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직신학의 회고와 전망"
서광선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 종교적 자서전
2009년 새해 벽두에 한국의 신학자들, 특히 조직신학자들이 신년하례식으로 모이는 자리에 초청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새해에도 여러분의 학문과 교육에 새로운 성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한국 조직신학의 회고와 전망” 입니다. 처음에는 “한국조직신학회의 회고와 전망”이라고 듣고, “난 우리 신학회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은퇴교수로 외국에 나가 있던 사람이라 더욱 그렇다”고 고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조직신학에 대해서 이야기 하라는” 장윤재 총무 교수님의 강권에 못 이겨 이 자리에 섰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옛날 이야기하는 것 밖에 더 있겠소. 늙은이 옛날 이야기 하는 것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데 그래도 괜찮겠소?” 그래도 하라고 해서 나온 것이니, 지루해 지거나 문제가 있으면, 그건 거의 전적으로 총무님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장윤재 교수가 번역한 책, 미국의 여성생태신학자 샐리 멕페이그(Sallie Mcfague)의 ‘풍성한 생명 : 지구의 위기 앞에 다시 생각하는 신학과 경제’(Life Abundant : Rethinking Theology and Economy for a Peril)을 들추어 보니 책의 첫머리에 자신의 “종교적 자서전”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그의 7번째 신학 학술 저서인데, 80 평생 강의실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소저너 트루스, 본회퍼, 마틴 루터 킹 등 신학자들의 종교적 자서전을 강의해 오면서도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종교적 혹은 신학적 자서전을 써 본적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자서전을 “신앙고백의 개요”라는 형식으로 써 내려가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언어학적인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것들이었는데, 여성신학을 시작하고 생명신학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많이 경험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종교적 자서전으로 발전한 것에 저윽이 놀랍고 반갑기까지 했습니다.
1970년 대 중반인가 후반부터 구미의 여성신학자들이 신학 하는 사람의 경험, 몸의 경험에서 부터 신학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래서 신학은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신학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신학 논문 앞에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인 상아탑 속의 신학적 글쓰기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1970년대의 암울한 억압적 정치적 상황에서 민중신학이 태동하면서,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이름 아래, 민중의 한의 이야기, 왕 정사가 아닌 민중사, “문중의 눈으로 성서 읽기”라는 식의 신학하기를 “이야기 신학”으로 발전시키면서 “자전적 신학하기”를 과감하게 내 세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의 이야기, “한국 조직신학을 회고”라는 이야기도 저의 이야기, 제가 80평생 신학 해 온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전적으로 신학하게 된 것은 여성신학자들에게서 배운 것도 있고 민중 신학자들에게서 배운 것도 있지만, 제일 충격적으로 배운 것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저희 기독자 교수들을 합동수사본부라는 고문실에 감금하고 해직을 강요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당시 이화대학의 문리대학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체포 연행 당시에는 학장실에서 학과장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의 현장에서 곧 바로 서대문에 있는 수사본부로 끌려가, 허리띠를 풀고, 독방 철제 책상에 앉아서 한 일은 “범죄 자술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부모 형제 학교 선생들 친구들 그리고 읽은 책들, ‘미주알고주알’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써라. … 누가 어떻게 학장님을 빨갱이로 만들고 학생들을 선동하게 되었는지 말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줄이 쳐진 편전지 한 뭉치와 볼펜을 주고 감방에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저의 “범죄 자술서”를 써 내려갔는데, 첫날 “검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나 학장님, 지금 장난치시는 겁니까?” 불호령이 내렸습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저의 자서전 집필은 책으로 내면 300페이지가 넘도록,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2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독방에 앉아서, 하루 세끼 근처 분식집에서 배달하는 밥 잘 먹고,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나를 윽박지르는 경찰 조사관 밖에 없고, 전화도 편지도 공문도 없는 상태에서 나의 인생을 돌아보고 나의 신앙과 신학을 성찰해 보는 것은 하늘이 주신 축복이며 기회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제라도 그 때 쓴 글을 찾아서 출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는 거기서 “아, 본회퍼가 나치 감옥에서 편지도 쓰고 신학 단상을 쓴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내가 지금 여기서 쓰는 글이 책으로 출판되어서 서광선의 ‘옥중서한’으로 많은 이들이 읽고 감동받을 만한 것이 되었으면…”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썼기 때문입니다.
