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자유게시판으로 올렸더니 아마 정목사님께서 못보신 거 같아서
다시 이곳 질문방으로 옮겨왔습니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목사님, 위의 글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쭈어봅니다.
위에서 대화 내용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자신과 다른 하나의 대상으로 구분짓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궁금한 부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도 결국 선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말은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는 이 반문,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는 이 표현은 결국 논리적으로 하나님 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는 뜻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고
나아가서 예수님도 죄가 있다는 뜻으로도 오해할 여지가 있어 보여서 드리는 말씀입니다.(주여, 용서하소서)
이런 질문이 경솔하고 대죄에 해당되는 줄 알지만 신성모독을 감수하고 여쭈어봅니다.
십자가에서 살아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고백과
십자가 사건 전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는 자기인식 사이에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 사건 전의 예수를 죄없는 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설명을 부탁합니다.
또 한 가지 추가질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어서 무화과가 열릴 때가 아니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할텐데
그 상황에서 왜 나무를 저주했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모순 치고는 너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올려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바른 영성을 위해서 좋은 신학서적을 읽어야 한다는 충고를 늘 새기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추천해 주신 김동건 박사님의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를 읽고 있는데
첫장 <성경>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냐, 역사적 산물이냐, 대립적인 관계에서 진술하고 있는듯 느껴졌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비평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대하면 반드시 역사적 산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터인데
김동건 박사님은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쓰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냐, 역사적 산물인가? 이런 대립적 도식이 조직신학적으로 과연 정당한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는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받아들이더라도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혹시 틀린 생각인지요?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바로는
정목사님의 성경관과 김박사님의 성경관은 약간 차이가 있어 보이던데요.
앗, 오메가 님의 정체가 뭐에요?
책을 설렁설렁 읽지 않고 정확하게 읽는군요.
성경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김동건 박사님과 저 사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문제는 그 차이가 극복될 수 없는 거냐 아니냐 하는 거겠지요.
그건 그렇고
김 박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역사적 산물이냐 하고 대립적으로 설명한 이유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단순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은 독자들의 입장을 배려하고 쓰기도 하고
저자의 생각에 집중해서 쓰기도 하는데,
김 박사님의 그 책은 전자에 해당되는 거에요.
거기서 언급되는 역사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개념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런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은 변증법적인 역사발전에 의한 산물에 불과한 거지요.
만약 역사를 종말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성경을 역사적 계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어요.
김 박사님의 책은 본격적인 신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즉 평신도들을 위한 해설서이기 때문에
역사 개념에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그 책을 읽고
두 사람의 차이점을 찾아냈다는 것은
오메가 님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네요.
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ㅎㅎ
제 정체가 무엇이냐고요?
글쎄요? 제 정체는 저도 잘 모릅니다.
오늘은 이런 인간이었다가
내일은 저런 인간이었다가
어느날은 성령충만한 것 같다가
또 어떤 날은 자기성취에 푹 빠져있기도 하고요
제가 봐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늘 마음으로는
정용섭 목사님께 영적인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을 갖고 삽니다.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질문할 곳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영광! 정목사님께는 감사!
오메가님! 반갑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댓글을 답니다.
무화과 나무의 저주는 유대교와 관련이 깊습니다.
때아닌 시절에 무화과 열매를 찾는 예수님의 연목구어적인 태도가
저도 가혹하다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선순위로 놓고 생각해 볼 문제는
때도 아닌데 잎사귀만 무성했던 무화과 나뭇잎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그 화려한 잎사귀로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열매는 없는 포장지만 화려하고 내용물은 없는 선물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당시의 유대교를 가리켰고 오늘 날 한국의 개신교를 말할 수 있겠죠
종교적 열성은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 , 작금의 개신교
이런 종교를 예수께서는 저주하신 겁니다.
차라리 열매가 없다면 잎사귀라도 무성하지 말던가
잎가귀가 무성하다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던가
본질과 방향성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는 껍데기 뿐인 당시의 종교가
너무 왕성했기에 예수님께서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성장 보다는 성숙된 신앙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콰미님,
제 질문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수고스럽게도 설명까지 해 주셨군요.
위의 설명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늘 그렇게 설교하지요~
예수님 당시 유대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영적빈곤상이나
유대교 지도부들의 부패와 무능, 위선은 이미 복음서 여러 곳에서
고발하고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콰미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생명을 파괴한 사건은
무화과 나무 저주사건이 유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참뜻을 외면하는 유대교를 고발할 의도였다면
몇 마디의 설교로도 충분할텐데
왜 굳이 생명을 죽이는 퍼포먼스까지 벌였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습니다.
차라리 성서기자가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러라>는 구절을 뺏더라면
독자들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갈등도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로서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을 제기해 본 것입니다.
그토록 생명지향적인 삶을 사시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주님께서
단지 유대인들의 영적무능을 꾸짖기 위해서
때도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한게 과연
옳은가 하고 말입니다.
저는 성서텍스트를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을 파괴하면서까지 무리하게 해석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행동하신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텐데
그리고 그런 사실을 모를리 없는 성경기자가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러라>는 구절을 남겼을때는
오늘의 독자들이 모르는 깊은 내막이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복음서마다 서로 다른 동기로 인용되고 있다는 게 그 반증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성서텍스트가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있는 거지요.
2000년의 긴 시간을 한 순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다시 한 번 인간의 피조성을 일깨워주는군요.
고난주간이군요.
겸손해져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메가 님,
두 가지 질문을 주셨네요.
대답하려면 나도 따로 책을 찾아보고 준비를 해야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상식적으로만 대답하겠어요.
1. 복음서에 나와 있는 각각의 구절들이 다른 구절과 딱 맞아떨어지는 거는 아니에요.
서로 모순되는 표현들이 적지 않다는 거지요.
여기서 핵심은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군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격이 구분된다는 게 그리스도교의 기독론인데요.
그런 관계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다르면서도 같다, 같으면도 다르다는 관계의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분으로 인식했고,
자신에게 대해서는 그것을 유보했습니다.
마지막 때를 아버지만 아시고 자기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선한 분은 오직 아버지뿐이라는 말과 통하는 겁니다.
이런 명제에서 예수님도 죄가 있는 분이라는 말이냐, 하는 논리를 펴는 건 잘못이에요.
아버지만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말은 예수의 인성을 전제하는 것이고,
예수도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가 부활 승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거이에요.
이 두 가지를 평면에 놓고 비교하면 안 된답니다.
2. 무화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비유이고 상징이에요.
때가 안 되어도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런 명령에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강조하는 말이 아닐까요?
잘 모르겠네요.
이건 난해구랍니다.
그냥 지나가세요.
오메가 님은 신학적인 사유의 세계로 발을 디뎠네요.
좋은 책을 읽도록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