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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9월21일, 저녁 8시, 시편 140편
‘주의 앞’에서 산다
시편 140편에는 역사적 흔적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기원전 587년 전인지, 후인지, 또는 포로 귀환 후인지도 확인할 수 없다. 시편기자가 악한 이들에 의해서 크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영적인 실존이 어떤지, 그가 그런 상황을 어떻게 뚫고 나가는지 살펴보자.
1) 그는 우선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1절) 4절에서도 똑같은 호소를 한다. 이런 기도는 탄원이면서 간구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마땅하다. 시편에는 이런 탄원이 많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와 축귀 등을 구했다. 주기도에도 일용한 양식을 위한 기도와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온다.
문제는 이기심이나 경쟁심에서 나오는 기도다. 이미 먹고 살만한 게 있는데도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건 바른 기도가 아니다. 야보고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에 임할 때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한 것과 비슷하다.(마 20:20 이하) 예수님은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다.
2) 시편 기자는 악, 또는 악인의 행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악한 이들은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해서 매일 모인다.(2절) ‘마음속’은 겉모습이 아닌 실제 그 사람을 가리킨다. 악은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악한 본질을 전제로 한다. 그런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매일’ 모인다. 그런 일에 바쁘다. 악은 올무를 놓고 그물을 치며 함정을 판다.(5절)
3) 악을 묘사한 뒤에 악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한다.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말며,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해달라고 한다.(8절) 악은 자신들의 음모가 이루어지면 교만해지기 때문이다. 9-11절에서 악을 멸절을 문학적으로 묘사한다. 입술의 재난, 뜨거운 숯불, 깊은 웅덩이... 이런 기도는 단순히 자기의 대적자들이 망하기를 바란다기보다는 그런 악은 하나님의 정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4) 140편의 결론은 12,13절이다. 세상은 악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편기자도 그 사실을 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난치병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을 뚫고나갈 힘은 다른 데서 주어진다.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시고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12절) 실질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변호와 하나님이 정의는 무엇인가를 아는 게 핵심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영적 사건이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차원이다. 이런 삶이 가능한가?
이 질문의 간접적인 대답이 13절이다. 의인들은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은 ‘주의 앞’에서 산다. 주의 앞에서 사는 이유는 다른 데서는 변호와 정의를, 즉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 앞에서 산다. 거기서만 참된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