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권적인 힘의 성경적인 이름은 루아흐요, 프뉴마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움직여진 공기요 움직이는 공기, 입김, 바람 및 폭풍을 뜻하는데, 라틴어 Spiritus와 불어의 Esprit는 저 말의 본래 뜻을 잘 알려주지만 영어의 Ghost는 거의 귀신에 가까운 뜻을 나타내며 독일어 Geist는 저 단어의 본뜻이 지닌 역동적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 3:17)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자유이다.(70쪽)
한국교회는 성령을 일종의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신앙체험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소. 성령 받았다는 말을 어떤 특권처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오. 그런 이들은 성령을 신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할 거요. 바르트는 신학을 추동해가는 주권적 힘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소. 루아흐는 히브리어이고, 프뉴마는 헬라어요. 그 뜻은 바람, 폭풍, 입김, 영이오. 고대인들은 바람을 영으로 생각했소. 신기하겠지만 당연한 생각이오. 지금 우리는 바람의 물리적 현상을 알고 있지만 고대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소. 보이지는 않지만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바람이 때로는 따뜻하기도 하고 때로는 차갑기도 하오. 그것에 따라서 풀들이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오. 사람도 태어나면 숨을 쉬기 시작하고 죽으면 숨을 그치오. 그런 현상의 근원을 가리켜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소.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바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개방시키는 능력으로 이해되오. 바르트는 고후 3:17절을 인용해서 영이 참된 자유를 허락한다고 말하오. 이는 곧 신학이 자유를 준다는 뜻이기도 하오. 루터의 신학이 중세기 교회에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소.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자유의 영을 경험하려면 신학 공부를 하는 게 좋소. 거꾸로 참된 신학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유로 인도하오.
우리가 신학에 대한 오해-지독한 오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중에 하나가 신학과 신앙은 별개여서 신학은 알면 알수록 머리만 커져서 교만해진다. 그러니 당연히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리 없다. 고로 신학은 신앙생활에 해악을 끼친다.. 이런 논지였는데, 바르트 말씀은 철저하게 그 반대노선에 서 계시군요. 신학이 없으면 신앙도 없다.. 저는 이렇게까지 이해가 되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은 신학을 움직이는 주권적 힘이라니까요. 그런데도 성령따로 신학따로 알고 있었네요. "성령은 신학을 추동하는 주권적인 힘이다." 라는 것은 "신학이 있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주님,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말씀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이 아니신지요.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자유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을 밝히 알아 뵐 때야 가능할 줄 믿나이다..
성령이여, 저의 무지를 깨우소서. 아멘.
이제 자유를 맛보려하는데 가족들을 어떻게 설득?이해? 같이 신학했던 사람들에게??
제가 다칠까? 더 겁납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해서리!
제가 더 똑똑하지 못한게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굳어버린 신앙이 참 사람잡는 것 같아요!
저또한 그런신앙의 모습을 붙잡고 살았으니!?
그러나 마음속 자유에대한 갈망은 어찌 할수 없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