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하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신 이분, 즉 성령이시다. 물론 다른 영들도 있다. 인간이 타고날 때부터 지니는 선하게 창조된 영혼을 오류와 혼란으로 몰아넣는 악마적이고 허무의 영들이 있는데, 이런 영들은 추방되어야 한다. 이 모든 영들은 저 주권적 성령이 아니다. 이 중에 가장 훌륭한 영에 관해서도 그것이 있는 곳에 저 자유가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모든 영들을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것의 풍향이 어떠하며, 그것이 위로부터 불어오는지 밑으로부터 불어오는지, 무엇보다 저 신적인 자유 속에서 역사하여 인간의 자유를 불러일으키는 성령과 항상 구별되어야 한다. 서방교회가 채택한 니케아신조에 보면 이 영은 “성령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시오, 생명의 시여자”이시며, 이어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로 되어 있다.(70쪽)
위 바르트의 글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오. 하나는 모든 영들을 시험해보아야 한다고 사실이오. 악한 영도 막강하오. 교회 안에서도 악한 영들이 활동하오. 바르트 시대를 예로 들면 히틀러의 민족주의에 부화뇌동한 ‘독일 그리스도인들’에 해당하오. 오늘 한국교회도 이런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필요하오. 경쟁만능주의를 부추기는 소리는 분명히 악한 영의 소리요. 반공주의도 악한 영의 소리요. 내가 보기에 4대강 토목건설을 찬성하는 소리도 비슷하오. 그런 소리들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가 아니라 어떤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게 하오. 다른 하나는 성령이 바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오. 그것은 니케아 신조가 말하고 있는 것이오. 영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오. 생명과 자유를 일구는 영이 하나님이오. 이런 차원에서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타종교와의 대화가 가능하오. 타종교도 역시 생명과 자유를 일구고 있기 때문이오. 타종교에서 활동하는 영이 곧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들과 대화하지 못할 게 없소. 그렇다고 종교다원주의가 옳다는 말이 아니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가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오. 신학은 이런 영의 활동을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극할 것이오. 그대는 좋은 신학책을 읽도록 하시오.
2만5천원 주고 기독교사상 지난호를 6개월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1964년도 인가 65년도 기독교사상지에 소금 유동식 선생님께서 내가 만난 신학자들이라는 글을 기고 하셨는데 헨드릭 크레머, 폴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 그리고 칼 바르트와 만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시 유동식 교수님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틸리히는 초기기독교는 절대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동양종교 특히 불교의 의미를 재해석 해야한다고 강조한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는 군요. 그리고 불트만의 경우에는 유동식 교수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동양인들에게도 그리스도 사건이 어떠한 의미를 가져야 하지 않아야 되냐고 묻자 불트만은 단도직입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와 만남이 없는 인간에게 그리스도께서 작용할 수 있을까? 신비적인 객관적인 작용을 기대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순간 불트만의 모든 책과 논문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하네요. 마지막으로 바르트의 경우 힌두교에도 구원이 있을까 하는 질문에 바람은 자기 뜻대로 불어가며 영이 있는 곳에 주도 계신다. 아무도 성령의 역사를 막을 수 없다. (중략) 힌두교에도 그가 뜻하신 다면 역사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이 사실을 확인할 것이냐? 성령이 힌두교 안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누가 보았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적인 경건이 아닌 죄인의 해방인 것이다. 과연 힌두교속에 죄인의 해방이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떻게? 복음은 사변도 아니요 명상도 아니다. 그런 것 속에 과연 인격적인 만남에서 오는 해방과 자유가 있을수 있겠는가? 라고 답을 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