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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9월14일, 저녁 8시, 시편 139편
여호와는 누군가?
이창동의 영화 <시>는 삶이 한 편의 시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김용택 시인이 등장한다. 두 가지를 말한다. 시가 말을 건다는 사실과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시편의 시인들에게도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말을 거는 것을 경험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139편도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전지성(1-6절)
시인은 하나님을 전지(全知)의 존재로 경험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아신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어떻게 경험했을까? 이건 말로 설명이 안 된다. 시가 말을 거는 것처럼 절대적인 세계가 말을 거는 경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그런 존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걸 아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이들이 점쟁이나 사이비 교주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라 사람의 인식론적 한계가 무엇인지 모르며, 이 세계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모르는 무식한 이들이다. 설교자들도 그런 위험성에 빠지기도 한다. 청중들이 자신의 말에 열광적으로 호응한다는 사실에 앞에서 하나님의 전지성과 자신의 한계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6절에서 시편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2) 하나님의 편재성(7-12절)
하나님의 전지성은 편재성을 가리킨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분이기에, 즉 없는 곳이 없는 분이기에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영으로 표현한다. 그 영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늘에 올라가도, 스올에 내려가도 하나님은 존재한다. ‘새벽 날개’(당시 사람들은 새벽이 날개를 가졌다고 봄)를 달고 바다 끝에 가도 이미 하나님이 그곳에 존재한다. 흑암에도 숨을 수 없다. 주께는 흑암과 빛이 똑같다.(12절)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문장과 비슷하다.
3) 하나님의 창조성(13-16)
하나님의 전지성과 편재성은 곧 창조성을 전제로 한다. 이 시인은 창조 행위의 심연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을 14절에서 기묘, 기이라고 표현했다.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다고도 한다.(15절) 물리적 현상으로 봐도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의 몸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라. 16절은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아득한 사건인지를 가리킨다.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4) 여호와 앞에서(17-24)
시편 기자는 전지, 편재, 창조 앞에서 취해야 할 영적 태도를 세 가지로 설명하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찬양(17,18절)이다. 둘째는 악에 대한 고민이다.(19-22) 하나님의 창조 사건 앞에서 악은 풀기 어려운 딜레마다. 시편기자는 악은 창조성을 훼손하는 것이기에 증오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제의 공동체의 한계다. 예수의 십자가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악을 극복한다.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간구다.(23,24절) 이것이 전지, 편재,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