재하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실체나 물체, 물질 뭐 그런 개념들이라 생각하면 편하죠.
그간의 철학들이 쭉 추구해 오던 개념이었죠.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것이죠.
물체가 또는 나라는 존재자가 '존재하는' 또는 '있는' 그 자체를 말하죠.
어떻게 말하면 '존재자'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면 좀 쉽겠나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 개념의 차이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하죠.
말하자면 '존재론'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탐구죠.
존재자와 구별한다는 의미가 내면에 깔려 있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하이데거적 표현으로 말하면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 (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내어 존재의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죠.
보통 '존재적' 이라함은 존재자에 대한 것을 말하죠.
'존재론적' 이라함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죠.
예를 들면
인간은 모든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인간 외의 다른 존재자들과는 달리
스스로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뜻이죠.
덧붙이자면 존재자의 존재는 '존재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라면 정리가 되겠나요.
스탠리 하우어스 박사님이 정목사님과 짜고 말씀 하신 것 갑네요. ^^
우짜면 이리 똑 같은 말씀을 하실까여?^^
"..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의 주장이 최소한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내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인생은 흥미로운 모험일까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르니까 답답하다 그건 아니라는 거, 그게 제게는 가장 유일한 위안인 것 같습니다.
안보여도 답답하지 않은거.. 참 신기하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