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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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아에서 많이 사용 되는 단어 중 하나가 '진보'라는 것이다.
진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서로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동일한 기표가 다른 기의로 사용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으며 '진보'라는 언표 또한 이에 포함되어 있다.
서로가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민주당과 노무현 정부, 노무현 정부 및 참여당과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등 진보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여 지지만 하나의 범주에 집어넣기 힘든 경우들이 서로가 ‘진보’를 외치며 존재한다.
또한 사회주의의 붕괴이후 ‘우파’로 불리던 시장주의자들이 ‘좌파’로 등장하기도 하며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혁명적 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이 ‘보수주의’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 하에서 결코 같이 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사실 너와 나는 별반 다르지 않아 우린 한편이야"라고 하며 '동질성'을 주장하는 당혹스러운 일도 발생한다.
재벌과 한나라당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반대하던 세력에게 '교조적 진보'라 낙인찍으며 한미 FTA를 추진하던 ‘유연한 진보’의 노무현 정부도 어쩌면 그러한 범주에 포함될지 모르겠다.
'교조적 진보'와 '유연한 진보'사이에 진보란 개념이 어디까지 책임을 담보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이에 '진보'의 개념을 한번 쯤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 이를 글로 써서 다비아 사랑방에 올린다.
이 글은 나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탈근대에 대하여 많은 글을 써주신 분들과의 접속을 통하여 생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진보'라는 언표가 이렇듯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된 데는 그것을 시간상에서 사용한 주체들의 다양함 때문이다.
진보의 개념을 사회ㆍ역사적으로 확장하여 사용한 세력은 19세기의 부르주아 사상가들 이었다.
헤겔, 콩트, 스펜서 등등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위해 진보의 개념을 사용했다.
베르그송은 "공간화 된 시계적인 시간관념"의 산물로 정리한다. (베르그송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닌 기억과 관계되어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시계 등의 물리적인 계측기의 측정을 통하여 수량화된 시간, 덧셈 뺄셈이 가능해 변화의 누적에 따라 양적으로 증가하는 개념으로 정리되는 것이 19세기적 진보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기원이 있고 이것으로 부터 태동한 역사가 이 기원이 목표로 하는 목적의 완성인 필연적 미래로 향해 간다는 것이 19세기 진보적 담론을 한계 짓고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배치는 가장 혁명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맑스조차 벗어나지 못하였다.
맑스는 '역사발전의 5단계론' - 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공산주의 - 의 '역사발전의 법칙을 통하여 이러한 질적 전환을 전제함에도 불구하고 양적누적의 진보개념의 인식론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은 20세기에 몰락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의 무덤이기도 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에서 '진보'라는 말이 가지는 힘은 무척이나 강력하다.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진보란 개념은 근대화론자들 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사학자인 W.W. 로스토 같은 경우는 맑스주의에 반대하면서 그 나름의 단계론에 근거한 진보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진보란 개념은 어느 한편에 속해있지 않다.
진보란 개념은 멀리는 계몽사상가들과 관계되어 출발한다.
디도르나 달랑베르의 <백과사전>의 일부 내용들이 개념화 하지는 못했지만 진보란 개념과 이어져 있다.
물론 이들은 역사적 변화의 진보가 아니라 이상적인 상태의 역사적 불변성이 더욱 중요하였지만 '역사가 공정하고 가혹한 심판관'이 된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에서 진보와 이어진 부분을 보여준다.
“역사가 심판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루이 15세 때 인물인 튀르고는 그의 저서 <부의 형성과 분배에 관한 고찰>이라는 저서에서 '어떤 사회의 특징은 그 사회의 과거가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라고 주장하여 진보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드러냈고 이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철학자이며 달랑베르 등과 함께 <백과사전> 준비작업에 참여한 콩도르세에 의해 드디어 진보의 개념화가 이루어진다.
콩도르세는 불가피한 결과로 '누적된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과학기술의 힘이고 이것 때문에 인간의 진보가 필연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의 단계론을 주장한 것도 아마 콩도르세가 처음일 것이다. - 10단계설
과거의 누적과 이의 연속으로 현재와 미래를 정의 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누적의 과정을 '진보'라는 원리에 의해 정의하는 것이 19세기 이후 성립된 역사와 진보의 공통 성분이다.
이처럼 진보의 개념의 바탕에 근대적 시간관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는 쉽다.
수량화된 시간을 좌표삼아 이질적 사건들을 하나의 선분아래 배열하는 선형적 시간의 관념, 시간의 누적처럼 변화들 또한 누적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변화의 폭이 심화ㆍ발전될 것이라는 진화 내지 진보의 관념이 그것이다.
이를 통하여 역사발전의 논리는 법칙으로 자리 잡고 동시적인 수량적 시간의 한 지점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회 또는 사건들조차 이 기준에 배열되어 후진적인 것이나 선진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진다.