자술서 마감하는 다음날, 감방에서 총장 앞으로 사직서를 쓰고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로부터 4년 동안 명예로운 “해직 교수”하는 동안, 그때 까지 미루어 왔던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 일선의 경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감방에서 “종교적 자서전” 쓰기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자서전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을 신학화 하는 것이 신학 하는 데 조금도 학문적으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신학적 신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이야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시인도 성인도 아니고 죄 많고 욕심 많은 한 인간이 그것도 보통 자서전이 아니라 “신학적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본회퍼도 마틴 루터 킹도 훌륭한 신학자들입니다. 이들처럼 훌륭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운 대로 지난 50년 가까운 시간동안의 신학 해 온 제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한국조직신학자들이 신학 해 온 이야기”의 한 장(chapter)에 끼어들어 보려는 것입니다.
2. 전환의 시대 : 1960년대
한국조직신학회 연혁을 보니, 1964년 9월 12일 조직신학회의 전신인 한국신학회 창립총회로 출범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964년, 제가 뉴욕의 유니언신학대학원 BD(M.Div.) 학생으로 신학공부를 하던 중, 이화대학의 초청으로 교목실과 기독교학과의 인턴으로 일 년 간 나와 있던 때 입니다. 그해 5월에 나와서 6월에 결혼식을 올렸으니까, 9월 12일 김재준 목사님이 초대 회장이 되는 창립총회에 틀림없이 참석하는 영광을 가졌을 터인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당시 학생들과 대학 교수들의 반정부 데모였습니다. 5.16쿠데타(1961)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하려는 데 대한 지성인들의 반대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역사는 4.19 학생운동으로 이승만 정권을 몰아냈고, 잠시 동안의 민주정권의 무기력을 기회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현정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민심이 흉흉한 세월이었습니다. 경제적 파산과 민생의 고통, 정치적 혼란의 한가운데, 우리 신학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당시의 ‘기독교 사상’에 기고한 신학자들의 글을 읽어 보면, 5.16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군사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군인들의 봉기는 불가결한 것이고, 시국이 안정되는 대로 군인은 부대로 돌아가고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라는 충고가 있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용감하게 군인들의 행동을 “폭거”라고 감히 말한 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한국 기독교의 항일 민족주의의 전통에서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또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예속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어떻든, 역사적으로 대단한 변동기고 혼란기였습니다.
1960년대의 세계의 신학적 분위기 역시 “전환의 시대”였습니다. 이 말은 서남동 교수가 1970년 대에 출판한 ‘전환시대의 신학’이란 책 제목에서 따 온 말입니다. 이때가 바로 제가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할 때입니다. 당시의 미국의 신학계와 교회를 놀라게 한 것은 하비 콕스(Harvey Cox)의 ‘세속도시’ 보다, 혹은 영국 성공회 신부 로빈슨 감독(Jhon A. T. Bobinson)의 ‘신에게 솔직히’ 보다는 알타이저(Thomas Altizer) 등 미국의 신학대학 교수들이 선포한 ‘신의 죽음’ 이었습니다. 뉴욕 유니언 신학생으로 신의 죽음의 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특강을 들으면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근본주의 목사 집안에서 자라난 “신학적 촌놈”이 “마귀학교”라는 딱지가 붙은 자유주의 신학대학원에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서, 난생 처음으로 구약성서의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JEPD를 익히노라 정신이 없는 터에, “신이 죽었다”고 저명한 신학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넋을 잃고 듣고 있는 제 모습이 한심하기만 했습니다.
