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사랑채에 쓴 글에 대해서 정용섭목사님께서 테리 이글톤의 글을 답으로 남겨주셨습니다.
육바지기 님,
그렇군요.
김진호 목사님이 거론하신 반골기질의 신학자는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ㅎㅎ
중략
테리 이글톤의 <신을 옹호하다>입니다.
37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억압에 마치 연인처럼 집착하며,
거기서 얻는 자학적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 죄책감을 떨쳐낸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질변 자체를 빼앗기를 일이 된다.
이 질병이 바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근원적 마조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로서 사랑받는다는 복음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입증해주는 고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것 같고,
도덕적 자기수양을 위해 애쓰는 우리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멍에가 가벼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거운 사슬에 묶이기를 바란다.
요즘 제가 보는 책 중에 스트레스와 원숭이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새폴스키 교수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 : the trouble with testosterone)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종교적 현상을 정신분열증과 강박신경증으로 해석하는 챕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정용섭목사님께서 발췌하신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강박신경증 환자들은 계속 자기가 더럽다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몸과 손발을 씻고, 특별한 숫자에 집착해서 계단을 홀수로만 걷는다든가 항상 오른발을 먼저 내밀면서 걷습니다. 또는 끊임없이 자기의 죄책감을 해결하고자 여러가지 기도와 주문 외기, 고행하기, 금식하기등으로 자신을 학대합니다. ... 이게 누구의 얘기줄 아시나요? 마틴루터의 얘기입니다.
새폴스키 교수는 이런 인간의 강박신경증을 해소하는 집단적 방법이 종교라고 보고 있습니다. 유대교나 카톨릭, 힌두교등의 각종 계율과 터부등이 이런 강박신경증의 종교적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챕터의 결론이 재밌습니다. 이런 종교적인 율법조항들이 그런 강박신경증 환자의 공포심을 없애주거나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무슨 효과인가? 강박신경증 환자들은 뭔가 알 수 없는 막연한 공포심을 느끼는데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계량화하고 숫자화시킴으로 공포심을 형상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즉 차라리 보이지 않는 도깨비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자가 더 낫다는 뜻입니다. 강박신경증 환자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막연한 공포를 느끼기보다 그냥 강박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게 더 편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엔더의 게임이라는 아동용 SF소설 시리즈 3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행성에 매우 뛰어난 종족이 살았는데 이 사실을 우주의 지배자인 황제가 알게 된겁니다. 이 종족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강박신경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그 종족에게 주입하고 성직자를 세워서, 국민들과 성직자가 온통 노동과 종교계율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행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그 종족의 천재성을 말살시켜 버립니다.
적어도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이 이런 종교적인 계율의 강박신경증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지만, 그 후손인 카톨릭과 개신교는 또 다시 계율을 만들어 거기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하고 그걸 못하면 죄책감에 계속 시달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새폴스키는 이 부분을 예리하게 파악한 것으로 보이지만, 진정한 예수의 참 복음은 보지 못한 듯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전 사랑채에 쓴 글에 대해서 정용섭목사님께서 테리 이글톤의 글을 답으로 남겨주셨습니다.
육바지기 님,
그렇군요.
김진호 목사님이 거론하신 반골기질의 신학자는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ㅎㅎ
중략테리 이글톤의 <신을 옹호하다>입니다.
37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억압에 마치 연인처럼 집착하며,
거기서 얻는 자학적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 죄책감을 떨쳐낸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질변 자체를 빼앗기를 일이 된다.
이 질병이 바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근원적 마조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로서 사랑받는다는 복음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입증해주는 고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것 같고,
도덕적 자기수양을 위해 애쓰는 우리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멍에가 가벼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거운 사슬에 묶이기를 바란다.
요즘 제가 보는 책 중에 스트레스와 원숭이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새폴스키 교수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 : the trouble with testosterone)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종교적 현상을 정신분열증과 강박신경증으로 해석하는 챕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정용섭목사님께서 발췌하신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강박신경증 환자들은 계속 자기가 더럽다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몸과 손발을 씻고, 특별한 숫자에 집착해서 계단을 홀수로만 걷는다든가 항상 오른발을 먼저 내밀면서 걷습니다. 또는 끊임없이 자기의 죄책감을 해결하고자 여러가지 기도와 주문 외기, 고행하기, 금식하기등으로 자신을 학대합니다. ... 이게 누구의 얘기줄 아시나요? 마틴루터의 얘기입니다.
새폴스키 교수는 이런 인간의 강박신경증을 해소하는 집단적 방법이 종교라고 보고 있습니다. 유대교나 카톨릭, 힌두교등의 각종 계율과 터부등이 이런 강박신경증의 종교적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챕터의 결론이 재밌습니다. 이런 종교적인 율법조항들이 그런 강박신경증 환자의 공포심을 없애주거나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무슨 효과인가? 강박신경증 환자들은 뭔가 알 수 없는 막연한 공포심을 느끼는데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계량화하고 숫자화시킴으로 공포심을 형상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즉 차라리 보이지 않는 도깨비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자가 더 낫다는 뜻입니다. 강박신경증 환자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막연한 공포를 느끼기보다 그냥 강박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게 더 편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엔더의 게임이라는 아동용 SF소설 시리즈 3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행성에 매우 뛰어난 종족이 살았는데 이 사실을 우주의 지배자인 황제가 알게 된겁니다. 이 종족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강박신경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그 종족에게 주입하고 성직자를 세워서, 국민들과 성직자가 온통 노동과 종교계율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행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그 종족의 천재성을 말살시켜 버립니다.
적어도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이 이런 종교적인 계율의 강박신경증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지만, 그 후손인 카톨릭과 개신교는 또 다시 계율을 만들어 거기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하고 그걸 못하면 죄책감에 계속 시달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새폴스키는 이 부분을 예리하게 파악한 것으로 보이지만, 진정한 예수의 참 복음은 보지 못한 듯하여 가슴이 아픕니다.