조선의 한반도는 서구에 비하여 덜 진보된 사회가 되고 아프리카의 부족들은 조선보다 처진 것이 된다.
진보의 기준으로 자리한 서구 문명이 자신과 거리의 원근을 미개의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는 이질적인 것이나 다양한 것이 아니라 미개한 것과 문명화된 것, 멈춘 것과 움직이는 것, 느린 것과 빠른 것으로 분류되고 비교ㆍ평가 된다.
이렇듯 역사를 진행ㆍ가속시키느냐 아니면 멈추게 하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반동'이 구분되어 진다.
통속적 맑스주의의 '진보'역시 이와 동일선상에 놓여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맑스의 경우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 보다 우수함을 주장할 수 있어야 했는데 이것은 상대적 차이를 넘어서 두 계급의 우열을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아래 구분지울 준거의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생산력’이라는 개념이다.
헤겔의 역사의 종점처럼 자의적인 기준을 넘어 좀 더 내재적인 기준을 끌어들인 것은 평가될 만하다.
즉 생산력 발전을 촉진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진보와 보수반동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기준으로 상이한 문화와 사회를 하나의 선형적 시간적 순서에 배열한 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초월적 존재의 근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생산력이 비교 가능한 양적개념으로 사용되는 순간 맑스와 엥겔스가 생산력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인간과 자연의 대사’라고 밝힌 정의는 무시되고 투입과 산출에 따른 생산성으로 축소ㆍ변질되어 버린다.
물론 이는 맑스의 생산력 개념이 근대성에서 한쪽 발을 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라는 것에 대한 독일작가 '하인리히 뵐'의 재미있는 글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한 늙은 어부가 잠을 자고 있었다.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 할아버지가 자는 모습을 보았다. 해가 중천에 있는데도 계속 잠만 자는 할아버지가 이상해서 이렇게 물었다.
“할아버지, 고기잡이 안 나가세요? 해가 저렇게 높이 떴는데.”
그러자 할아버지는 눈을 슬며시 뜨면서 말했지요.
“벌써 새벽에 한 번 다녀왔네.”
관광객과 할아버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럼 또 한 번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고기를 그렇게 많이 잡아 뭐하게?”
“아, 그럼 저 낡은 배를 새 것으로 바꿀 수있잖아요.”
“그래서?”
“아, 그럼 새 배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더 큰 배를 사고 사람도 더 많이 고용할 수가 있지요. 그럼 더 많은 돈을 벌 테고.”
“그렇게 벌어서 뭐하라고?”
“그럼 공장도 세우고 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요.”
“옳지. 그러고 나면 뭘 하지?”
“아, 그렇게만 되면 할아버지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고 편안하게 누워서 지내실 수 있지요.”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잘 지내고 있다네.”
위의 글이 생산력이나 생산성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분석한 글이 아닌 문학적 글이지만 할 만한 말은 다한 듯하다.
어부의 말은 자본주의적 자연의 수탈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이것에 대한 멋있는 탈주를 보여준다.
클라스트르는 <국가에 저항하는 사회>라는 그의 책에서 돌도끼를 사용하는 원주민에게 10배의 효율이 좋은 쇠도끼를 주었을 때 동일한 시간 일해서 10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10분의 1의 시간만 일해서 동일한 물량만을 생산했다고 이야기 한다.
그들에게 초과로 생산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라는 것이다.
투입량과 산출량으로 표시되는 생산성은 양의 문제만 관여할 뿐 그것에 따라 자연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 지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개념이 과연 진보를 구분지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 거다.
자본주의적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진보고 혁명일 것이다.
혁명을 하고도 이것이 동일한 형태로 지속되는 것에 대해 진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의심해야 한다.
이것은 생산력을 다양하게 변화해온 사회나 역사 전체를 초월하는 동질적인 개념으로 만들어버린 것의 결과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생산력 개념이 넘어서지 못하는 근대성이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이것과 관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농촌의 피폐화와 빈부의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진행하는 중국의 공업화와 개방정책도 이러한 근대적 생산력과 연결되어져 있다.
이런 입장이라면 제국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의 도입과 발전도 진보로 이야기 되어 질 수밖에 없게 된다.
전통적 맑스주의와 조금은 다른 입장에서 진보와 역사를 이야기 하는 인물이 있다.
아마도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분들에게 에드워드 핼렛 카(E.H.Carr)란 인물은 매우 익숙한 사람이다. 잘 알다시피 ≪역사란 무엇인가?≫를 저술한 사람이다.
E.H.카의 경우 역사를 진보로 보는 대표적인 학자다.
