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는 무엇이오? 단순히 없다는 뜻으로만은 이 무의 세계를 다 설명할 수 없소. 오히려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무일 수도 있소. 여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분명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오.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시오. 저 피에타 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바깥의 세계일지 모르오. 피에타 상이 아닌 세계, 그러니까 피에타 상을 중심으로 하면 피에타 상이 없는 세계가 곧 무라는 말이오. 여기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목사로 존재하는 자이오. 이걸 거꾸로 말하면 그의 바깥 세계는 목사가 아닌 세계이오. 모두가 목사라면 목사가 존재할 수 없소. 목사 아닌 세계가 곧 무라는 말이오. 결국 무가 유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인 셈이오.
이런 설명이 어떻게 보면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소. 그렇지 않소. 말장난이 아니라 서양철학에서 오랫동안 논의된 주제에 속하오.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무는 없다는 말인가?” 세상의 삼라만상을 잘 보시오. 아니 지구의 생명만 보시오. 동물과 식물로 되어 있소. 그 중간은 없소. 토끼와 개나리 중간쯤 되는 생명체는 없소. 그 이유가 무엇이오? 그렇게 진화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진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도 모르오. 세상의 생명이 모두 진화 원리로만 일어난 것도 아니오. 오히려 돌연변이가 진화의 중심일지도 모르오. 생명이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완벽하게 해명할 사람은 없소. 그것은 비밀이오. 영원한 비밀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소. 이것은 백 명의 악기 연주자들을 연주장에 모아놓고 자기 마음대로 악기 소리를 내라고 주문을 했더니 갑자기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울려 퍼진 것과 비슷한 현상이오.
지금 우리의 경험과 판단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지나칠 정도로 고정되어 있소. 그래서 하나님 나라도 이런 존재하는 것들로 이뤄졌을 거라고 생각하오. 심지어 멋진 집과 맛있는 먹을거리가 충분히 갖춰진 어떤 공간으로 여기오. 죽은 뒤에 그런 천당에 가서 영원무궁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니 기대하오.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만 하오. 어떤 것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소. 3차원에서 4차원으로 바뀐 세상에서는 3차원의 생각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같소. 우리가 허무와 일치시킨 그 무가 큰 역할을 하는 세계일지 모르오.
목사님!
장자에 보니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또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있음이 있으면 없음이 있게 마련이다. 또 있음 이전의 그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있어야 한다. 뭐 어쩌구 저쩌구 더 써있습니다.
오강남교수는 장자의 해설을 하면서 도덕경 제40장을 끌어와서 온 세상모든 것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오교수는 장자가 무라는 말을 세 가지 의미로 썼다고 합니다. 무a, 무b, 무c를 편의상 정의해 놓고, 유와 대칭하는 무a가 있으면 그것에 앞서 무b가 있었고, 그 무b에 앞서 무c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의미에서 무a는 상대무인데, 상대무는 절대성이 없으므로 다시 초극해야하며, 무a를 초극한 무b가 등장한며, 이것이 유와 상대무까지 초극한 절대무가 된다는것입니다.(장자 오강남 풀이 현암사)
다석에 따르면 "없이 있는 것", "무와 유가 부디치는 것"이 '하나'다. '하나'속에 '유'와 '무'가 들어 있다. 다석은 상대와 절대, 유와 무를 아우르는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으로 표현했다. '없이 계시다'는 것은 상대적 유무를 초월한 존재를 나타낸다. 상대적 유무에 매이거나 걸리지 않으므로 이 세상에서는 없다고 해도 괜찮은 존재이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떤가?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 없이 계신 하느님은 "몸이 아니라 얼이다. 얼은 없이 계시다." 그리고 없이 계신 하느님은 세상에서는 없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없으면서 '더 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이다. 따라서 다석은 "없는 것을 믿는다/" 하였고, 인생의 구경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러고 하였다. 없이 계신 하느님은 유와 무를 종합한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유무를 합쳐 신을 만들고, 천지유무를 통하는 것이 신통이다. 신은 하나이다."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자리는 온갖 시비를 넘어서서 '하나 됨'에 이르는 자리이다. "시시비비 따지는 것은 내가 지은 망령이요....... 하느님을 믿고 만족하면 일체의 문제가 그치고 만다. 시비의 끄트머리는 철인의 경지에 가야 끝이 나고 알고 모르는 것은 유일신에 가야 넘어서게 된다. 없이 계신 하느님과 통하면 신통하여 천지유무를 통하고, 옳고 그름, 앎과 모름을 넘어서 하나를 통하게 된다. 옳고 그름과 앎과 모름의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인 논리와 주장을 넘어서 둥글게 하나로 통하는 가운데와 떳떳함의 세계는 유무상통하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자리에 가야 열린다.(다석 유영모 박재순 지음 현암사)
있는것과 없는것은 원래 그러한것이 아니고 인간이 편의상 구분한것이 아닌지요...
사르트르는 존재론을 '존재가 자신을 나타내는 그대로, 다시 말하면 아무런 매개도 없이 존재의 현상을 기술하는것'이 될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또 사르트르는 의식은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물존재와 달리 의식은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의식은 무라고 할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있음과 없음이 명확하다면, 신을 두고 있다 혹은 없다 라고 말할수 없을것입니다.
목사님의 글의 제목과 반대의 생각을 해봅니다. 유는 있음을 의미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