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은 이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이 대상으로부터 동떨어져서 혼자 자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대단히 피상적이고 완전히 유치한 이유에서 신학에 발을 들여놓았을 수도 있다. 확실히 그는 그가 감행한 바를 미리 알 수 없었고 지금도 그것을 결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일단 신학에 착수했다. 이제 그가 신학자인 것은 이 대상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아무리 어리석고 불안한 심정과 너무 약한 두뇌를 가졌을지라도 그러하다. 그는 이 대상과 희롱을 하거나 싸울 수 없다. 그는 이 대상과의 대면에서 오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이 대상은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불안은 어떤 사람이 멀리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천둥번개를 멀리서 볼 때 느껴지는 것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대상은 그를 찾아낸다. 이 대상은 그가 있는 그곳에서 그를 발견한다. 이미 그가 있는 그곳에서 이 대상은 그를 찾아냈고 발견하였다.(86쪽)

 

     ‘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은 하나님이요. 신학자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소. 이런 표현을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마치 친구를 대하듯 대면할 수는 없소. 우리가 지구의 공기를 대면할 수 없듯이 말이오. 그 공기 안에 머물 뿐이오. 그러나 그런 사태 앞에 놓인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바르트는 하나님을 신학의 대상이라고 표현한 것뿐이오. 여기서 신학을 신앙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읽어도 좋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관조할 수 없다 하오. 중요한 관점이오. 지식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종교적 교양으로 받아들일 위험성이 크오. 뭔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말은 하지만 그것은 남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것에 불과하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신학이나 신앙이 가능하지 않소.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다고 해서 사랑을 알거나 경험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오.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유치한 것이오.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앎을 완전히 무시하는 열광주의에 빠지지 않되 하나님과의 긴밀한 영적 관계를 놓치지 않는 길은 어디에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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