많은 역사학자와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의 역사관의 영향을 받았으며 카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핵심은 ‘역사는 과학이다.’라는 것과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과 진보는 근대사상의 전형적 거대담론이다.
그는 진보를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전제“또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라고 정의 한다.
모든 문명사회는 다음 세대를 위해 현재의 세대가 희생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대의는 신의 섭리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말함으로 사실상 역사가 과학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생태계의 파괴를 보면서 과연 진보를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라고 한 그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이처럼 진보적이라고 일컬어 질수 있는 많은 세력과 사상들이 그 의미를 의심받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의 이유를 근대성에서 찾고 있다.
탈근대를 위한 논의가 강조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래 글은 진보의 근대성에 대한 이진경의 표현이다.
하나의 척도인 직선을 따라 동질화되고 양화된 시간, 그리고 그러한 시간적 변화의 누적과 통합을 통해 정의되는 진보의 개념은, 굳이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적분적(積分的, integral)'이다. 또한 그것은 때론 전진하지만 때론 후퇴하기도 하면서 진행되는 모든 국지적인 변화를 ’진보‘라는 하나의 방향 안에 포섭하고 통합한다는 점에서 '거시적(macro)'생산성으로 차환된 생산력 발전의 개념을 통해 포착되는 맑스주의적 진보의 역사조차도, 혹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종합의 가능성이라는 루카지의 관념 또한 이러한 거시적이고 적분적인 역사관념 안에 있다. 이러한 통합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질적인 변화의 요소들, 상인한 방향성을 갖는 벡터들은 전체 역사 안에 포섭되고 통합된다. 심지어 ’이성의 간교한 지혜‘라는 말이 잘 보여주듯이, 전체적인 방향에 역행하는 경우에 조차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기이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근대적 합리성의 통합과 포섭의 힘은 다른 이질성을 용인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나 사회적 시스템을 ‘미개’,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세계를 파괴해 버리고 만다. - 케나다, 미국의 인디언에 대한 정책, 제국주의의 식민지 문화에 대한 정책 등.
조선후기와 구한 말 세계의 열강들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일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형태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노동 중 음주나 놀이는 규칙을 벗어나거나 태만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동의 강도가 높고 시간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소작 농업형태에서는 노동의 강도를 분산시킬 욕망에 의하여 생겨난 것들일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놀이와 노동이 어우러진 형태의 문화가 된 듯하다.
노동요나 새참시간 등 노동의 사이에 쉼의 문화가 배치된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시간제 노동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것은 게으름이자 악습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것들은 금욕적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에 의하여 더욱 가속된다.
금주, 금연 등등.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과거를 형편없던 것에 대한 기억으로 인식 하게한다.
다른 문화로 인정되어지는 것이 아닌 저급한 것, 후진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에는 ‘하인리히 뵐’의 예화에서 “뭐하게?”라고 반문을 당하였던, 놀 시간에 일하여 돈을 벌라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른 것은 차이가 아니라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들로 치부된다.
민주적이라고 불리 던 정부들, 노동자적 정당, 맑스주의운동, 진보적 역사학 등 진보적이라고 여겼던 많은 생각과 이론과 사상과 체제들이 부정당하고 의심되어지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것은 무엇인가?”, “다른 진보의 개념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해 이진경이 앞의 인용에서 자신이 표현한 ‘적분적’, ‘거시적’ 진보라는 개념에 대비되는 것으로 ‘미분적’, ‘미시적’진보라고 이야기한 개념을 한 가지 다른 진보의 개념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분적 진보의 개념이시간의 누적을 통해 변화를 하나의 결과로 통합하려는 것과 달리, 미분적 진보의 개념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 조건을 밀고 가는 관성적이 벡터와 다른 이탈의 벡터를 가동시킴으로써 그 조건을 변혁하려는 성분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그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잠재적 포템셜(potential)을 포착하여 새로운 방향적 성분으로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다가오는 잠재적 사태와 현재의 사태를 잇는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그림으로써 현재를, 혹은 과거조차 변환시키는 것이다.
진보란 주어진 조건의 관성적 지속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미 처음부터 내장된 것이 펼쳐지는 ‘전개/발전(Entwicklung)’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유지하는 말 그대로 ‘보수적’ 성분에 반하여 전복 가능성을 실험하는 변환의 벡터에 의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비록 ‘충분조건’은 아리라고 해도, 그것 없이는 진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 이진경
그러니까 연속, 동질, 초월에 대비해 불연속 적인 것, 이질적인 것, 내재적인 것이 진보의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적인 것, 유지하려는 것에 대해서 이탈하려는 잠재적 위치에너지를 포착하여 전복적 사태를 초래하도록 하는 것이 다른 진보의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이야기하던 ‘리좀’, 바로 ‘리좀적 진보’가 그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의 노동조합은 8~90년대 지난한 투쟁을 통하여 그나마 지금의 지위와 조건을 만들어 냈다.
