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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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하마르티아hamartia(비극적 결함, 비극을 불러오는 성격적 결함으로 번역할수 있다)' 라고 표현한 이 '실수'는 무지해서 저지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순전히 윤리적인 과실도 아니다. 이를테면 양자를 합쳐 놓은 것에 가깝다. 상대를 해치려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아니나, 일의 결과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잘못이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은 알기 쉬운 예를 들어 하마르티아를 설명해 준다. 창던지기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고 치자. 그가 훈련장 안에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뛰어들어 그가 던진 창에 찔려 죽고 만다. 이 경우, 창을 던진 남자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 뜻밖의 재난atychia(아티키아)은 예측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가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도로 창을 던졌다면 이는 분명한 범죄adikema(아디케마)다.
하마르티아는 아티키아도, 아디케마도 아니다. 인적이 없는 도로를 걷다가 문득 여기서 창을 던진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어디까지 날아갈까 시험해 보고 싶은 유혹을 참지 못하고 창을 던졌다가, 하필 그때 길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사람을 맞히고 만다. 이런 과실이 바로 하마르티아다. 이 경우, 위험을 예상하고서도 마음의 유혹에 넘어가 창을 던지고 말았으므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결백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창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도 매일, 차를 몰다가 한눈을 판다거나, 깜빡하고 약을 잘못 먹는다. 그런데 비극에서는 이렇게 무심코 저지른 실수 하나가 어머어마한 재앙을 초래한다.
위 글은 히토쓰바시대학의 후루사와 유코 교수가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나온 문학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이야기 한 내용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죄에 대한 여러가지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중 알려진것이 하마르티아인데 이 하마르티아를 과녁이 빗나간 화살정도로 알려져 있지요. 성경은 죄를 우주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부터 우주에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것이라기 보다는 그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만들었다는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범한 실제적 죄는 하나님같이 되어.....라는 개념의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입니다.
죄인이라는 개념을 생각합니다.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죄인으로 표현한곳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죄인은 죄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실존적인 위치가 바로 죄인이라는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고, 죄로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과나무를 보자면 그 나무가 열매를 맺던지 맺지 않던지 간에 그 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새싹이 나서 막 자랄때의 묘목들은 무슨나무인지 잘 구별하기 힘듭니다. 전문가들은 잘 알겠지만, 저 같은 문외한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수 있지요. 사과를 보고 사과나무인줄 알고, 감을 보고 감나무인줄을 알지요. 하지만 제가 열매를 보고서 비로소 알수 있었던 그 나무의 정체는 이미 열매 이전부터 정해진 상태입니다. 설령 사과나무가 어떠한 이유로 사과를 맺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나무는 사과나무라는것입니다. 열매와 상관없이 나무의 위치는 이미 존재합니다.
죄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것을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것을 하고 싶어하는 그런 존재론적 위치가 바로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것을 한 사람이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것을 하게될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죄인이라는것입니다.
말장난같지만 다시 반복하여 말씀드린다면, 죄인이라함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고, 그냥 죄로 되어진 사람이라는것입니다. 사람 자체가 100% 죄로 되어졌다는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 죄인이나 덜 죄인은 없습니다. 모두다 죄인일뿐이지요. 나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이런 죄를 지었다라는 말정도는 그냥 사람끼리 대화할때는 사용할수 있으나, 기독교적으로는 인정될수 없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이나 짓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다 그 죄에 대한 죄인입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람이나, 히틀러나 아주 똑같은 100%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정의로웠던 사람이 불의했던 사람을 암살하려했다는 사실은 도덕적사회에서나 인정받을수 있는것이지, 선과 악으로 구분할수 있는 상황은 아닐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는 순간이 단 1초도 존재하지 않지요. 그래서 시편기자는 죄악중에 출생했고, 모친이 죄 중에 잉태했다고 고백하였나봅니다. 죄중에 잉태된자가 최악중에 출생한자가, 밥을 먹을때나 책을볼때도 다 죄악중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하마르티아를 생각해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것이 아티키아도 아니고, 아디케마도 아니고 진실로 하마르티아였던 것인것 같습니다.
하마르티아 대한 설명을 잘 들었습니다.
평신도들은 이런 글을 읽고 있는데,
목사님들은 도덕주의 차원에서 신자들을 닦달하고 있으니,
좀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