주일학교 신앙과 신학의 대혼란 속에서 만난 사람이 본회퍼였습니다. 그의 ‘옥중서한’이 드디어 영문으로 번역 출판되어 책방에 나오자마자 달려가 줄을 서서 사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기들은 눈물을 흘려 가며 밤새워 읽었습니다. 특히 나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그가 히틀러의 폭행과 유태인 학살을 참을 수 없어서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는 것에 저는 대단한 매혹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계속 신학적 사고를 했다는 데 경의를 표했습니다. 순교를 앞두고 쓴 신학적 성찰들과 선포들은 저의 “신학적 전환”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겪은 식민지시대, 항일 기독교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기독교를 연상하면서, 북한 공산치하에서 반공을 외치다가 6.25 한국전쟁 때 대동강 기슭에서 인민군 총살에 쓰러진 목사 아버지를 기리면서, 본회퍼는 저의 신학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유니언의 우리 동기생들에게도 본회퍼는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끄는 흑인 민권 운동의 정신적 지주, 신학적 영웅이었습니다. 킹 목사의 흑인 해방운동의 대열에 나섰습니다. 강의실에서 거리로 나와서 민권운동에 투신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참여하기도 하면서 “행동하는 신학” 교회 밖의 현실 세상에서 신학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익히고 배우고 느꼈습니다.
물론 신학교 강의실에서는 칼 바르트를 강의하고, 폴 틸리히의 신학을 듣고, 라인홀드 니어버를 읽었습니다. 저는 틸리히의 실존주의 신학에 심취했습니다. 인간 실존의 상황과 인간 실존에서 고민하고 인생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를 묻고 실존적 불안에 떠는 실존적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에게 구원의 대답을 얻으려고 하는 노력이 신학이라는 그의 이른바 상관방법에 매료되어 저의 신학 하는 방법론으로 채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라인홀드 니이버의 현실주의적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윤리를 개인 윤리의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 사회윤리를 생각하게 하는 데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사회참여의 타당성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그의 책 두께나 말의 양에 비해서 지루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나의 기독교 신앙이 근본주의 신학의 좁은 틀에서 해방되면서도 확고하게 가질 수 있는 이론적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절대적 초월성과 자율성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을 읽으면서 세상의 정치적 권력들을 상대화하고 신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대학 학부과정과 대학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했습니다. 학부에서는 주로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자들의 철학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대학원에서는 당시 사조였던 실존주의 철학과 실증주의 언어 철학에 몰두하면서, 비트겐슈타인 등, 언어 철학자들의 철학하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실증주의 철학자들이 “경험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말은 넌센스이며 무의미하다” 종교적인 언어, 종교적 신앙의 언어가 무의미하다는 언어 철학과의 씨름을 시작한 것이니다. 어려운 씨름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철학하는 방법의 하나로써 “철학은 언어를 청소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데 힘을 얻었습니다. 어지러운 말, 말 같지 않은 말… 등 우리 일상생활에서 뜻 없이 생각 없이 내뱉는 그야말로 쓸 데 없는 말들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역할을 철학이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일이 철학하는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을 기독교 신학이나 종교 신앙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시작한 “철학적 신학”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박사학위 논문은 “종교적 언어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썼습니다. 나의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은 나의 신앙의 언어가 조금이라도 합리성이 없다면, 나의 신앙도 신학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 나 자신과의 논쟁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는 종교적 언어의 합리성은 철학적으로 물 건너 간 이야기이고, 신학 쪽에서는 합리적이 아니어도 무관하다는 태도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격동의 시대, 민중의 시대 : 1970년대
우리 한국 역사, 특히 이른바 근, 현대사를 놓고 볼 때, 전환기가 아닌 때가 없었고, 격동의 시대, 고난의 시대, 시련의 시대가 아닌 때가 없었습니다. 저는 1960년대 말에 귀국해서 이화여대 강단에 다시 섰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해서 성공하고 출마해 김대중 야당 후보와 맞서서 당선되던 때입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범국민적 3선 개헌운동을 추진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1972년 7.4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위수령을 내리고 대학 문들을 강제 폐쇄하자마자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6년제 유신 대통령으로 재집권했습니다. “잘 살아 보세” 온 땅에 박 대통령의 자작곡인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고도경제성장을 내 세운 긴급조치 정치를 강행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강압 정치의 한 가운데에서도 대학생들의 반정부 반유신 데모는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1973년 남산 부활절 반정부 시위 사건을 비롯해서 박형규 목사를 선두로 한 기독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작되어 수많은 기독학생들과 교수들이 군사재판을 받고 영오의 몸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고도 경제 성장을 몰고 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집권자들의 논리였습니다. 