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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학적인 실존은 파도에 밀리거나 파도와 싸우거나 간에 이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서 고독하게 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신학적인 실존은 인간 일반의 실존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실존이요, 신구약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오히려 이 성경 안에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불러 모아졌으며 함께 유지되고 지탱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실존이다.(91쪽)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자의 실존은 세상에 놓여 있지만, 그 세상에서 고독한 상태에 머무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들어 있다 하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시오? 이를 단순히 교회 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말로 듣지 마시오. 어느 누구도 독단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없소. 그런 경험은 사이비 교주들에게 해당되오. 그리스도교의 신앙 경험은 지난 2천년 역사와, 더 나가서 구약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말이오. 아브라함의 소명을 알지 못하면 오늘 우리의 신앙도 빈껍데기가 되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적 신앙의 세계를 정확하게 포착했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승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제사의식에 담았다는 것이오. 이스라엘을 제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소.
오늘 바르트 묵상 말씀을 읽다가 불현듯 샘터교회의 '오늘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우리 샘터교회에서는 주일대표기도 없이 공동으로 이 '오늘의 기도'을 드립니다.
왜 우리의 신앙(신학)이 교회공동체와 불가분리의 관계인지,
아니 왜 그러해야만 하는지, 오늘의 말씀, 기도문에서 깨닫습니다.
주님, 주님께선 성스러운 예배중에 임하시옵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는 모든 일상을 멈추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였나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전체 인생의 매 순간에서
지금 이 자리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피조물인 우리의 마땅한 도리이며,
여기서만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나이다.
사랑의 하나님, 간절히 비오니
우리의 삶이 늘 예배와 영성으로 가득하고,
종말에 하나님이 이루실 생명을 향한 희망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봄에 돋아났다가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찰나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빛을 비춰주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오니
우리가 어찌 절망하거나 교만할 수 있겠나이까.
오직 감사와 기쁨과 순종만이 있을 뿐이나이다.
죄로 인한 죽음의 권세를 굴복시키고 부활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