이들의 투쟁은 자신들의 지위와 조건을 개선하면서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을 가지게 되는데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논리에 의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관성이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초래하게 된다.
이들의 관성은 진보적인 것에서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변환되어 버린다.
물론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투쟁에 적극 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론 이들을 배척하고 방치하는 경우도 종종 목도한다.
이러한 관성을 벗어나도록 하는 포텐셜 에너지가 바로 비정규직의 투쟁이 될 것이다.
관성 자체의 속도의 강도나 방향은 진보와 보수를 구별하는 요소가 못된다.
관성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관성은 지배적 힘을 획득한 것의 현행화된 움직임이다.
지배적 힘을 지속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황우석 신도롬을 앞세운 생명공학분야의 약진이 눈부셨던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재인간의 탄생도 가능할 듯 해보였다.
황우석 교수의 구속 등으로 여론에서는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생명공학사업이 추진되어지고 있다.
줄기세포 등의 연구가 현재는 주된 연구지만 진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인큐베이터에서 생산되는 인간복재가 가능할 날도 올 것이다.
아마 인간에게도 ‘삼성’, ‘LG' 등 대기업의 상표가 붙을 수도 있을 것이다.
IQ 200이상 보장, 4시간의 수면만으로도 충분한 성능 발휘 등.
인간이란 제품의 성능을 광고할 지도 모르겠다.
너무 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생명공학이 생산력 자체에 이용되는 순간은 도래할 것이다.
출산의 고통도 없다.
여성해방이 한걸음 다가온 것일까?
아마도 우수한 종자의 선별을 통해서, 출산 및 육아 휴가도 없는 세상이 도래해 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다.
생산력 또는 생산성 개념에서 본다면 이와 같이 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진보’라고 불러야 할까?
테일러 주의를 소비에트에 도입한, 러다이트 운용을 반동적이라고 평가하는 통속적 맑스주의나 ‘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확대’를 이야기하는 E.H.카의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것들도 진보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진보의 개념’를 이야기 하면서 언급한 미분적이거나, 불연속적이거나 이탈하는 포텐셜의 에너지가 항상 진보적이라고 보장하지는 못한다. 이것들은 현재화 되는 속에서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다는데 문제를 드러낸다.
모든 공간과 시간의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방향성을 상정하는 것은 다시금 목적을 설정하는 근대적 발상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보수와 진보의 방향을 구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앞에서 이야기 한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도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려는 방향으로 계열화 하는 것과 비정규적 노동자에 대한 해결로 계열화하는 것은 상반된 것이다.
생명공학에 대한 문제 역시 종교적인 반대의 계열화와 자본에 의한 생명력 착취에 대한 반대라는 계열의 선은 상반되어지는 것들이다.
보수도 변할 때가 있으며 진보도 지킬 때가 있다.
모든 부수주의자들이 언제나 유지하고 지키려고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은 항상 변화하려고만 한다고 믿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차이는 변화하려는 것들과 변환 된 것을 지속시키려는 것에 통합하고 포획하려고 하는 지와 보존하려고 하는 것들의 속에서 변화되게 하고 이것을 지속되게 하는 가에 있다.
하나의 역사적 선분 안에 통합하여 동일하고 단일한 진보의 개념을 넘어서는, 다양한 방향의 잠재성을 긍정하는, 이항적 구분을 벗어나는, 초월적 척도를 배제하는, 종말이나 역사의 목적을 상정하지 않는, 관성적인 주류적 움직임에서 벗어나는 진보를 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진보는 진보된 것일 것이다.
우리들이 무슨 주의나 어떠한 계급적 입장을 고수한다는, 또는 어떤 세력과 동질적이라는 생각과 선언을 통하여 진보성이 선험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이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노무현 정부의 FTA에서, 민주노동당의 북한문제에서, 진보신당 지도부의 통합론에서 우리들은 진보라기 보다는 그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경우를 목도한다. 이와 같이 이들과 같은 편에 서있다고 진보적인 것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이러한 권력화된 것들의 내부에 동의하거나 머무르고자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사유나 실천이 항상 외부로 향해있음을 의미한다.
지배적인 것, 주류적인 것, 익숙한 것, 상식적인 것, 정중한 것, 아름다운 것, 당연한 것, 심지어는 사랑스런 것의 외부로 향해 있어야만 한다.
자본주의의 외부, 근대의 외부, 민족의 외부, 국가의 외부를 지배적인 세계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계자체를 전복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권력화 되고 동일화되고 내부화된 것에 안주하지 않는 것, 이것들에 포획당하지 않고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탈주해 가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종말적이고 목적론 적인 ‘이념’없이 진보가 가능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유목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짧지 않은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