경제성장의 노예생활을 해야 했던 젊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짖을 때, 전태일은 개발 독재에 항의하고 노동자들의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스스로 몸을 불질렀습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김재준 목사님은 저의 신학 하는 몇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동인지로 신학 잡지를 출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 열 사람이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잡지 이름을 ‘제3일’로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민중의 고난의 시대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짐하고 신학 하는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context)에서 발동한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한국의 대학 강단으로 돌아오면서, 신학 교수로 철학 교수로 멋진 강의를 해 보겠다는 포부가 대단했습니다. 제가 미국서 배운 대로, 서양의 철학사상과 신학사상을 정확하게 재미있게 전수하겠다는 포부였습니다. 학생들은 강의시간에 열심히 제가 하는 말을 받아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학생대표라는 학생이 찾아 와서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수님 강의가 힘들 뿐 아니라, 우리가 왜 미국신학자들, 서양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가하게 서양 사람들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신학의 두 번째 깨달음이고 전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신학대학원에서 근본주의 보수 신앙과 신학에서 자유주의 진보적 신앙과 신학으로 전환했을 뿐 아니라, 말하고 생각하는 신학에서 행동하는 신학으로, 강의실에서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로 나가는 전환의 경험을 한국에 와서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를 찾아 온 학생은 서양신학과 철학의 상아탑 학문에 도취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말로 학생들을 잠들게 했던 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학생들이 데모하는데 나가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경찰차에 붙들려 가는데 따라가서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경찰서 유치장에 가 경찰들과 옥신각신하기도 했습니다. 무력감만 느끼고 쫓겨 나오는 것이 보통일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축제를 한다고 하면서 한국 전통 민속놀이 탈춤공연을 하고 판소리를 구성지게 불러 대는 마당에 끼어들어 함께 울고 웃고 하면서 한국과 민중, 정치적 행동과 문화를 다시 익혀 갔습니다.
저의 신앙과 신학에 몇 가지 전환, 회개가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근본주의 보수주의 신앙에서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자유의 갈구와 자유로운 생각, 자유로운 글쓰기, 자유롭게 신학 하는 일이었습니다. 둘째로는, 대학교 강의실에서만 신학을 논하고 서재에서만 신학을 쓰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 교정으로 나가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는, 강단 신학과 설교로부터 거리로 나가서 학생들과 민중들과 함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넷째로는, 머리로 하던 신학을 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성서를 성서 역사 비판적 학설에 입각해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실을 해석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위의 대전환도 힘겨웠는데, 또 한 번의 대전환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학교 교정에서의 경험을 대학 강의실로 다시 가지고 들어오는 일입니다. 강의실은 강의실에서, 대학 교정의 경험은 경험대로 따로 따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경험으로 학문을 논하고 긍정할 것은 보강하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거리와 공장과 농촌에서 얻은 경험을 신학 하는 데, 성서를 해석하는 데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민중과 함께 한 경험으로,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서 속에 민중을 발견하고 민중 예수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셋째, 부당한 정권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으로 성서를 정치적으로 읽고 정치신학으로서의 문화적 현실(context)를 해석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현실 세상의 상황에서, 그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성서를 읽고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학문(theory)에서 행동(action)이 아니라, 행동에서 학문으로 해석학적 순환이 전환한 것입니다. 생각과 학문에서 행동으로, 행동에서 다시 학문의 보강과 수정으로 해석학적 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의 핵심이 해석학이라고 할 때, 한국의 신학은 1970년대와 80년대 위와 같은 대전환, 해석학적 순환의 대전환이 있어왔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신학 하는 방법론에 있어서의 전환은 구미의 정치신학자들이나 남미의 해방신학자들도 이야기해 온 것입니다. (도로테 죌레, 구티에르즈 등) 그러나 1960년대 초, 한국 신학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던 당시의 중요한 신학적 전환은 방법론만이 아니라 그 내용(contents)에 있어서의 전환이 있어 왔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토착화론의 신학적 시도와 논쟁이었습니다. 