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통념화되어 있는 이원론은 그 뿌리가 아주 깊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계(감각적 현실 세계)를 실제가 아닌 가상의 세계로 보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초월적 세계)를 가상이 아닌 실제의 세계로 보았다.
즉 현상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할뿐 이데아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원형이라고 보았다.
하여, 그는 감각적 세계로부터의 해방과 초월적 세계로의 상승을 매우 중시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는 감각적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를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물론 현상적으로 보면 영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육체가 영혼의 감옥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안에는 선을 지향하는 영혼의 욕구와 함께 악을 지향하는 육체적 욕구가 있고,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그리스도인 안에도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공존하고 있으며,
물리적인 세계 또한 빛과 어둠 · 음과 양 · 하늘과 땅 등 모든 것이 이분법적인 존재 양태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삶 또한 선과 악 · 현세와 내세 · 영혼과 육체 · 내재과 초월 · 거룩과 세속이 맞닿아 있거나 혼재해 있으니까. 그리고 이원론적 시각으로 세계와 삶을 바라보면 교통정리가 아주 잘 되니까.
사실이다. 영혼은 초월적 세계로, 육체는 내재적 세계로 구획정리를 해버리면 모순과 역설의 이면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또 두 세계가 공존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긴장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신앙 생활은 더더욱 그렇다.
신앙은 내세와, 생활은 현세와 짝지어 놓으면 신앙과 생활의 괴리감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하등 없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되고, 일상 생활은 세속의 방식을 따라 살면 그만이다.
그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겪이다.
물론 그것이 플라톤의 진의는 아니지만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은 자기 편리한대로 이원론을 그렇게 적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원론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참된 신앙의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원론은 하나님 안에서만 인식 가능한 창조의 실상을 하나님 밖에서 이해하려 한 인식론적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비와 오묘로 가득한 창조 세계를 이성의 눈으로 파악하려다 보니 하나님 안에서 나뉠 수 없는 세계(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두 영역으로 쪼개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고, 두 영역이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오독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이원론의 눈으로는 창조 세계의 진면목을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창조의 영광을 기뻐하거나 찬양할 수도 없다. 창조의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님나라의 역사와 그 안에서 빚어지는 빛과 어둠 · 죄와 자유 · 회개와 구원의 변증법적 긴장과 감격도 맛볼 수 없다. 신앙의 성숙 또한 결코 도모할 수 없다.
창조 신앙의 진정한 위대성은 영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를 하나님 안에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보는 것에 있고, 진정한 예수의 세계는 이원론적 이분법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열리는 신비와 오묘의 세계이니까 말이다.
그렇습니다.
신비와 오묘의 세계(진정한 예수의 세계)를 끊임없이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경험과 영적수고가 필요하더군요.
부활절기를 보내면서 참된 신앙을 회복해 가는 교회들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목사님, 어여쁜 꽃들과 눈꽃이 어우러지는...
4월의 아름다운 정취를 맛보시며 행복하시고요.
더 많은 글들을 나누어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