서구에서 들어 온 기독교를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는 작업, 혹은 뿌리내린 것을 밝히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적 차원, 즉 미국 선교사들이 서구 문화의 입장에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고 포교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 한국문화의 입장에서 어떻게 복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소화해서 뿌리 내리고 성장하게 하는가 하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그리하여 주로 감리교 신학파의 교수들(윤성범, 변선환, 유동식 등)이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교, 불교, 유교를 연구하면서 기독교와의 신학적 접목을 시도하였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다만, 그동안의 신학적 노력은 서구신학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그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서구신학에서 시작하고 서구신학을 번역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신학을 한국의 문화적 종교적 토대 위에 구축하려는 노력입니다. “한국의 기독교”(Christianity in Korea)는 있어도 “한국기독교”(Korea Christianity)는 없다고 하는 것이 일부 미국선교사들의 말이지만, 한국기독교는 세계기독교와 문화적인 면, 신학적인 면에서 조차도 차별화되고 있고 독특하고 자주적으로 독립해 있습니다. 보수주의 교회나 진보적 기독교 단체에서나 한국기독교는 한국식이고 한국 냄새가 나고 한국 사람의 것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토착화 신학과 70년대의 민중신학은 엄연히 한국 신학입니다. 이 전환은 대전환입니다. 이제는 한국 신학의 시각에서 세계 신학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착화 신학, 상황신학, 민중신학을 보편적 신학의 반열에 올려놓고, 신학 하는 기준으로 내 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4. 민주화의 소용돌이에서 : 1980년대
1979년 10월 어느 날 밤, 청화대 근처 안가의 술자리에서 18년 이상의 권좌를 누린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알에 쓰러진 것은 크게 말해서 신학적 사건, 아니면 민중신학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수많은 크고 작은 민중봉기의 정점에, 권력자의 권력욕의 정점에서 그 암살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봉기는 또 다른 군사력에 의하여 좌절을 거듭하다가(1980년 광주 민주항쟁), 결국 1987년에 이르러서야 헌법을 개정하여 군사독재와 유신정권 시대의 막을 내리면서 민중봉기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민중역사가들은 기록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또 하나의 전환기에 휘말려 들어 간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은 아직도 보수와 진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교회에는 경제적 축복을 바라는 민중들이 모여 들고, 대형화되면서 정치 세력화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광주 민주항쟁의 경험을 통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의 반공, 반북의식의 전환의 필요성을 통감한 진보적 기독교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데 시학적 정치적 자원을 동원하였습니다. 여러 번의 신학협의회를 탄압 속에서 강행한 결과 내어 놓은 것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 이른바 “88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정치적인 선언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를 계기로 통일신학의 이름으로 분단된 조국의 상황신학을 논의하고 세상에 내어 놓기 시작했습니다(박순경, 홍근수 등).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날아가 김일성 주석과 포옹합니다.
1989년 독일의 동과 서를 갈라놓았던 베를린의 분단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소련이 자폭하는 역사적 전환기, 동서 냉전의 종식을 울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젊은 제 2세대 민중신학자(강원돈, 박성준 등)들은 민중신학의 이념적 토대를 막시즘에 두어야 한다는 “민중시학의 막시스트 해석학”을 제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붕괴, 1970년대 민중신학의 사회주의와의 접목은 그 시도마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과 독일 신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한국 신학생들이 “한국신학”의 일환으로 소개하는 정도로 민중신학은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민중신학회가 존재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10명 내외의 노소신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하는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안병무 박사 기일에 기념강연회를 꾸준히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대문에 있는 “기사연” 다락방에 10명 내외의 노장 신학자들이 모여서 서남동 목사의 신학을 공부하는 월례 발표회를 일 년 남짓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들의 모임”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아니면 “마가 다락방에 모여 앉아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의 소수의 모임들로 한국 신학으로써의 민중신학은 이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미국의 여성해방운동과 신학의 발전은 한국의 여성신학계에 자극을 주어, 한국 여성신학의 활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해방신학의 한 부분으로써, 혹은 “민죽 속의 민중”으로 인식하는 한국의 여성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의 한 부분으로 자리 매김하는 것 같았으나, 여성신학의 독특한 자리와 시각으로 차별화 되는 여성신학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직신학자들 뿐 아니라 성서신학, 교회사, 종교교육 등 다 학문적 접근을 통해 양성평등의 문제, 억압 받고 쇠외된 여성의 해방과 치유의 문제, 여성의 눈으로 성서 읽기, 여성의 역사 쓰기 등 다양한 신학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출범한 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의 연구 활동과 출판활동은 주목해야 할 한국 신학계의 발전입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여성신학회가 단독학회로써 기독교 학회 가입한 것도 주목할 일입니다.
5. 다양화와 다원주의의 도전 : 21세기의 문턱에서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구미 신학계는 “거장”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뉴욕 유니언 교정에 가끔 나타나서 멀리 서서 그의 모습을 우러러 볼 수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는 당시 시카고 대학에서 여생을 강의하다가 돌아가셨지만, 우리 곁에 살아있는 양 그의 신학에 몰두했습니다. 20세기의 거장 불트만, 칼 바르트도 60년대에 타계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학의 거장들로, 몰트만이 활동했고, 그가 출판한 책들은 거의 모두 그의 애제자 김균진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되어 많이 읽혀왔습니다. 특히 1975년 방한한 이래 수차례에 걸친 방한으로 우리 신학계를 격려했습니다. 지난 가을 저에게 서한을 보내며,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여 올해 5월 한국신학대학 초청으로 내한할 예정입니다. 미국의 흑인 해방신학자 제임스 콘도 1970년대 한국신학회의 초청으로 내한하여 신학적 연대를 이룩하였고, 그의 저서들이 고 현영학 교수에 의해 번역 소개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신학적 거장으로 이름 할만한 “큰 별”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작은 별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김재준, 서남동, 김정준, 윤성범, 안병무 등 큰 별들이 지고 난 뒤에는 작은 별들이 나름대로 반짝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가운데, 신학적 저서로 내놓을 만한 대작이라면 어떤 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제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으로 안병무 교수의 단행본 ‘갈릴리아의 예수’는 성서신학으로 출발한 기독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남동 교수의 단행본들이 있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집필한 신학적 단상과 논문들을 편집해 내어 놓은 것으로 일관성 있는 조직신학적 대작이라고 할 수 없는 책들입니다. 상황신학은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 한 권의 책으로 조직신학을 조직적으로 일관성 있게 써 내려가는 일이 사라지고, 다양한 생각들을 조각들처럼 내어 놓는 학문 활동을 포스트모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신학계에도 포스트모던의 학문적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모던의 중요한 논의로써 다양성, 차이성, 혹은 다원주의는 깊은 논의나 토론 혹은 논쟁없이 단순한 상대주의로 “정죄”하여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고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독일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말을 인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리교 신학대학의 변선한 학장은 20세기 말 유일한 종교재판을 한국 감리교회에서 받고, 학장직을 박탈당하고 목사직까지 내놓아야 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모더니즘도 수용 못하는 한국교회의 후진성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1996년 정년퇴임을 하고 미국에서 5년 동안 이런 저런 신학대학에 다니며 한국의 신학과 아시아 신학을 소개하는 강의를 하다가 홍콩에 와서 미국의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을 지원하는 재단 사무실 일을 했습니다. 10년 동안의 해외 생활에서 돌아 온지 3년이 되어 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우리 조직신학회 회원들의 활동을 피상적으로 나마 알고 싶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고맙게도 조직신학회 연혁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제가 1978년 조직신학회 전신인 한국신학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기록에 놀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유신정권이 신학자들과 기독자 교수들을 극도로 위험시 했기 때문에, 겁 없는 몇 사람이 모여 앉아서 논문을 읽고 “당신이 회장 하시요” “아니요 못해요” 하던 때라 제가 떠맡게 되던 때입니다. 그 이후에는 기록이 없다가 1980년 대 초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어려운 때였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95년에 이르러 ‘한국조직신학논총’이 창간됩니다. 2008년까지 총 21집이 발간된 것을 보고, 논문 제목만 가지고 한국 조직신학자들의 연구동향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기독교사상’이나 ‘신학사상’ 등 다른 기독교 월간 내지 계간지에 중요한 신학논문이 게재되어 있지만, 우리 논총에 게제된 학술 논문만 가지고도 그동안의 연구동향을 겉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논총에만 집중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총 211편의 논문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연구의 대상이 되어 온 신학자들 가운데 구미 신학자들로는 몰트만이 16편으로 가장 많았고, 바르트가 10편, 틸리히가 9편 등으로, 77편의 논문이 어거스티누스, 슐라이에르마허 등의 분포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2004년 제10집은 슐라이에르마허 특집이었고, 2005년 제12집은 몰트만 특집이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문이 9편이나 되는 것을 보고 역시 서구 시대정신과 구미 신학교육의 영향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한국 신학에 대한 논문은 모두 22편에 불과했습니다.
신학적 주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주 다양했습니다. 특집으로는 2002년 영성신학을 다루었고, 2003년 과학과 신학, 2004년에는 생명과 성령을 다루었습니다. 신학적 방법론을 다룬 논문이 11편, 한국교회의 목회와 설교에 대한 논문이 11편, 신론에 대한 건 7편, 그리스도론은 2편, 종말과 재림은 4편, 성서는 3편, 인간학은 2편, 여성신학 관계 논문은 5편으로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총 211편의 게재 논문 중, 112편이 신학 주제들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주로 서구 중심으로 연구한 것들입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전망을 말하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새해 첫 모임의 하례회로 모이는 것인 만큼 “덕담” 한 마디 하라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작년 모임에서도 한 말이지만, 한국신학 창출에 더욱 더 노력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둘째로는, 한국신학의 과거사, 불행한 과거사 청산에 신학자들과 신학교육자들이 나서 주기를 바랍니다. 장로교회가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로 분열된 불행한 과거사, 김재준 목사를 이단으로 척결한 과거사를 청산하는 일을 시작하자는 말입니다. 신학적인 문제이므로 신학자들이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신학교육의 문제였으니, 신학 교육자들이 앞장서자는 것입니다. 변선환 교수 문제 역시 감리교 계열의 신학자들이 앞장서서 불행한 과거사를 청산했으면 합니다. 셋째로, 한국의 사화적 상황이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학문적으로 국제적으로 다양화 해 가는 다원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도전에 대해서 한국교회와 신학자들이 어떤 해답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다원화 사회의 목회, 다원화 되어 가는 사회에서의 민중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신학화 하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 전통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화, 연대, 그리고 한국 종교신학의 형성 등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콜로니알(식민지) 신학의 과제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저희 세대에는 신학 공부의 준비로 철학, 특히 서양철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동양철학, 유불선에 대한 연구 역시 심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을 논하면서부터는 민중의 현상 연구를 위해서는 사회과학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중에도 사회학과 정치학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경제학에 대한 지식 없이는 민중을 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우리 논총에 게재된 논문 중 세계화의 문제나 신자유주의로 인해 파생되는 세계 민중의 문제를 다룬 신학논문은 단 한 편 밖에 없었습니다. 생태문제, 지구 온난화 문제 등이 경제문제, 특히 자유 시장 문제, 무제한 소비문화의 문제 등과 연결된다는 인식은 위에서 소개한 맥페이그의 ‘풍성한 생명’에 설득력 있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생명신학은 창조신학과 함께 더 많은,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지난 몇 년 동안 추진해 온 일본 신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 그리고 올해 예정되어 있는 중국 신학자들과의 교류는 계속 심도 있는 신학적 연대로 연결되어 동북아시아 민중과 생명과 생태 문제에 대한 대화와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신학자들은 아시아 신학계의 별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은 “어둠이 깊은 물우에 뒤덮여 있던” 혼란과 무질서, 절망과 좌절의 역사에서 탄생해서, 비록 작은 별들이지만 어두운 한국역사의 밤하늘을 비추어 왔습니다. 아시아와 제3세계의 어두운 밤하들에 높이 떠서 우리 생명의 조각배의 항로를 비추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2009. 1. 18. 아폴로기아)
혹시 서광선 목사님 첫 설교집 '계절따라 성령따라 ' 책 소장하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